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류단청] 지하철1호선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이러한 도시에 적응하고 녹아들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인생이다 .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베이징까지 와서 새 출발하여 베이징과 하나가 되어 각자의 꿈을 쫓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들은 지하철1호선에서의 어느 출구를 기점으로 ‘베이징’이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난리쓰로(南礼士路)
Susie는 자신을 ‘공마’라 부른다. 40세가 된 그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 크게 말하고 크게 웃는다. 아무 걱정이 없이 마음을 활짝 연 사람 같았다.
그는 지금 과학기술원에 있는 외국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착실하게 살고 있다. 물질적으로 있어야 될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며, 딸도 외국 유학하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서안에서 베이징까지 와서 27년간 Susie는 베이징 호적을 얻었으며 베이징 사람 남편을 만났다. 유창한 영어로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 그는 이 도시의 상류층에 있다.
인생에서 이 단계까지 이르자 그는 느슨해졌다. 단 한 가지 그가 못하는 게 있다면 잡곡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몸에 남게 된 유일한 고생의 흔적이다.
“내가 평생 먹을 잡곡을 서안(西安)에서 다 먹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누가 나를 화나게 만들고 싶다면 나의 밥에 옥수수 가루를 조금 넣으면 됩니다. 나는 당장 밥상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 들어서야 그는 점차 좁쌀죽을 조금씩 먹게 되었다. 그전에는 조금도 먹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베이징 본토에서 자란 그의 남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잡곡이 얼마나 영향가가 있고 맛있는데 왜 먹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을 말하면 그는 화를 낸다. 60년대 베이징 사람들의 양식 구성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달랐다. 같은 15kg의 배급 식량 중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0.3kg이 밀가루와 쌀이고 나머지는 잡곡이었지만 베이징 사람들은 쌀과 밀가루의 비중이 잡곡보다 더 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씹기 시작하여 기억이 있을 때까지 먹는 것이 잡곡이다. 설날이 되어야 그 부드럽고 목에 걸리지 않는 밀가루를 먹을 수 있다는 그 느낌은 모를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지금 나보고 좁쌀만두를 먹으라고 하면 토할 수 있어요. 이건 가슴 속에서 치고 나오는 증오와 거부감입니다. 좁쌀만두 냄새의 문제가 아니라 all the surffering, all the miserables”(모든 고난, 모든 비참함)
유창한 영어로 마지막 한마디를 한 그는 지금 같이 이렇게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불편하다고 말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렵게 살아온 어린 시절이다. 그가 좁쌀만두를 먹지 않으면 엄마가 속상해 한다. 어쩔 수 없이 오빠 언니들은 그를 혼낸다. 이것을 먹지 않으면 먹을 게 없다. 성질부리는 그는 좁쌀만두를 땅에 버리곤 했다. 그 시대에 이런 일은 죽을죄에 가까운 일이다.
공포와 가난, 양식에 관한 기억들이 그와 그의 남편을 두 세계로 갈라놓았다. 요즘 들어서야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잡곡을 먹는 것을 허락하였다. “다들 드세요, 저는 밀가루나 쌀 같은 식량을 먹겠습니다. 사람은 한 평생 살면서 먹을 수 있는 잡곡의 양은 정해져 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quota(배당액)를 드세요. 공마는 이미 완성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호적과 생활 상태를 보면 그는 이미 베이징 사람이다. 심지어 이 도시에서 편안하고 잘 사는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그는 늘 이 도시와 거리감을 느낀다. 이 거리가 바로 잡곡에 있다.
산에 올라가는 것과 시골에 가는 것이 없다면, Susie는 베이징에서 태어날 것이고 베이징에서 자랄 것이다. 쌀과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서 외국어학원도 다니고 유창한 언어로 베이징외국어대학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1957년 그의 부모는 첫 번째 세대 지식인 청년으로서 베이징에서 서안까지 강제 낙향하여 온 집안 식구가 대안탑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로맨틱한 사람이다. 항상 베이징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갈 수 없으니 이 희망을 딸에게 맡겼다.
