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크게 변했다. 반성을 한 듯 다정해 졌고집안일도 하고 나에게 잘해주며 나가서 일자리도 찾는 모습을 보자니 괴로웠다. 그는 경력이 별로 없다 보니 그렇게 좋은 일은 찾지 못했다. 우리 집이 리위안(梨园)이었는데 북4환(北四环)을 타고 다니며 출근했다.
너무 멀다고 가지 말라고 했더니 집에 돈이 없다고 했다. 이번에는 나에게 얼마를 벌어오라 바라지 않았다. 우리 관계는 이혼한 몇 달 사이 오히려 훨씬 완화되었다. 한번은 출장에 그녀를 데려갔고 그 후 지금의 아이가 생겼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우리는 재결합했다. 그녀도 태도를 낮춰 이제껏 나에게 히스테리 부렸던 것을 사과했다. 그게 2013년이었다. 재결합하던 해 여름 그녀는 돈 관리를 자기가 하지 않으면 또 이혼할 거라고 했다. 당시 나는 나 자신을 거의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그러라고 했다. 돈이라 봐야 얼마 있지도 않았다.
이날 이후 우리는 또 싸우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였다. 모아둔 돈이 없어 그녀는 조급해했고 그녀의 어머니 역시 왜 돈이 없느냐며 나무랐다. 돈은 다른데 다 써버렸다. 아이를 낳는데 얼마 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실제로 마지막까지 쓴 게 4천위안이 전부다. 두 모녀의 비난에 나는 너무 괴로웠다. 나 혼자 지내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이 나 때문만은 아닌데 왜 나만 비난하는가? 나는 아이를 낳아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며 생각보다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며 그녀에게 보장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자 그녀는 돈 쓰는데 더욱 신중해졌다. 탕후루(糖葫芦, 설탕 물, 엿 등을 발라 굳힌 과일꼬치)도 못 먹게 했다.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결혼생활에서 내가 얻은 게 무엇인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아마 배우자제도는 모든 포유류 동물의 천성인가보다.
우리는 싸웠다. 돈을 쓰면서 나는 이 결혼생활을 평생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 예감했다. 마음가짐도 바뀌었다. 한계를 기다리듯이 스스로 단념될 날을 기다렸다. 너무 괴롭다. 우리도 감정이 있었고 많은 어려움을 함께하며 빛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간 안 좋아진 관계를 만회할 생각도 해보았다. 싸운 후 나는 타이완(台湾)이나 일본에 다녀오자고 했다. 아내는 돈도 절약되고 맛있는 것도 많다며 태국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돈을 아끼려면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다고 대꾸했다. 나는 타이완의 인문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거의 다 왔나 했더니 또 싸웠다. 이후 재미도 없어져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다 계획해 두면 그냥 기분 좋게 즐기면 될 것을 그녀는 왜 굳이 신경 써가며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해 모든 제안들을 이런 식으로 만들고 사소한 일들로 괴롭게 하는지. 공원산책, 쇼핑, 친구 만날 때마다 운전기사 노릇까지 그녀는 나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강요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함께하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녀 어머니께서 산간을 도와주러 왔다 한 달이 못되어 장인(江阴)으로 돌아가셨다. 그녀가 외동딸이기에 아버지를 돌볼 사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후 나의 어머니께서 한동안 와 계셨다. 나의 부모님은 농촌 분들 이시다 보니 위생습관이 좋지 않고 손을 자주 씻지 않는다.
생활습관도 그녀와 다른 부분이 많아 그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그녀는 내가 어머니를 집으로 돌아가 따로 생활하면서 매일 왔다 갔다 하도록 하길 바랐다. 67세의 어머니께 한겨울에 베이징 교외에서 30km 거리를 1시간 반 동안 버스로 오시라는 말씀을 어떻게 드릴 수 있는가?
한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외출을 했다. 어머니가 나가기 전에 셀러리와 편육을 썰어놓고 밥을 얹혀놓고 나갔는데 돌아와 보니 그녀는 밥을 해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어 왜 해먹지 않았느냐 묻자 아내는 시간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래도 이해가 안되 왜 해 먹지 않았느냐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거의 곧바로 어머니에게 “귀찮지도 않으세요!” 라고 했다. 나는 버럭 화를 냈다.
그 무렵 그녀의 독일 친구 한 명이 중국에 왔다. 그녀는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놀고 싶어했고 나는 독일맥주까지 마련했다. 그녀는 내 부모님이 농촌어르신들이라 눈에 거슬려 했다. 내가 “사람들이 신경이나 쓸까?” 라고 했더니 그녀는 “여기는 내 집이기도 해. 나도 이 집 주인이라고.” 라고 했다. 어른들께 “수요일 저녁에 내려갔다 목요일에 다시 오세요.” 라고 어떻게 말씀 드린단 말인가? 말이 되는 말인가? 나는 “이렇게 해. 당신이 된다고 해도 하고 안 된다 해도 해.” 결국 싸움으로 이어졌다.
