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류단청] 지하철1호선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이러한 도시에 적응하고 녹아들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인생이다 .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베이징까지 와서 새 출발하여 베이징과 하나가 되어 각자의 꿈을 쫓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들은 지하철1호선에서의 어느 출구를 기점으로 ‘베이징’이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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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Pa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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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팔각놀이동산
뤼치칭한테 꿈이라는 것은 늘 실제적인 것이다. 이는 신분, 부동산과 모든 물가지표와 관련되어 있다. 부모 눈으로 볼 때 아들은 출세한 것임에 틀림없다. 2006년 중국청년정치학원에 졸업하고 국유기업에 들어갔고, 1년 반에 베이징 호적을 가졌으며 중국중앙홍보부에서 일하고 있다. 고향에서 이것을 말하면 이웃들은 깜짝 놀란다. 모든 시골 부모와 같이 그의 부모도 아들이 커서 대학에 들어가면 이제 남은 것은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호적을 바라고, 집을 바라며, 며느리도 바라며, 손자도 바란다.
아들이 효자가 되면 괴물을 때려 등급을 올리는 게임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수도라는 곳으로 올라간다. 수도라는 곳에서 부모 세대의 생활을 모두 되돌아본다. 뤼치칭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드디어 부모가 기대한 것을 하나하나 이루었다.
뤼지칭은 30세가 약간 넘었다. 집안의 경제적 도움 없이 혼자 월급을 벌어 집을 샀고, 부모님을 시골에서 모시고 올라왔다. 그는 아들이다. 그가 베이징에 와서 분투하는 목적은 뚜렷하다. 바로 남아있는 것, 여기서 남아서 뿌리를 박고 시골과 일도양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체제 내에서 8년을 버텨왔고 20세의 세월을 그냥 그렇게 보냈다.
집을 사고 나서 부모님을 모셔 오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베이징에서 안착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이 있는 사람은 항상심이 있습니다.” 그는 웃으며 <중국신문주간>에게 말했다. 그의 가치관에서 보면 그는 두 가지로 사람의 위치를 정한다. 하나는 집이고 또 하나는 호적이다. 이 도시에 와서 그가 원하는 건 신분 단 한 가지뿐이다.
얼굴만 보면 그는 늙지 않았고 사각형 얼굴에 짧은 머리, 금테 안경을 하고 있었다. 애티가 좀 나지만 언행을 보면 무엇이 그를 얽매는 것처럼 무거운 느낌이 든다. 그는 너무 정통적으로 보인다. 말할 때 판에 박힌 듯이 말하며 얘기가 끝나면 늘 “그럼 제가 총괄적으로 말해보면…”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8년 동안 일하고 나니 일부 습관과 흔적이 남게 되었다. 예전에 그는 체제 내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관료적인 말투를 쓰니까 답답하다. 또한 매일 차를 마시고 월급을 받으며 시간 되면 아이를 데리러 간다. 그는 그들과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그가 그들 중에 한 명이 되었고 시간이 그를 자신이 싫어하는 곳으로 밀어넣었다.
지금 뤼지칭은 오히려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배타적이진 않았다. 그는 집과 여러 가지 보장에 대해 말했으며 중앙홍보부의 신분증을 꺼내 예전에 지신이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저 살 쪘어요.” 라고 말했다.
베이징으로 이사한 그 날 부모는 매우 기뻐했으며 어디든지 다 가보고 싶어 했다. “여기가 바로 베이징이야. 예전에 ‘농업학 다자이(大寨)’, 뭐든 다 북쪽을 봐라” 북쪽은 바로 베이징이자 모택동이 있었던 곳이다. 오늘 이곳에 그들이 있게 되었다. 부모님의 기분이 뤼지칭에게도 전해지면서 그도 마음속으로 우월감이 생기게 되었다. 가족은 앞으로 베이징 사람이다. 이는 가족 운명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지난 8년간 그는 꽃다운 청춘으로서의 생활을 하루도 보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한 가지에 집중하여 살아온 것이다. 뿌리를 박는 것. 베이징은 그에게 있어서 힘에 부칠 만큼 구체적이고 무거운 것이었다.