베이징은 어떤 곳인가요? 외할머니의 집이다. 언니는 Susie보다 5살 많다. 어렸을 때 언니는 6년간 베이징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여동생을 비웃곤 했다. 그 때 부모는 바빠서 아이들을 다 돌볼 수 없었기에 언니를 외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그 때 Susie에게 있어서 베이징은 오직 들어만 봤던 곳이다. 거기는 천안문이 있는 곳이다. 부모는 베이징에서 교육을 마쳤고 전국이 가장 힘들 때도 거기에는 밀가루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베이징은 무한하고 고상하다”. Susie는 그 때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전국 사람들이 모두 그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베이징에서 떠오르는 태양도 황금태양입니다. 베이징에서 정착되면 바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Susie가 말한다. 만약에 그가 일생에 가장 중요한 숫자가 뭐냐고 하면 바로 수능 점수이다. 538점. 지금까지 그는 기억하고 있다. 이 숫자는 서안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자란 여자 아이가 인생을 바꿀 수 있고 황금태양이 떠오르는 곳에 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집에서 막내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는 것을 싫어하고 성적이 좋아서 2등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는 산시성(陕西省) 10등 성적으로 베이징외국어대학에 입학하며 오만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학교 정문에 들어가자마자 여학생들이 누구보다도 현대적이고 구어는 누구보다도 잘했다. 양란(杨澜)은 그보다 한 학년 높고 쉬거휘이(许戈辉)는 그보다 한 학년 낮다. 학우들 중에 학교 다니기 전부터 유명해진 사람도 있다. ‘나는 TV에 나오는 사람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보면 옷차림도 촌스럽고 말하는 것도 엉망이다. 그들 앞에 설 때 그는 늘 고개를 숙인다. ‘자괴감이 든다.’
또 다른 충격은 이모 집의 사촌동생이 ‘소년궁’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서안에 있을 때 ‘소년궁’이란 말은 듣지도 못했다. 시각과 지식과 옷차림, 모두 비교가 안 된다. ‘미운 오리새끼처럼.’
첫 외국어 수업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외국 원판 교재의 녹음에서 흘러나온 내용을 표시하라고 하였는데 그는 본문도 찾지 못했다.
“맙소사, 나는 못 알아듣겠다. 생각해 봐, 그건 무슨 느낌인지, 듣기는 이미 끝났는데 나는 아직도 목차에서 표시하느라 허둥대고 있다! ”
같은 반의 베이징 아이들은 쭉 외국어학원에서 배워왔고 교육 환경도 좋았다. 배우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매일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은 듣기교실에 가서 줄서고 테이프를 빌리고 이어폰을 꼽고 하루하루 듣기 연습만 해야 했다. 외국어 학습실은 방음되어야 하기 때문에 유리도 두 겹이어서 덥고 답답하고 게다가 알아듣지 못하니 듣고 있으면 잠들게 된다. 4년이 지난 그는 미국식 영어를 자유자재로 말하지만 두 귀는 자주 듣다보니 청력이 약해졌다.
가끔 그는 외할머니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다. 여기는 원래 그의 출생지였는데 지금은 그가 꼼꼼하게 따지고 세밀하게 계산하여 차비를 남겨야 매주 하루 갈 수 있는 것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 시대에 1호선은 사치스런 교통수단이다. 한 달에 30위안의 생활비에서 지하철 비용만이 5마오이다. 난리쓰로에서 푸싱먼까지 단지 한 정거장이지만 그는 이것을 타야 했다. 다른 도시에는 지하철이 없기 때문이다.
이 한 정거장의 지하철은 그가 베이징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1987년, 1호선과 2호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푸싱먼에서 장춘가(长椿街)까지, 건국문에서 베이징역까지의 연결선이 지어졌다. 푸싱먼역은 T자형의 환승역이 되었다. 난리쓰로는 목서지(木樨地)와 푸싱먼 사이에 있으며 동쪽은 계속 동쪽을 향해 확장한 신베이징이다. 서쪽은 부위원회빌딩, 수도박물관과 중국과학원인 로우베이징이 있다. 지하철역을 지날 때마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향하는 것과 같았다.
이곳은 집인데 집 같지 않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는 낯선 곳 같았다. 이런 느낌은 아주 묘하다.
시간은 그를 점점 이 도시에 녹아들도록 했다. 그 노드는 뚜렷하지 않지만 어느 날부터 그는 1호선을 타지 않았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버스도 타고 걷기도 하면서 차비도 1위안 3마오에서 3마오면 충분히 해결되었다.
표준말을 쓰는 그는 산시 말투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시에서 표준말 쓰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지방으로 내려와 산시에 온 지식인이며 교양 있고 문화를 지녔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산시말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전혀 쓰지 않는다. 베이징에 오고 나서 산시말을 더 안 하게 되었다.
Susie는 자기가 이제서야 가끔 산시말을 조금 쓴다고 말했다. 표준적이지는 않지만 지금은 용기내서 말한다고 한다.