아이는 그녀와 함께 자고 나는 다른 방에서 잤다. 아이는 저녁마다 모유를 먹었고 밤 중에 몇 번을 깼다. 그녀는 매일 잠이 부족해 성질이 갈수록 나빠졌다. 한번은 그녀가 밤중에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아이가 울며 엄마를 찾았다. 내가 건너가 아이를 안아주자 그녀는 바로 “당신이 안았으니까 당신이 대리고 자!” 라고 말했다.
그녀의 논리는 이랬다. 내가 아이를 돌보지 않고 그녀가 아이를 돌보는 것을 내가 당연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 말을 듣더니 “애를 왜 얘가 대리고자니? 낮에 출근도 해야 하는데 밤에 잠을 못 자면 운전을 어떻게 하라고?” 라며 쏘아 붙였고 두 여자가 싸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면서 “둘 다 나를 벼르고 있지.” 라며 이혼하자, 죽고 싶다고 했다.
두 고부가 함께 지낼 수 없어 나는 우선 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자기가 아이를 대리고 자겠다고 절충했다. 내가 이 참에 젖을 끊을 겸 저녁에는 젖을 먹이지 말라고 권했더니 그건 또 아쉬운 모양이다. 아이는 젖만 먹으면 너무 좋아했다. 낮에야 참지 못해 젖을 물리지만 아이가 저녁까지 젖을 찾으니 짜증이 났는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욕을 했다.
낮에 일을 나가면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또 우네, 변을 못 보네, 잠을 못 자 피곤하네 하소연을 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구하라 하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긴 싫다고 한다. 이도 저도 싫고 내가 아이를 대리고 자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녁에 아이를 돌보면 낮에 출근할 힘이 없다.
나는 낮에는 주다가 밤에는 주지 않으니 아이도 괴롭다며 젖을 먹이던지 아예 끊으라, 밤새 그렇게 사납게 대하는데 아이가 어떻게 자겠느냐고 말했다. 한번은 싸우고는 화가 나 밤 1시 반에 집을 나갔는데, 돌아와 보니 아이가 침대에서 울고 있고 그녀도 아이를 등지고 울고 있었다. 수도 없이 본 광경이기에 너무 화가 났다. 그녀는 화가 나면 아이를 내 방에 던지면서 “당신이 봐!” 라고 말하고 가곤 했다. 아이는 1시간이 넘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젖도 없고 어쩔 줄을 몰라 아이를 안고 괜한 화만 냈다.
결국 어머니를 다시 모시기로 했다. 같은 동네에 2천위안짜리 월세를 얻어 어머니를 모실 생각이었다. 그녀는 2천위안을 쓸 생각을 하니 그냥 우리 집에 모시자고 했다. 함께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를 뵙고 말씀 드리자 어머니는 “쫓아낼 땐 언제고 이제와 다시 오라니 이게 무슨 경우니?” 라며 우셨다. 그래도 아들을 위해 함께 와주셨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밥도 할 줄 모르는 데다 혼자 너무 적적하셨는지 올라오기를 원하셨다.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아버님은 안돼! 아버님 오시면 내가 나갈 거야!” 라며 화를 냈다. 실제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함께 산다는 것이 빠듯한 일이라 이해는 하지만,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이야기했더라면 나도 좋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녀의 짜증에 “그럼 나가! 1주일 전에 부모님 모셔오기로 동의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왜 또 딴소리야?” 라며 같이 화를 냈다. 그녀는 히스테리적으로 후회된다고 말했다.
그날 그녀의 여동생이 그녀를 데려갔다. 우리는 며칠 동안 서로를 무시하며 지냈다. 부모님과 최저선을 건드렸기에 서로의 상처가 매우 깊었다. 나는 그녀의 사과를 믿지 않게 되었다——그녀는 싸울 때마다 반성하며 젖을 끊고 아이에게 화풀이 하지 않으며 아이가 좀 크면 일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지만, 화해를 하고 아이와의 씨름이 다시 시작되면 예전으로 바로 돌아가 다그치고 화내고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우리 결혼생활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최근의 일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산후우울증 같다고 했다. 그녀가 ‘병’때문에 그랬다 생각하니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그녀와 우울증 치료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했지만 그녀는 매우 꺼려했다. 기독교인인 그녀는 우울증에 걸린 후 더욱 경건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이 깨지는 걸 원하지 않으셔.” 라고 말했고, 내가 우울증치료를 말할 때마다 ‘주님’ 이야기를 하며 말을 돌려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히스테리 기간에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망쳐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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