옛날, 뤼지칭도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그 때 그는 갓 졸업했으며 베이징도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그는 팔각놀이동산 지역에서 방 하나를 임대하였다. 이곳은 그가 베이징에 들어온 후의 첫 출구였다.
지금까지 그는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팔각놀이동산 지역은 80년대에 태어난 우리를 안정시켰다.”
이 지역은 베이징 최초의 놀이동산이 있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이곳은 석경산구(石景山区)에 있으며 서쪽으로 4환과 5환으로 연결되어 있고 동쪽에서는 수도철강노산 주민 구역에 가깝다. 이 주민 구역은 상주인구가 63.9만이 남짓이며 예로부터 징시(京西) 역사문화 요지이다. 산도 많고 녹화지대도 잘 되어 있다. 1인당 공공 녹지면적이 73.89m2 된다. 녹지면적으로 베이징 시내지역에서 첫 번째 순위이다.
국제무역, 천안문, 목서지와 군사박물관, 상업화, 정치적, 문화적, 군사가 모두 이곳의 동쪽에 있다. 여기에 와서 조용히 있으면 바로 집에 온 느낌이다.
비즈니스 구역과 거주 구역의 혼합된 곳, 문화시설도 가깝다. 1호선 서쪽에 있어서 위위엔탄(玉渊潭), 과학회당(科技会堂), 군사박물관(军事博物馆)으로 가는 데 몇 정거장밖에 되지 않는다. 새로 내놓은 부동산 매물은 다른 지역처럼 이유가 되지 않았다. 오래 된 집을 철거하면 가격이 너무 높고 정부가 기획하는 주택 중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8년 전 이곳에서 환경과 시설이 좋은 방을 임대하는 가격은 한 달에 600~800위안이면 충분했다. 주거 구역은 낡았지만 건물이 예쁘고 스타일도 있었다. 방도 깨끗하고 조용하며 빌딩과 빌딩 사이의 거리도 넓다. 생활도 빠르게 흘러가지 않고 여유로우며 주변 사람들은 노인 아니면 베이징 현지 사람이다. 게다가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꿈에 빠져 있는 아리송한 젊은 사람도 있다. 뤼지칭은 자신의 방을 기억한다. 크지 않지만 천장으로 뻗어있는 책장이 있다. 밥 먹고 나서 농구도 하고 도서관도 간다. 비가 오고 땅에 느티나무 꽃이 있고 공기도 습해진다. “마음도 거기에 녹였다.”
그때는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삶의 스트레스가 없었다. 그는 룸메이트와 함께 애완견도 키웠다. 밤새 술을 마시며 그렇게 끝없이 이야기도 나누고 했다. 룸메이트는 시골에서 와서 판매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늘 주문서를 따내려고 하면 사인 직전 동료에게 뺏겨서 분에 못 이겨 집에 돌아와 술을 마시곤 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그는 일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룸메이트에게서 베이징의 잔혹한 면을 볼 수가 있었다. 이 도시에 남아있는 것은 그리 쉽운 일이 아니다. 뤼지칭도 여의치 않았지만 거기서 잘 버티고 있고 자신과 싸우고 있다. 신문학을 전공한 그는 처음에 대중매체에 들어가고 싶었다. 예전에 <징화시보 京华时报>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베이광 전자그룹에 갓 들어갔을 때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기는 오래된 군 공장이고 레이더 통신을 제조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이미 없어졌지만 신중국이 성립할 때 모주석(毛主席)이 말할 때 사용하였던 확성기가 바로 이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호적을 위해서 그는 매일 자료를 정리하고 당 조직원을 발전시키고, 식사 주문, 물 배달, 소방 검사, 불 끄는 것 등을 했다. 매일 파란 작업복을 입고 한 통 한 통 물을 나른다.
칭다오(青岛) 친구가 베이징 와서 일도 볼 겸 그와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가 공장의 길에서 뛰어나올 때 친구는 위아래로 그를 살펴보며 “넌 왜 이렇게 됐어?” 라고 말했다.
