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더푸(胡德夫): 청사(青絲)가 백설이 될 때까지
- 젊은 관객들은 이미 후더푸를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는 중국어 팝 역사상 중요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 발행인겸편집인: 강철용 kgmsa@naver.com | 2023-04-24 15:21:26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발행인겸편집인: 강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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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더푸(胡德夫), 사진/응답자 제공 |
일월담의 수려한 산수 옆에 선 후더푸는 정밀하고 복잡한 음향기기를 바라보며 마음 속에 잔잔한 파동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이런 대형 무대에 선 그의 머릿속에는 ‘장엄하고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72세로 흰머리가 눈처럼 빛나고 구릿빛 피부가 카메라 앞에서 유난히 독특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우라는 20년 전처럼 호탕하고 순박했다.
2023년 3월 후더푸는 ‘성생불식·보도계, (聲生不息·寶島季)’에서 가수 나잉(那英)과 ‘올리브 트리’를 불렀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그동안 영상을 통해 멀리 서로를 응원했을 뿐이었다. 그때 후더푸는 ‘올리브트리’의 작곡자인 리타이샹(李泰祥)이 이 곡을 어떻게 썼는지 직접 목격했다.
지금은 젊었을 때의 기억이 현실과 겹쳐지며 그의 노래에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청중들의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절친한 친구 장아이지아(張艾嘉)가 그에 대해 평한 대로 후더푸의 목소리는 바람과 같고 파도소리와 같다.
젊은 관객들은 후더푸를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는 중국어 팝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다. 1976년 대만에서 후더푸와 리쐉저(李雙澤), 양셴(楊弦) 등이 민요운동을 시작하면서 이들은 노래를 많이 작곡하고 전파했다. 이후 중화권 음악계는 더욱 발전했고 우수한 음반과 오리지널 싱어송라이터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당시 그들이 팔을 걷어붙인 덕분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이 변해도 후더푸는 여전히 노래를 불렀다. 그는 예전에 무대를 잃은 적이 있었지만 포크의 정신을 되새기며 대중과 사회를 끊임없이 음악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그도 각지의 서로 다른 문화의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언제든 출발해 더 많은 곳을 다니며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말처럼 계속 쓰고 부르고 있다. 마치 “청사가 흰 눈이 될 때까지, 마른 잎이 떨어지는 것을 거부할 때까지” 계속 할 생각이다.
선구자
2006년 7월 어느 날 저녁 베이징의 문예청년들이 우공이산(愚公移山) 술집에 모여 ‘대만 민요의 아버지’인 후더푸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가 ‘최초의 어머니 느낌, 최초의 각성’을 소박한 목소리로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관객들과 똑같이 흥분한 후더푸는 멀리 베이징에서 청년들이 그가 쓴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의 노래에 담긴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에 앞서 2005년 55세의 나이에 내놓은 인생 1집 <총총(匆匆)>은 그가 30년간 작곡한 12곡을 모은 것이다. 그의 또래들이 나와 후더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포크송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알리는 발언을 쏟아냈다. 리중성(李宗盛) 등도 그의 콘서트를 찾아갔다. 2006년 이 앨범에 있던 “태평양의 바람”이라는 노래는 대만 금곡상 최고 작사가상과 최고 노래상이라는 2관왕을 차지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후더푸의 목소리가 시간 속에서 잊힌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간의 문턱에 서서 추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후더푸의 눈앞에는 젊은 시절이 펼쳐질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곡을 쓰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온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의 대학 시절 스승이자 시인인 위광중(餘光中)이 ‘민가수(民歌手)’에 썼 내용처럼 “하나의 여명은 ‘시경’의 향기와도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사실 민요운동의 발생은 후더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그가 이 역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운명의 기관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이야기는 1971년부터 시작된다. 그해 돈을 벌어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타이베이(臺北)의 ‘콜롬비아 카페’에서 보컬리스트로 일하던 21세 청년 후더푸는 평소 영어 노래를 불렀다. 타이베이 단지앙(淡江)중학교에 다닐 때 피아노 연주와 영어 노래를 배웠는데, 이 일도 나름대로 잘한 셈이다. 당시 대만 대중음악은 시대적 제약 때문에 대만 유행음악에서 다루는 소재의 범위는 협소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어 가요계라는 말이 없었고 앨범도 없었다. 인기 있는 노래는 유럽 및 미국 노래이거나 문화적 특성이 결여된 사랑노래가 대부분이었다.
‘콜럼비아 카페’에는 화가 리쐉저, 뮤지션 양셴, 아직 유명하지 않은 장아이지아와 후인멍(胡因夢) 등 당시 가장 유명한 문예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후더푸는 생계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들의 토론에 합류하지는 못했다.
