때는 2009년, 우리가 사귄 지 2년되던 해였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녀는 나와의 결혼을 통해 성의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일종의 후회였는지도 모르겠다. 결혼할 때 우리는 둘 다 분명한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떤 배우자를 원하는지에 관해서 자아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렇게 두 성격장애자가 결혼했고, 그 결과는 재난적이었다.
결혼이야기는 항상 그녀가 꺼냈다. 그녀는 30세인 자신의 나이가 적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나와의 결혼을 매우 반대했다. 그녀 집에 처음 갔던 날 내가 그녀를 찍은 사진을 그녀의 아버지에게 드리며 “너무 예뻐요”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당연히 예쁘지. 영화배우 같구먼.” 이라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의 아버지가 이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그녀에게 “지금은 너무 못생기고 바보 같아!” 라고 쏘아 부쳤다. 딸이 나를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나를 변호해주지 않았다.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힘들었다. 그녀 집에 있던 며칠 동안 그녀의 아버지는 TV에 부동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언제 집 살래?” 라며 물었다. 내가 아직 집이 없지만 사줄 능력은 있다고 대답하자 “내 눈엔 왜 안보일까?”라는 아버지의 말에 대답 할 말이 없었다.
남쪽의 겨울은 음산하게 춥다. 가만히 있기 힘들어 밖으로 나와 걸었다. 도시 대부분의 가게들도 설까지 문을 닫고 런민(人民)의원만 문이 열려있었다. 오후 내내 외래로비에 앉아있었다.
중국인들이 결혼생활이란 것을 이화시켜 경제적인 속성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모두가 결혼생활은 사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는 사랑 외의 ‘스팩’이 갖춰졌는지를 본다. 당시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베이징에서 월세를 얻어 살았다. 결혼 전 그녀의 어머니가 한번 보더니 “이렇게 살 거면 결혼하지 마. 쪽 팔린다.” 라고 말했다
나는 남자로서 자극을 받아 “결혼 하라 하셨으면서 제가 이래서 싫다 저래서 싫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곤 전혀 없으시군요.” 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커졌고 말 하자마자 가버렸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울며 쫓아왔다.
보통은 결혼 전에 두 집안 부모들이 상견례를 한다. 아버지가 그녀의 집에 가 혼담을 꺼낼까 보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막말을 할까 걱정돼 관두시라 했다. 우리는 식을 올리지 않았다——올릴 것도 없었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것은 축복받지 못했다. 그때는 축복받지 못하는 것이 별 것 아니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랜 해가 지난 후에야 알았다. 부모형제가 축복하지 않는다면 먼저 그들의 축복부터 받고 결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이 앞으로 결혼생활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결혼 후 아내는 일을 그만 두었다. 베이징 생활에 적응도 안되고 좋은 기회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서서히 모든 관심을 나에게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자동료와 밥이라도 먹으면 끈질기게 알아내고 휴대폰 위치추적까지 걸어놓았다. 내가 동의한 한두 달 동안 그녀는 매일 내가 집 근처의 어떤 길로 다니는지 지켜봤다. 한번은 밥을 먹으면서 병원에 안마사 아가씨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함께 있던 동생이 밥상에서 그 문제는 이야기하지 말자고 농담을 했더니 아내는 “왜 그만해?” 라며 버럭 화를 냈다. 분위기가 험해졌고 모두가 농담이라고 수습에 나섰지만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나있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 내게 관심이 있는지 항상 마음에 담아둔다. 나는 이미 관심도 없어진 일이다. 20세 남자라면 누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신경 쓰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미 그 나이가 지나지 않았는가. 해명을 해도 그녀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2~3일에 한번 꼴로 싸우고는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이야기하다 싸우기를 반복했다.
나의 소득은 가정의 주요 소득원이 되었다. 결혼 전 숭좡(宋庄)에 면적 120m2 의 꾀 넒은 스튜디오가 하나 있었다. 이사와 같이 살자고 했더니 농촌이라 길도 안 좋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집 보다 불편하다 싫다고 했다. 내 꿈을 다 부은 스튜디오였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손해보고 있는 것 같다는 그녀의 생각에 따라 스튜디오를 접었다.
나로서는 아주 크고 어려운 포기였다. 스튜디오가 없어지면서 내 모든 정체성은 당장 입에 풀칠하는 일이 되었고 일이 잘 되지 않아 무너지면서 나는 끊임 없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부정했다.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세계관에 나를 맞추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마다 자기 일이 제일 힘들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담배처럼 사진은 나에게 습관이고 중독이었다.
나는 임금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몇 천 위안이 많건 적건 상관 없다. 그녀가 처음에 좋아한 것은 내 예술적인 기질이었다. 그러나 함께 지내다 보니 이 점이 바로 그녀가 참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본질적으로 그녀는 함께 장을 보고 공원을 산책하고 미국드라마를 보고 타오바오 쇼핑을 하며 세월을 보낼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식을 방해하고 잘못에 집착하게 만들며 욕망을 일으키는 것 같아 상품이 싫다. 원저우(汶川)지진 1주년에 그녀와 함께 갔었는데 베이촨(北川)의 폐허에서 며칠 지내더니 그녀는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니 오늘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평소의 그녀는 이러한 반성 없이 집념에 사로잡혀 산다.
