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1호선의 베이징스토리 1 쓰후이동(四惠东)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3-02 1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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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류단청] 매일 지하철1호선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이러한 도시에 적응하고 녹아들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인생이다 .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베이징까지 와서 새 출발하여 베이징과 하나가 되어 각자의 꿈을 쫓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들은 지하철1호선에서의 어느 출구를 기점으로 ‘베이징’이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위에는 창안지아, 아래는 지하철 1호선.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는 8차대로는 베이징을 동서 양쪽으로 관통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거리이다. 반면 지하에서는 3분에 한 번씩 운행되고, 45년간 변하지 않는 노선을 따라 매일 31.04㎞를 달려 150만 명에 달하는 승객을 23개의 정류소에 데려다 주는 지하철1호선이 있다.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베이징 상주인구의 1/13 남짓이다.

 

창안지아와 1호선 사이에 약 80cm~100cm 두께에 달하는 넓은 방폭층이 있다. 600년 전, 베이징을 세울 때, 청텐먼 앞에 이 거리를 만들었다. 청나라 시대에 청텐먼은 텐안먼으로 개명되었다. 점차 동단 배루에서 시단 배루까지 옛 베이징 초창기 처음으로 비즈니스 거리를 만든 것이 최초의 창안 거리의 초기 형태가 되었다. 베이징이 확장함에 따라 이 거리는 동쪽과 서쪽 양쪽으로 끊임없이 연장되었다.

 

동단에서 동쪽까지 곧바로 찌엔궈먼에서 나와 융안리를 지나 무역CBD 비즈니스 구역까지 오피스텔이 점점 많아진다. 은행가, 투자은행 사장, 석유회사 최고 경영자, 변호사 사무실, 파트너…. 세상 사람들 눈에 뛰어난 인재들은 창안지에를 따라서 쭉 동쪽까지 모였다. 빌딩도 점점 높아지고, 땅값과 집세도 점점 올라간다는 것은 명망가, 재력가, 뛰어난 기술자, 젊은 회사원들과 대중들을 풍요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동쪽은 풍요롭고 서쪽은 부귀하다’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 말은 베이징 사람들에게 계층을 구분하는 척도이다. 푸싱먼 지역에 새로 설립된 금융거리는 서쪽에서 유일한 금융기구이다. 서쪽으로 계속 가면 무시띠와 군사 박물관이 있다. 곧장 걸어가 다보면 푸위엔(府院)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궁쭈펀(公主坟), 완쏘루 (万寿路)를 지나면 중국의 군사센터이며 군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서쪽으로 더 가면 빠보우산 혁명묘지이다. 묘지에서 서쪽으로 가면 베이징의 군정요지에서 공업구역으로 바뀐 쓰징샨구이다. 여기는 지금 수도철강 가족들의 주거 지역으로 되었다.

 

1호선을 따라 곧장 서쪽으로 가면 사람들의 구두 굽이 점점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사무직원이라도 개중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굽의 차이가 매우 크다. 정류장의 위치마다 그에 해당하는 ‘대단한’ 배경이 느껴진다. 이는 정류장 자체가 무언가의 은유를 갖는 것처럼 어느 계층 혹은 어느 생활의 출구가 된다. 합숙 집에서 나와 쓰후이역에서 30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사람들에게 밀려 드디어 지하철에 들어갔을 때 당신은 베이징에서 방랑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국제무역센터역에서 하차할 때 사람들의 옷차림은 단정하다. 열정과 재능으로 오피스텔 중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었을 때 당신은 중국 중심에서 가장 비싼 오피스텔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인 것이다. 베이징에서 재미없는 체제(体制) 내에서 일하며 오랜 근무기간과 느린 승진을 이겨내야만 이 도시에서 신분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지하철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 역에서 내리고 또 탑승하고 있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베이징까지 왔으며 서로 다른 목표와 각자의 인생경험과 꿈을 가지고 이 큰 도시에 온 것이다. 또한 서로 다른 노력과 자신만의 경로를 통하여 지하철 1호선의 출입구를 기점으로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베이징에서 겪은 일들을 다시 뒤돌아보면 베이징은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진정의 베이징의 모습이고 ‘베이징’인 것이다.

 

이정(28세)은 베이징 생활에 곤혼을 느끼고 있다.  사진/동걸욱

 

쓰후이동(四惠东)

 

 

리정(李征`가명)은 매일 웰세집에서 나와 사혜동까지 걸어가 1호선을 탄다. 여기서 출발하여 서단(西单)까지 11정거장이며 또한 4호선을 갈아타 12정거장 더 가야 한다. 출근하는 직장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집에 돌아가는 시간도 한 시간 반이며 총 23정거장이다.

리정이 서류 가방을 들고 미간을 찌푸리며 오피스텔에서 나올 때 그의 상태는 낯설어 보였다. 그 모습은 짜증나 있고 사람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이 산동(山东) 사나이는 올해 28살인데 이미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은 모습이었다. 부모는 농사를 짓고 그는 혼자 시험을 봐서 베이징에 왔다. 몸은 큰 도시에 있지만 새로운 것에 적응하여야 하는데 그의 생각은 아직도 옥수수 밭에 있다.