“저는 속상했어요.” 물을 반 년 동안 길다가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보게 되었다. 온 몸의 작업복이 두껍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여름이라서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었고 사람 몰골도 엉망이었다. 그 해에 그는 중청원신문과의 일등 학생이었고 남방신문업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친구가 가고 나서 그는 혼자 공장 테라스로 올라갔다. 베이징이 이렇게 큰데 한 장의 호적이 그를 이 곳에서 꼼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작은 도시에서 살았다. 그는 넓은 안목을 갖출 수 없었는데 이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버티고 맞설 뿐이며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상승 경로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기어서 올라갔다.
이 시스템에 들어오면 길은 점점 좁아진다. 그는 많은 시간과 정신, 체력을 쏟아서 대인관계와 미래에 대한 보장에 신경 써야 했다. 자신이 호적과 자신에 대한 보장을 가지고 체제 내에서 승진하는 것을 보증 받아야 한다. 얼마 되지 않아 기회가 왔다.
중앙홍보부에 소속한 기구에 갔는데 아는 사람이 기획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간행물 이름이 <정공연구동태 政工研究动态 >였다. 당의 사상 동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살짝 펼쳐보았는데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중앙기관’이어서 호적은 무조건 받을 수 있고 수입도 높았다.
그 후 몇 년간 그는 이 직장에서 자신의 청춘을 보냈다. 30세 그 해, 그는 계약금 30만 원을 내고 사혜감로원(四惠甘露园)의 80m2 넘는 집을 샀다. 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거주 지역에 들어가면 소상인들이 많아 도시 관리자들이 툭하면 와서 정리하고 관리해 나선다. 그래도 이곳은 집이다.
집을 사기 전 그는 부모를 모시고 1호선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까지 쭉 돌아다녔다. 부모님은 보기만 해도 기뻐했다. 앞으로의 생활은 안정적이고 걱정이 없다. 그것을 단 번에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이다.
집을 산 그 날,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토하고 싶어도 토할 수가 없었고 막혀있었다. 일반인의 인생은 의식 같은 게 없지만 그는 의식에 대한 느낌이 필요했다.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과감한 판단이 필요했지만 그것은 없었다. 그는 혼자 열쇠를 쥐고 있었다. 이 날부터 베이징에는 그만의 등불이 켜졌다.
그러나 꿈이라는 것을 말하자면 이상하다. 이루어지기 전에 꿈은 현실보다 높고 이루고 나서 꿈은 다른 현실일 뿐이다. 꿈속에서 살게 되니 그는 전에 생각했던 우월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희미한 느낌이다. 8년의 시간이 귓가에서 흘러갔다. 마침 이 열쇠를 위한 것처럼…. 그런데 또 어쩌겠는가?
그는 자신의 집이 생겼다. 그는 서쪽 팔각놀이동산에서 동쪽에 왔다. 출근은 여전히 같은 곳이고 동쪽은 시끌벅적하다. 아침에 사혜역에서 전철을 탄다. 집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은 이미 다리 아래까지 줄을 섰고 7, 8시 햇볕 아래서 있으면서 반시간 동안 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에 짜증이 났다. 어느 날 지하철을 올라타다가 신발 한 짝이 떨어져 되돌아 주우려고 하다 밟힐 뻔했다. 난처하고 아슬아슬한 기억이다. 아무런 존엄심도 없었다.
그는 생활이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른다. 많은 것을 생각하여 자신을 위로해야 했다. “베이징에서 살면 마치 하늘이 돈도 없고 외모도 별로고 집안 배경도 없고 미래도 어두운 사람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처럼 계속해서 이러한 느낌을 찾고 알맞은 것을 찾아서 자기를 끼워 넣으면 마음이 태연해질 것입니다.” 그의 말하는 표정과 태도는 설명하는 것 같지 않았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과 같았다.
줄을 설 때 그는 Wechat으로 친구들이 올린 글을 읽어 본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욕하고 있다.
처음 이런 광경을 봤을 때 뤼지칭도 따라 웃었지만 웃다가 웃다가 그는 자신과 같은 세대 사람들이 모두 슬픔에 묻혀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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