그 후 나는 스튜디오를 샀다. 작업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한숨을 쉬면 그녀는 왜 또 한숨이냐며 짜증을 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와 싸우지도 않았지만 마음은 매우 괴로웠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왜 당신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아무일 없잖아?”
내가 몸담고 있는 미디어 업계의 문제는 이러한 불안감이 전도된다는 것이다. 다 돈을 벌고 happy 할 때는 OK 지만 사장에서 시작된 압력이 각 직급마다 전해지면 업계 전체가 죽을 맛이다. 그러나 아내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잘 풀릴 때는 나도 이렇지 않았다. 일을 막 시작했을 때는 나도 대단했다. 수입도, 사회적인 지위도 괜찮았다. 2005년 나는 주류 도시소식지에서 일하며 한 달 수입이 평균 1만위안 정도 되었다. 그때 택시 기본요금이 1.2위안 이었고 봉황성(凤凰城) 집값이 m2당 9천위안 이었으니 한 달 수입이면 1m2 살 돈이 되었다.
몇 년은 편안했고 일도 잘 풀렸다. 내 직업의 존엄함을 느꼈다. 소득이 상당한 언론인도 많지만 나는 내가 사진기자나 미디어 종사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진작가다. 나의 자아정체성이 미디어에 있기에 나는 언론인들이 집안을 일으켜 부유하게 된 길을 갈 수 없으며 회사에서 난잡한 일을 하기는 더더욱 싫다. 나는 수공업자 밖에 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녀는 일은 일이고 그저 평범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열심히 하거나 아예 하지 않거나 중간이 없다. 단점이라 볼 수도 있겠다. 일을 열심히 하겠다 마음 먹으면 가정생활은 뒷전으로 많이 밀리게 되니까.
우리는 돈 문제로 항상 싸웠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돈이 아주 많을 때 싸울 수 있다면 돈이 없을 때는 왜 싸우는 걸까? 우리가 싸운 대부분의 이유는 슈퍼에서 이 콩나물을 살지 저 콩나물을 살지 까지 그녀가 모든 일을 통제하기 바랐기 때문이다. 한번은 망고가 보여 먹고 싶었는데 그녀가 비싸다고 못 사게 했다.
나는 이 결혼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점점 줄어들어 거의 무지몽매한 개미족으로 변해버렸다. 감정적으로 심하게 착취당하고도 아주 오랫동안 모르다가 한계에 다다라서야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기적인 존재다. 그녀는 ‘우리 집’이라는 느낌을 준 적이 없이 항상 대항상태다. 항상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 등 심리를 짓고 있는 것 같다——이것은 표출되어 드러난다. 언젠가 애 엄마만 아니었으면 벌써 쫓아냈을 거라고 농담을 하면 성질이 좋을 때에도 듣고 한번 웃지만 고치지는 않는다.
사실 많은 감정들이 대등하지 않다. 그래서 결혼생활은 회사이며 계약이다. 감정을 배제한 체 급여를 이야기하고 ‘기업’의 장기적인 발전을 본다면 결혼생활이라는 이 ‘일’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지만 이 ‘일’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기도 바란다. 결혼생활의 절차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연예를 한 다음 결혼하는 감정에서 실제로의 노선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결혼·연예사이트 같은 것이 가장 좋다. 소위 ‘이목’은 모두 방해물이다.
그 시절 우리는 침대라는 아주 사소한 일 하나 때문에 별거했다. 그녀는 내 뒤척임에 잠을 깨면 특히나 성질을 부렸다. 뒤척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있으려니 온 몸이 힘들고 허리가 아팠다. 딱딱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건 싫단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그녀가 조금의 타협도 하지 않아 침대문제로 별거까지 간 것이다. 사실 그때 그녀는 초조하고 참지 못하는 가벼운 우울증 증상이 있었지만 우린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둘 다 외도의 경험이 한 번씩 있다. 결혼생활에 경보가 울렸다면 외도는 거의 정상이다. 나머지는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의 문제이다. 25세의 남자는 도덕적 결벽이 있어 감정적으로 서로 충성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헤어진다. 그러나 35세의 남자는 그렇지 않다. 상대방이 왜 이런 감정을 요구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는 아주 미묘한 일이다. 우리는 아내가 지난번 외도를 인정하지 않아 싸웠고 아내는 “그건 당신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야.” 라는 말을 남기며 상하이로 돌아갔다. 나는 이러한 그녀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우리 사이에 솔직함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소극적인 생활과 계속되는 싸움,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이혼했다. 우리의 첫 번째 이혼이었다. 법적 절차를 밟고 이혼을 하고도 그녀는 이사를 나가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한 지붕의 두 방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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