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1호선의 베이징 스토리 3 용안리(永安里)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3-02 14: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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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류단청] 지하철1호선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이러한 도시에 적응하고 녹아들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인생이다 .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베이징까지 와서 새 출발하여 베이징과 하나가 되어 각자의 꿈을 쫓아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들은 지하철1호선에서의 어느 출구를 기점으로 ‘베이징’이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사진/동걸욱


용안리(永安里)

 


리하이펑(李海朋)은 이미 중년층에 들어섰다. 또래 나이 중에서 그는 성공한 편이지만, 여전히 자기와 대결하고 있다. 20년 이래, 그는 늘 취미, 재능과 세속적 성공에서 중간점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매번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긍정적이었고, 원대한 포부와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번의 선택에서 성장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를 지나치게 단순하며 또한 경솔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패션선생>상품 프로듀서와 잡지 편집인으로서 지금의 리하이펑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는 문인, 소설가이며 <남부주말>의 유명 기자, <인물>잡지의 편집인으로서 보도에 대한 요구도 높다. 좋은 문장을 쓰며 영원히 아름다운 세계를 갈망하고 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리하이펑은 소년의 순수함이 있다고 말한다. 나이와 맞지 않는 단순함이 있으며 섬세하고 부끄러움을 잘 탄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가 크고 복잡한 패션계에서 고위층까지 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세계무역기구 더플레이스 패션빌딩에서 걸어 나올 때, 그의 패션스타일은 주변의 환경과 어울린다. 회색의 바지, 하얀 T셔츠, 키가 크고 날씬하다. 1년 전만해도 그는 패션업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 다녔지만 지금은 안정되었다. 그는 주 3일 정도 출근한다. 오래 전 기자생활에 비해 이 빈도는 적지 않은 편이다. 매일 그는 오과송 근처에서 운전하며 나온다. 창안지에를 돌아 쭉 서쪽에서 동쪽까지. 서쪽은 안정되며, 그만그만한 시민들의 생활터전이다. 그 다음에 동단을 지나면서부터 변화가 심하다. 국제무역 제2기를 볼 수 있고, 동쪽으로 갈수록 떠들썩하다. 쓰후이는 이미 어수선한 새로운 베이징이다.

지금의 리하이펑은 1호선을 타지 않아도 된다. 운전하며 창안지에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 그 자동차 노선과 1호선은 겹쳐지지만, 지하에서 지상까지 그는 몇 년 동안의 노력을 거쳐 드디어 용안리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이는 신분상의 변화다. 기자와 문인을 거쳐 이젠 관리자로 변신했다.

‘용안리’는 그 자체가 고상한 의미이다. 예전에 이곳은 일반인의 지역이며 류 씨의 빌딩과 마을, 치 씨의 채소밭과 작은 란남 공장이 분포되어 있다. 50년대 주택빌딩이 지어졌으며, 90년대에 이곳은 좁은 비즈니스 거리였으며 그 양쪽은 철판으로 지은 간단한 단층집들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슈수이제(秀水街), 작은 노천시장이다. 노천시장은 여러 가지 비단과 도기를 팔며 가격도 싸서 세계에서 유명하다.

슈수이제가 노천시장에서 빌딩으로 탈바꿈 될 때, 용안리는 이미 예전의 용안리가 아니었다. 이 변화는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도로가 넓고 빌딩도 많고 거리는 현대적이고 깔끔하다. 서쪽까지는 왕푸징이고 동쪽까지는 국제무역이다. 용안리에는 대중매체와 문화기업들이 오피스텔에 입주해 있다.

현실 생활이 사람에게 주는 위압감은 국제무역구역 쪽보다 강하지 않지만, 분명히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느끼는 것은 동쪽 사람들이 걷는 속도도 서쪽보다 빠르며 사람마다 분주한 느낌이 있다.

그는 용안리를 떠난 2년 후 베이징에서 가장 번화한 쓰모우텐제(世贸天阶)를 작업장소로 정했다. 그곳은 그의 새 직장인 패션그룹 건물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리하이펑은 자기가 점점 연약해졌다고 말했다. 통행을 제한해 운전할 수 없을 때 그는 택시를 탄다. 비록 차가 막히더라도 자신만의 공간에 갇히는 것이며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아도 된다.

공간은 생겼지만, 시간은 점점 적어졌다. 빌딩 안에서 리하이펑은 늘 서두른다. 업무에 쫓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남부주말>과 <인물>잡지에 비해 <인물패션 남성>의 업무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는 성과를 빨리 내기 위해 극도로 예민해 있고 과도하게 집중한다.

20년 전, 리하이펑은 캠퍼스의 시인이었다. 몇 년 전에 그를 아는 윤현붕이 기억하기에, 리하이펑은 “날씬하며 피부가 하얗다”, “피가 끓고 있다”, 동창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를 “시 쓰고 있네”라고 표현하곤 하였다. 이 단어는 그를 존중하지 않는 호칭이다.