언어의 미묘한 변화는 마침 어느 정도에서 그와 이 도시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올려다보는 것부터 노력해서 적응하는 것까지, 드디어 이 도시에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잡곡에 대한 거부감을 말하자면 그는 이제 거북함, 회피의 감정이 없다. 이 단계에 올라서면 고통과 열등감도 모두 지난 이야기 거리가 된다.
그는 이미 베이징에 정착하였지만 심리적으로 그는 아직 외지인이다. “저는 자신이 베이징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베이징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말할 때 약간의 감정이 들어있었다.
그는 베이징 사람들이 드러내는 우월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 남편을 보더라도 두 사람은 두 개의 세계에서 생활하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는 많은 일들이 당연한 것으로 비춰진다. “베이징은 당연히 전국의 세금 수입이 많은 만큼 누려야 하며 또한 당연히 좋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안에서 잡곡을 먹을 때 시어머님이 매 주마다 남편에게 생선요리를 해준다. 지금까지 Susie는 생선을 먹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다. 어렸을 때 못 먹었기 때문에 그는 생선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베이징 호적을 가졌고 집도 있으며 또한 이 도시에서 가정과 딸이 생겼지만 그는 여전히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로우베이징 사람들은 입만 열면 ‘외지인’이라 하면서 자신들의 도시에 대한 상실감을 모두 외지인에게 던져 주었다. 베이징에서 생활한 지 20년이 되자 그는 오히려 자신의 뿌리는 서안에 있다고 느낀다. 몇 년 전에 그는 고향에 한 번 갔었다. 어렸을 때 대안탑은 높고 컸으며 그의 모든 사진의 배경이었다. 하늘의 절반을 차지하여 피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안탑의 윗부분은 알아볼 수 있지만 아랫부분은 전혀 못 알아본다.
“저는 너무 슬퍼요.” 그는 말한다. “모든 길거리와 나무가 내가 예전에 아는 것이 아니었어요. 아주 생소한 도시이며 예전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어요. 내가 갔던 길과 살았던 곳과 공부했던 학교가 모두 없어졌어요.”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40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이 나라의 발전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있다. 지방 사람들이 그렇고 베이징 사람도 그렇다. 그는 라오베이징 사람들이 점차 4환, 5환 외곽으로 밀려나고 점차 가난해지고 생활수준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Susie에게 베이징은 이미 황금태양이 아니었다. 그는 황금태양에 살았던 가사 도우미 아줌마를 찾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서 안심이 되지요.” 그러나 구하지 못하였다. 베이징 사람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이해가 안 된다. 기본 생활보장을 유지비를 받는 사람은 많은데 왜 가사도우미 일을 하지 않는가?
도시가 변하고 있는데 베이징 사람과 지방 사람 중간에 낀 사람으로서 느낌이 너무나 복잡하다.
지금 Susie는 이미 전철을 타지 않는다. 2위안으로 타는 전철 안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상반기에 가격 인상하는 소식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이렇게 하면 더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데 Susie는 이런 게 너무나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베이징에서 놀고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그는 말할 때 약간 서글퍼하며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들은 이미 몇 배의 표값을 공헌하였는데 2위안으로 전철을 타는 게 큰 손실을 안겨주는 것인가? 그들의 부모와 자녀도 이 도시를 위해 대가를 치렀는데 그게 부족한 건가? 가격 인상이라니….”
오빠가 그에게 말했다. 당시에 전철을 건설한 사람들은 모두 지방 사람들이다. 전철 구멍을 뚫는 진동기계를 조작하면 끊임없이 진동되기 때문에 몸의 조직 세포들이 다 망가졌다. 나이가 들면 근육이 붓는 증상이 나타난다. 고질병을 남긴 것이다. 베이징은 이 사람들에게 아주 어렵고 잔인한 도시였다.
지금은 딸이 커서 미국에 가려고 하는데 그것은 Susie에게는 약간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당시 그가 안온한 집에서 나와 부모가 쌓은 자원과 인맥을 벗어나 혼자 힘으로 베이징에 왔는데 지금 딸도 그가 만든 따뜻한 집에서 나가려고 한다.
그는 딸에게 베이징이 좋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딸은 준비하고 있는 미국 비자신청 자료를 가리키면서 “I think this is better.” 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원하는 대답이다. 그 감격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다. 그는 영어로 대답하였다 “OK I will support you.” 27년 전 그도 영어를 통해서 베이징에 왔는데 지금 딸도 영어를 통해서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인생이 아주 묘한 순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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