현재 그는 ‘뽀뽀하다’는 단어에 몰두해 있다.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한 기업에 출근하고 있다. Wechat플랫폼 만드는 일을 맡았다.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진짜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건 억지를 부리는 것 아닌가요?”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할 때 똑바로 말하지 않고 왜 ‘친’과 ‘뽀뽀해’ 이런 단어를 쓰죠? ‘아이스크림’을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르지 않고 왜 ‘디저트’라고 부르는데요? ” 그는 체면에 관련된 큰일인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좀 엄숙한 것을 좋아해요.” 그가 말한 엄숙함이란 인민일보 형태 혹은 여러 학자가 와서 강의하며 교류할 때 사용하는 단어들을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뽀뽀해’를 쓰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열심히 연구해서 ‘뽀얗다, 뽀뽀해, 나왔다’ 등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말할 때마다 구역질이 나고 돈이 빠져 나가는 것처럼 불쾌해 했다.


만약에 자신이 하는 일 그 자체에 취미가 없으면 출근하는 것은 가서 버텨야 하는 것으로 변한다. 출근하는 것이 그처럼 힘든 여정이 되는 것이다. 지하철 1호선의 쓰후이동역은 2000년에 개통되었으며 1호선 동쪽 출발점이 처음으로 시단동(西单东)에서 동사환(东四环)까지 연장되었다. 최근에 확장된 지하철1호선 이다. 이 노선은 이제부터 차오양(朝阳), 동청 (东城), 서청 (西城), 하이띠엔 (海淀) 과 쓰징샨(石景山) 등 5개 지역을 지나간다.

 

 또한 이 역은 터미널, 전철, 버스정류장과도 인접해 있어 중요한 교통요지가 되었다. 하루 탑승객 수만 20만 명이 넘는다.

예전 쓰후이동은 베이징 교외에 있는 작은 상품판매시장이었다. 지역생활수준과 서비스 효율도 높지 않았으며 여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주로 소매상인,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과 저층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1호선이 동쪽으로 연장되고 CBD가 동쪽으로 확장되어 쓰후이와 쓰후이동은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서쪽 따베이야오(大北窑)에서 동쪽 가오베이덴(高碑店) 문화원 지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국제무역까지 가는 시간은 20분이면 충분하다. CBD비즈니스 지역, 국제무역역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또한 월세도 회사원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월세 방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퉁저우(通州)와 옌지아오(燕郊)에서 사는 직원들은 매일 여기에서 전철을 갈아탄다. 역에서 줄을 서며 지하철을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지하철이 5, 6번 지나가도 탑승하지 못하는 것은 일상이다. 전철 입구를 잘 선택하여 사람들 무리에 떠밀려 탑승하는 방법도 있다. 이 전철역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무리를 잘 택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리정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매일 3시간 정도 차를 타고 또 갈아탄다. 베이징의 넓은 지역을 지나다니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 느낌은 매일 남보다 3시간 더 짧게 사는 것 같았다. 매일 동그란 쳇바퀴에 갇힌 햄스터처럼 반복적으로 뛰는 느낌이다. 출근은 퇴근을 위하여, 퇴근은 잠을 자기 위하여, 잠을 자는 것은 다음 날의 출근을 위해 반복하는 행위이다.

현재까지 그는 여전히 자기가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를 정확히 모른다. 체제 내에서도 안 되고 체제를 떠나서도 안 된다. 고향에 가도 적응하지 못하며 큰 도시의 이러한 틀에도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둘 중에서 왔다 갔다 하며 자신의 생활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체제 내에 들어갔을 때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이 원한 것이 있고, 어느 정도는 고향 사람들이 그에게 ‘출세하는 것’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들어간 것인지 간혹 헷갈린다. 2009년 옌타이(烟台)대학을 졸업할 때부터 런따(人大)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것은 시골아이에게 있어서는 성공한 편에 속한다. 베이징에 처음 왔을 때 그는 매우 득의양양해했다. 동네 어르신과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 목적은 명확하다. 호적을 얻어 체제 내로 들어가서 3년 더 버텨서 부주임, 주임까지 승진해서 돈을 모아 집도 사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는 것이다. 그리고 매년 고향에 가서 설날을 보내는 것이다.

체제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젊은 청년들과 같이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고 또한 무언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줄 알았다. “나는 여러분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그는 특별히 회사의 내부 Wechat 그룹방을 만들었으며 매일 임원의 사적인 생활과 회사 스토리를 올렸다. 근무에 포함되지 않은 일이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장한테 불려갔다. “리정 씨, 당신은 Wechat에서 룰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떠한 말은 할 수 있고, 또 어떠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홍보경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리정은 어리둥절하여 설명하려 시도했지만 사장은 듣지 않았다.