되돌아보면 그는 그 시대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신문이나 패션 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어느 정도는 무의식중 일어난 일이다. 지금까지 그는 그때의 변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93년 그는 랴오닝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대학생들이 모두 줄을 서서 청약통장을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식을 살 수 있는 권한이다. 이것 받고 팔면 1,000~2,000위안을 벌 수 있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캠퍼스 스타였지만 일주일 후, 당신은 곧 바보가 된다” 그는 두 시대의 중간에 끼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리하이펑은 이미 비즈니스적인 것과 화해하길 것을 원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솔직하게 말한다. 자기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좋은 것’이다. 이 ‘좋다’라는 것은 신문잡지이든, 패션그룹이든 그는 오직 ‘좋다’를 추구하는 것이지 속성과 내용이 어떤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최근 신문의<인물>에 비해, <패션선생>은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패션선생>은 성숙된 상업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부한 광고와 큰 규모, 이 모든 것이 좋은 상품을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패션도 큰 문학이다. 몇 년 동안 기자와 문인을 했지만 패션은 리하이펑이 잘 아는 업종이 아니다. 패션 빌딩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들은 밝고 아름답다. 입만 열만 브랜드 얘기고 말 할 때 영어를 섞어서 쓸 때면 더욱 전문가다워 보인다.
“많은 사람들을 리드하려면 브랜드를 많이 알아야 되지 않나요?”,“조금은 배워야 해요”라고 이해붕은 말한다. “브랜드와 패션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겠죠. 봐도 뭔가 뭔지 모르겠고 어느 옷이 예쁜지 딱히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환경에 적응할 나이가 지났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모두 패션적이고 그는 지금 좀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이런 것에는 이미 관심 갖지 않다. 오래 전에 리하이펑을 잘 아는 친구에게 들었다. 최근에 그와 만났는데 리하이펑이 물어본 첫마디가 “내 신발이 어때?”였다고 한다.


같은 그룹에 있지만, 그와 같은 등급인 사람들의 상태는 그와 전혀 다르다. 그들은 798에서 가게 하나를 빌려 자기가 썼던 중고품을 판다. 신발만 200 켤레이다. 10분의 1만 팔았는데 10만 위안쯤 벌어들였다. “생각을 해봐요, 그들의 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생활은 이런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여러 사람들과의 차이를 느꼈다. “그래서 당신은 꼭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아주 중요시해야 하고, 남의 옷이 예쁘지 않다 라고 함부로 말하면 진짜 안 되요! ”

리하이펑의 수입은 착실히 생활하는 데 쓴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이미 패션원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38페이지 <패션선생>의 밀라노, 파리와 런던 등 그는 모든 것을 과감히 수정한다. “원고라면 기본적인 규칙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 있게 수정하는 것이다.

신문잡지에 비하면 <패션선생>의 환경이 더욱 복잡하다. 더 많은 이익과 관계되어 있지만, 리하이펑이 보기에는, 그가 말하는 ‘좋은 점’이 대가보다 큰 것이다. <인물>은 <패션선생>의 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이 양식은 보도의 질에 도움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착실하게 광고를 끌어들일 수 있고 영향력과 상업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비록 <패션선생>의 내용이 안 좋아 반응이 좋지 않아도 그게 대수인가? 130페이지 넘는 광고를 끌어왔다. <인물>은 아무리 잘해도, 20페이지의 광고밖에 모을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잘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이해붕은 말한다.

그는 성취도와, 판매 수량, 성공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오래 전 《남부주말》에서 기자생활을 할 때, 리하이펑은 동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동료가 “당연하지, 누군들 편집인을 하고 싶지 않겠어?”라고 말한 것이다. 그 때 리하이펑은 놀랐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 그 때 그는 뉴스 취재하며 인터뷰를 했다. 늘 돌솥비빔밥 한 그릇, 된장찌개 하나, 한 권의 잡지를 들고 초보기자의 배움의 길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한 편의 원고를 위해 편집자에게 투정부린 적도 있다. “저 안 가면 안 되나요? 너무 힘들어요. ”


편집자가 그를 한 시간 동안 설득했다. 탈고를 방금 마친 그는 장기간의 출장으로 인하여 피곤한 상태였다. 죽어도 이런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했다. “리하이펑, 우리 모두를 위하여 네가 가야지.” 리하이펑은 이 말을 듣고 나서, “그래요, 제가 갈게요”라고 하였다. 그 때의 리하이펑은 ‘공공이익’ 이 네 글자에 설득된 것이었다. <남방주말>에 입사한 2년 만에, 그는 원고 발송량이 가장 많은 기자이며 게재 빈도도 매주 한 편에 가까웠다. 바로<남방주말>에서 보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광고가 1억 위안을 넘어 2000년도에 일반 기자의 월급이 2만 위안이나 되었고, 부부 두 사람이 남쪽에서 2년 일하면, 북경 사환(四环)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광동성위원회가 눈 감아 줘서 모든 기자들이 과장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충분히 세계를 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재능이 없는 자도 능력자로 만들 수 있으며, 가난한 사람도 일확천금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사를 심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년 동안 기사를 써 봤지만 전성기처럼 감성적이거나 감동적이지 못했다고 이해붕은 말한다. 감화력 있는 기사도 써본 적이 있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원고료로 모은 돈과 친구들한테서 빌린 6만 위안으로 그는 옥천로에서 140㎡의 집을 샀다. 그 집은 104만 위안이었고, 계약금은 30만 위안이다. 원고료를 받아 생활을 하려다 보니 기자생활 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된다.