리쐉저는 후더푸가 대만 원주민임을 알고 그의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후더푸가 계속 영어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리쐉저는 그 자리에서 후더푸에게 민족어로 된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후더푸가 불렀던 비남(卑南)족의 노래 ‘아름다운 벼이삭’은 청중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선율과 언어였으며 모두를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젊은 후더푸는 그날 밤 리쐉저가 어울려 ‘장난’을 치러 왔을 뿐 다른 목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들 문예청년들은 음악계의 현실에 불만을 품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후더푸와 그의 몸에 숨겨져 있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음악적 보물들을 발견하게 한다.
이후 이들은 매일 함께 노래를 어떻게 쓸지 연구했고, 리쐉저는 후더푸에게 자신의 노래를 쓰라고 열렬히 격려했다. 무엇을 써야 할까? 후더푸는 도시에서 수년간 생활하면서 그는 자신이 키웠던 소,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을 그리워했으며, 평탄치 않은 산길까지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는 소 방목 생활도 당연히 노래로 쓸 수 있다고 했다. 후더푸는 생애 첫 곡인 ‘소 등에 업힌 아이’를 만들었다.
1973년에 리쐉저는 후더푸와 함께 대만 역사상 첫 포크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1976년에 이르러 민요운동의 도화선이 마침내 점화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라디오와 콘서트를 통해 ‘향수사운’, ‘강호상’, ‘회선곡’, ‘소 등에 업힌 아이’ 등의 노래를 자주 듣게 되었다.
다른 문화의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고 현대시, 향수, 토지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후 수년간 민요운동이 들불처럼 이어졌고, ‘올리브 트리’를 부른 치위(齊豫), 록스타일을 도입한 뤄다여우(羅大佑) 등 수많은 가수들이 민요운동의 뒤를 따라 독창적인 곡 작업에 뛰어들었다.
향수
후더푸는 수년 동안 양배추 볶음의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1960년대 타이둥(臺東)에서 타이페이로 진학해 딘지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타이베이가 아득히 먼 곳이었다. 방학 때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이렇게 큰 학교 식당에는 그와 선배 단둘이 있었다. 식당에서 야채볶음 냄새가 날 때마다 산에서 벼를 수확하고 휴경할 때 농민들이 밭에 양배추와 유채꽃을 심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 그의 엄마는 생강을 곁들여 야채를 볶아 간장에 찍어 먹을 수 있게 올려왔다.
이런 맛의 향연은 사실 후더푸의 출발점이자 훗날 풀리지 않는 향수로 남아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나중에 ‘대만 민요의 아버지’가 됐음에도 그는 스포트라이트와 무대에는 별 집착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를 위해 노래하는지, 왜 무대에 남아 있는지 알아야 느낌을 담아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넓은 태평양 연안에서 살며 갈매기와 물보라를 보며 자라 왔고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데 익숙했다. 가족의 이야기와 희비, 이 땅의 사람들이 사는 상황, 고향의 논밭과 벼 이삭, 갈매기와 독수리 등이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그는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였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던 초심도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그 당시 그는 카페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학교를 중퇴하고 갔었다. 학교에서 그는 럭비를 하다 부딪혀 뇌진탕에 걸려 휴학을 해야만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렸고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버지를 타이페이로 데려가 병을 고치고 혼자서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버지를 보살폈고 자신도 학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원주민 가수 완사랑(萬沙浪)이 후더푸를 자신의 밴드에 채용하였다. 이렇게 그는 비로소 프로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밴드가 해체되고 누군가 그를 콜롬비아 카페에 소개해 주면서 리쐉저, 양셴과의 만남이 성사됐다.
민요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수 리쐉저가 조난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후더푸와 친구들은 슬픔에 잠긴 채 친구의 작품을 정리, 작곡해 공개적으로 노래를 이어갔다. 이후 일부 포크송에서 탄생한 가수들이 직업적인 뮤지션, 가수가 되기 시작했다. 후더푸는 대만 원주민의 사회 권익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면서 대만의 거의 300개 부락을 돌아다니며 대만 원주민들의 민요를 수집했다. 이렇게 시작된 작업이 2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음악은 정의를 수호하는 그의 무기가 되었다. 1984년 대만 하이산(海山)탄광 폭발로 원주민 광부들이 숨지는 현장을 목격한 후더푸는 뼈아픈 고통을 감내하며 ‘무엇 때문에’라는 곡을 썼다. 그는 노래에서 “왜 자신이 밟은 길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왜 고향에 두고 갈 문을 못 찾는가” 하는 내용을 담았다.