회의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공산당 열사인 쟈오유루(焦裕禄)에 대해 배워야 했으며 끝난 후 저녁 10시에 2시간의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직장 상사는 ‘쟈오유루는 나의 신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그가 발언할 차례이다. 그는 용기내서 말했다. “쟈오유루가 죽은 지 20, 30년 이 지났습니다. 쟈오유루가 근무했던 란카오(兰考)는 아직 빈곤지역입니다. 간부는 쟈오유루처럼 굶으면서 헌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만 잘 하면 되고 저는 사람들을 위해 복무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세금을 납부하여 저를 먹여 살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호 복무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힘들어서 죽어버려도 알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이 말로 윗사람을 비웃어 주었다. 그 때 그는 이미 체제를 떠날 생각이 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승진에 대해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열정적으로 일했고 승진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후배직원이 그의 상사가 되었다. 전에 후배 직원이 베이징에 와서 그에게 사부라고 부르며 술도 따라줬는데 지금은 반대로 그에게 “리정 씨”라고 부르며 술도 그가 따라주게 되었다.

체제를 떠나려고 한 그 날, 그는 직장 상사의 사무실에 앉아 “저 떠날래요.”라고 말했다. 상사가 많이 놀라면서 “리정 씨, 우리가 이렇게 당신을 키웠는데, 한 당원으로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리정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오직 직원일 뿐이고, 간부는 아닙니다.”

그가 처음으로 반항했다. 마음속에 깊이 증오하고 있었기에 출세하는 생각을 접어 버렸다. 그는 늘 동갑내기들보다 불안하고 초조해했다. 이는 잠재의식으로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생 시기에 그는 이미 일을 시작하였다. 동갑인 사람들이 모두 캠퍼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책을 읽고 연애를 하는 데도 그에게는 이것이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전부 의미 없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이란 당연히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다.


대학원 1학년 때 생긴 두 번의 기회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 하나는 중국 이동쉬저우 지사(中国移动徐州分区)의 오퍼이고, 하나는 아일랜드에 가서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취직할 지 계속 공부할 지 고민이 되었다. 집에서 그에게 ‘출국은 오직 1년뿐이고, 직장은 평생의 일이다’라고 설득하였다.

부모시대에 사람들의 직업은 철밥통이었다. 하나를 찾으면 꽉 잡아야 했고 ‘출국한다는 것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겠다’ 라는 의미이다. 리정은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가치관과 부모님의 고정관념 사이에서 흔들렸다. 호적을 무시하려고 하지만 호적을 또 반드시 얻어야 한다. 뼛속까지 관료주의를 싫어하지만 체제에 진심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기회 앞에서 그는 전통적 가치관으로 기울었다.


그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결국 그는 이미 얻은 직장을 포기하고 아일랜드로 갔다. 아일랜드는 아름다웠고 사람들도 유연해 보였다. 호수 옆에서 산책할 때 항상 비둘기가 날아다닌다.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한가로워서 ‘앞으로 어떡하지? 귀국하면 어떡하지? 직업은 어떡하지?’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학업, 직장, 결혼과 아이 낳는 것, 이 4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는 초조해진다.

그는 자신의 몸속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고정관념은 버리지도 못하고 갖고 있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년간의 시간 동안 그의 언어능력은 늘지도 않았고 견문도 그대로였으며 먹을 때도 조심스럽게, 놀 때도 조심스럽게 규칙적으로 중국식의 생활방식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는 난처함에 빠져 있다고 느껴졌다.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이웃들이 물었다. “리정아, 너도 이제 서른이 되었는데 장가도 가지 않고….”, “ 전 아직 스물여덟 살밖에 안 되었어요”라고 반박했다. 또 호적과 집, 수입에 대해 물었다. 옛날에 자신의 자랑스러워하던 것들이 지금은 짜증나게 할 뿐이다.

고향과 멀어졌는데 베이징이라는 이 도시는 그를 아직 받아주지 않았다. 그의 고정관념과 생활방식은 여전히 이곳에 녹아들고 있지 못하다. 만약에 그가 결혼도 하지 않고 집도 사지 않으면 고향에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이웃의 시선 때문에도 돌아가 살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타는 것도 짜증난다. 그는 가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도대체 왜 여기서 사는가? 부모님을 위해서인가? 부모님 또한 옆에 계시지 않다. 그럼 편해지려고 그런가? 아니면 더 큰 의미를 위해서인가? 그런데 어디에 그런 큰 의미가 있는데?” 그는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 집에서는 결혼하는 것을 재촉하는데 집 한 채의 계약금이 60만 위안이다. 여자 쪽은 이미 계약금의 절반을 마련하였지만, 그는 그 큰돈을 내기가 힘들고 부모님도 도움을 줄 수 없다.


잠들기 전에 그는 가끔 여자 친구에게 묻는다. 우리는 여기서 뭐 하는 걸까? 양쪽 부모님의 돈을 모두 가져다 집을 사서 주택 대출금을 갚으며 20, 30년 동안 갚다가 60세에 되서야 모두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아들에게 집 한 채를 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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