그 때 그는 이미 명성이 얻었으며, 끊임없이 대중들의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했다. 이것은 그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게 했다. 그는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신문, 이 직업 원래 재미없고, 오직 상품을 주문하여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두 번 잘하면, 남들이 나를 칭찬할 것이고, 나는 이 일을 반복적으로 하지만 그다지 재미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면, 그는 단지 문학만을 좋아했다. 자신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타고난 소실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우연히 신문 업계에 들어갔고, 들어가고 나서도 잘한 편이다. 점점 집요함이 생겼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주변 평가에 신경을 쓰게 된다. 이러한 평가를 의지하여 이 업종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초면인 사람한테 말을 걸거나 인맥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문도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원촨이 지진 때, 많은 사람들이 보도한 것 중에서, 리하이펑의<베이촨 재앙 후 잔혹한 것>이 나왔으며 이 보도에 대해 비방과 칭찬은 각각 반반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재난 앞에서도 ‘작품’만 생각한다고 비난했다. 섬세하고 냉정한 기사지만 다른 의도로 기사를 쓴 것처럼 평가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해붕이 싫어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업무상 성장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침 보도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든<불사조가 1호선에 있다>가 출판되었다. 그 판매량이 족히 10만을 넘었다. 6월에는 판매 최고봉까지 올랐다. 그는 ‘입소문식 마케팅’를 잘 알고 있다. 리하이펑은 이에 기쁨을 느꼈고, 이 판매 숫자는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는 자기가 신문사에서 나와 순수문학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한다.

<중국신문주간>이 물었다. “당신은 마음속에서 늘 문학을 인정한다, 무엇이 당신을 이 업종에 남아 있게 만드는가? ”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그것은 ‘나약함’이라고 말했다

소설을 쓰는 것은 긴 과정이다. 예상 밖으로 그는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고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을 하게 됐을 때 긴장하고 서투른 기색이 나타난다.<저녁의 고요>라는 자신의 책에서, 그의 필법은 장엄하고, 내용은 밀집되어 있으며, 유머감이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늘 생계와 직업에 휩쓸려 자기의 소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35세 총각이 처음 섹스할 때처럼 긴장하고 흥분되는데 그가 과연 그것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못하겠지요.”


그는 소설을 다 쓰지 못했는데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고,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블로그 천하>가 그를 행사활동에 와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벤트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는 기분 좋게 허락했다. “저는 동굴에서 너무 오랫동안 갇혀져 있었어요”

그가 떠날 때 이상적인 관념으로 모임에 나온 사람들의 삶은 엉망이 되었다. 리하이펑은 말했다.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러한 곳에 진정한 깊은 정을 쏟지 못했다. <패션선생>을 시작한 것과 같이 그는 그저 하나의 상품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이 분야에서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되어 온 것이며 단지 표면적인 성공만을 바랐던 것이다. 사람이 중년이 되면 ‘이상주의’에 대한 생각은 예전과 달라진다. “이상적인 삶은 금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없으면 당연히 끊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해에 그는 폐쇄된 환경에서 빠져나와 베이징까지 왔으며, 문학적 환상의 품고, 신문 업종에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금은 자원이 있고, 명성도 있다. “난 아직도 그 차 안에 있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문학의 꿈이지만 <패션선생>의 일상 잡무는 여전히 그의 대부분 시간을 가져가 버린다. 지금 그는 동쪽에 가서 집을 사는 것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위치는 대략 퉁저우 지역이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출근하기 편하고, 또 하나는 전에 그와 함께 베이징에 온 친구도 동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리하이펑은 동쪽을 싫어했다. 그는 옥천로에서 집을 샀고, 서쪽의 단정함, 우아함과 문학을 좋아해서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1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쭉 가다보면 느낌이 묘하다. 사람이 걷는 속도도 모두 다르며, 점점 빨라지고 초조해진다. 그러나 그의 생활과 직장도 1호선에 따라 동쪽으로 이전하고 있다.


<저녁의 고요>머리말에서, 리하이펑은 정중하게 “만일 한 사람의 기자로서 죽지 않으면, 나의 인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지금도 이렇게 생각해요? ”리하이펑은 생각을 하다가, “그렇죠”라고 말했다. 조금 망설여지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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