오랜 기간 무대를 떠나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후더푸는 2002년을 전후해 음악계의 오랜 친구들이 찾아와 앨범 발매를 권유하게 되면서 다소나마 기념으로 음악을 남길 수 있었다. 후더푸는 친구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산업화된 녹음 방식을 택하지 않고 모교인 단지앙중학교로 돌아와 예전에 연주했던 그 낡은 피아노를 찾아낸다. 이미 두 줄이 끊겼지만 연주를 시작했을 때 그는 이 느낌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총총>의 12곡은 캠퍼스에서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녹음됐다.
오랜 방랑생활 끝에 마침내 후더푸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동안 그는 쉴 새 없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공연도 하고 행사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그는 휴식 시간이 많아졌고 베란다의 처마 밑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자녀와 손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여섯 명의 손자와 한 명의 손녀가 있고 집안이 늘 떠들썩하다.
그는 가족에서의 항렬이 매우 높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증조부라고 불러야 한다고 농담으로 말했다. 부인의 집안에서 그는 항렬이 비교적 낮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끔 아내 쪽 집에 들러 아랫사람의 느낌을 경험한다고 했다. 가족으로부터 보살핌과 자양분을 얻었던 그가 다시 이런 천륜지락으로 돌아온 것이다.
세상에 전해지다
이야기를 나눌 때, 후더푸는 종종 그의 장난스러운 면을 드러냈다. 그는 의리를 중시하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친구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륙에서 본 큰 강과 호수, 각지의 풍경에 대해 들려주었고 가족과 친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도 끊임없이 말해주었다. 그는 대만 원주민의 언어와 표준어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을 모방해 제대로 된 산둥(臺灣)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 능력이 뛰어나다.
말과 사상의 씨앗은 그가 청년일 때 심어졌고 서민 가수 시절 그가 가장 먼저 부른 것은 중국어 신시였다. 민요운동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가사 작품은 아직 부족했고, 전문적인 작사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민요운동의 추진자이자 사회자인 타오샤오칭(陶曉清)은 모두에게 장쉰(蔣勳), 위광중(餘光中), 저우멍데(周夢蝶) 등의 작품을 구해 곡을 붙여 부를 것을 권했다.
후더푸는 이 시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대만대학 외국어학과에서 공부할 때, 위광중은 바로 그에게 민요와 시를 강의해 주었던 스승이었다. 저우멍데도 타이베이 문화인에게 익숙한 시인이었다. 그의 책을 파는 노점은 타이베이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었고, 그 곳은 후더푸도 자주 지나가던 곳이었다. 그 야윈 얼굴이 그의 기억 속에 자주 나타났다.
그때부터 신시는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주몽데의 시 ‘보리수 아래’와 ‘월하’를 곡을 붙여 노래하여 타오샤오칭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했다. 나중에 포크 콘서트에서 후더푸가 위광중의 ‘향수 사운’을 부르자 관객들이 큰 호응을 보냈고 그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더욱 깊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위광중의 시가에 있는 그러한 웅대한 향수가 자신의 연가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후더푸는 개인적인 감정의 세계를 벗어나 더 큰 향수를 의식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런 감정과 계몽이 ‘태평양의 바람’, ‘대무산의 아름다운 엄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후더푸는 나중에 대륙의 친구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1989년 윈난(雲南)에서 열린 음악 학술 심포지엄에 초청받아 중국 본토에서 친척을 찾는 친구들과 동행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강렬한 감정적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기둥 뒤에 몰래 숨어서 통곡해야 했다. 나중에 그는 몇 차례 대륙에 가서 공연을 했고 친구도 더 많아졌다. 그는 추이졘(崔健), 헝가이(杭蓋) 밴드 등의 친구를 알게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줄곧 이 옛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베이징 샤브샤브의 맛도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2021년 71세의 나이로 오리지널 앨범 <라스트 헌터>를 냈다. 이번 앨범에서 그가 부른 가사에는 대만 원주민 언어, 표준어, 그리고 고시사가 들어 있다. 노래 속에는 몇 가지 문화가 한데 섞여 있었고 그의 상쾌한 목소리와 깨끗한 피아노 반주가 어우러져 복잡하기는커녕 소박하고 시적인 느낌을 주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당시 <회향우서(回鄉偶書)>의 시를 자신의 노래에 넣었다. 그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리쐉저, 위광중, 저우멍데, 리타이시앙 등 작고한 사우들의 얼굴일 수도 있고, 혼자 고향에서 타이페이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느꼈던 산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그는 본래 그들을 대신하여 향수를 부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러한 향수도 자신의 향수로 전화되었다. 이런 향수는 소리나는 보물섬의 무대에서도, 현실의 산과 바다에서도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합창을 통해 계속 울려 퍼진다.
기자/처우광위(仇廣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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