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녜화링(聂华苓) 작가의 인생 스토리(4)--녜화링의 일생, 한권의 현대사와 같다

90세 녜화링-뿌리는 중국, 줄기는 대만,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
”나는 한 그루 나무이다. 뿌리는 중국에 있고 줄기는 대만에 있으며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미국 중서부)에 있다.” 녜화링(聂华苓)은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녜화링과 남편 폴 엥글(Paul Engle)이 공동으로 창립한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은 수많은 양안(两岸-중국과 대만)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3-27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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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졔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보냄)]  1949년 초, 해방군은 베이핑(北平)에 진입하려 한다. 버줘이(傅作义)는 공산당과 협상을 한다. 집집마다 라디오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공산당과 국민당 방송국에서 보내는 내용을 듣고 있다. 전쟁 형세를 전해주고 있으면서 각자 승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전한다.

 

간혹 제갈량이 성루에서 술을 마시며 악기를 다루는 방송이 전해지는데 이상하게만 들려졌다.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맑고 깨끗한 소리가 들려왔다. “료선전투(辽沈战役)가 승리로 끝났다. 화이하이전투(淮海战役)는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인민해방군은 지금 적극적으로 강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핑진전투(平津战役)도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녜화링은 인민해방군의 승리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같은 목소리를 난징(南京)에서 들은 적이 있다.

 

1949년 2월 3일, 해방군은 침착하고 조용하게 베이핑에 입성하였다. 그 해 6월 녜화링 일가족은 베이핑에서 광저우로, 광저우에서 타이베이(台北)에 왔다. 대만에 온 녜화링은 중학교에서 교사직을 맡고 어렵게 안착하게 되었다.


“푸른 섬은 한 척의 배와 같다, 달빛 아래 떠돌고 있다. 아가씨, 당신도 나의 마음속에서 떠돌고 있구나.” 1950년 중기 즈웨이(紫薇)가 부른 <푸른 섬의 밤 노래(绿岛小夜曲)>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대만 섬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위로해 주었다.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민주와 자유공간을 얻기 위하여 <자유중국>잡지는 대만에서 창간되었다. 후쓰(胡适)가 발행인을, 레이쩐(雷震)이 책임자를 맡았다. 국민당과 함께 대만에 온 레이쩐은 1917년에 국민당에 입당하여 국민정부에서 여러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였다. 대륙을 떠나기 전에는 국민참정회의 부 비서실장으로서 국민당의 헌법 제정에 도움을 주었고 장제스(蒋介石)를 대표하여 공산당과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자유중국>은 문학적인 편집자가 필요했다. 그 당시 녜화링은 여러 작품을 발표하여 문학계에서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었다. 그녀를 레이쩐에게 소개해 주었다. <자유중국> 잡지사는 타이베이 진산제(金山街)에 있다. 녜화링은 문을 열고 작은 다다미방에 들어갔다. 

 

이곳이 <자유중국>의 사무실이다. 편집자 한 명, 사장 한 명, 세무사 한 명, 발행 책임자 한 명, 총 네 명이다. 레이쩐은 책상에 앉아 원고를 보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래! 내일부터 시작하자.”라고 하였다. 녜화링은 <중국신문주간>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한다. “나는 그렇게 <자유중국>에 가입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문학계는 거의 전부 공산당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통제되어 정치 외에 단순한 문학 작품을 볼 수 없었다. <자유중국>의 편집위원회는 모든 자유 자식인과 국민당 개명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베이징대학 교수 모우즈수이(毛子水)와 짱퍼쵠(张佛泉), 대만대학 인하이광(殷海光), 사상이 투철한 문인 따이뚜헝(戴杜衡)과 쌰또우핑(夏道平). 국민당 관원인 교육부장 항리우(杭立武), 대만은행 총경리 취징저우(瞿荆州)이다.


편집위원회에서 가장 어리고 유일한 여성인 녜화링은 편집회의에서 보수파와 개명파를 변론하는 것이 큰 재미로 여겨졌다.


1961년 9월 1일, <자유중국>은 장제스의 연임을 비판하였다. 3일 후에 큰 재난이 닥쳐올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녜화링은 회고록 <삼생삼세(三生三世)>에 9월 4일 아침에 일어난 일을 적었다. 9시 넘어 잠에서 일어난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복 경찰들을 보게 된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잘못 찾았다고 하고는 건물의 다른 한쪽에 가서 <자유중국> 편집 버쩡(傅正)의 문의 두드렸다. 

 

버쩡이 문을 열자 경찰들이 떼로 모여들어 버쩡을 방안으로 몰고 방문을 잠그었다. 녜화링은 창밖으로 사복 경찰들이 골목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녜화링은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몇 시간이 지나자 버쩡의 방문이 열렸다. 경찰과 사복 경찰들이 그를 둘러싸고 밖으로 나왔다. 녜화링과 그녀의 모친은 버쩡을 맞이하러 갔다. 버쩡은 열쇠 뭉치를 녜회링의 모친 손에 쥐어주면서 “녜이모, 저를 도와서 이걸 보관해 주세요.” 버쩡은 붙잡혀 갔다. 녜화링은 자신도 잡혀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서 반나절을 기다리며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선생이 잡혀갔다!” 그날 오후 <자유중국>의 천찌콴(陈济宽)이 마당으로 들어오면서 녜화링한테 말한다. ”마즈커우(马之筘)도 잡혀갔다! 류즈잉(刘子英)도 잡혀갔다! <자유중국> 신문사가 몰수 당했다! 자료와 원고를 모두 가져갔다!” 천찌콴이 소리를 지르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버쩡도 잡혀갔어요.” 녜화링이 급하게 말한다. 천찌콴은 쇼크를 먹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갔다. 그때부터 녜화링과 <자유중국>의 동료들은 격리되었다. 그들의 집 밖에서는 밤낮없이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녜화링은 대만경찰본부가 반란협의로 레이쩐과 편집장 류즈잉, 마즈커우, 버쩡 등이 체포했다는 것을 매체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군사법정에서 레이쩐은 비적(匪賊)을 위해 홍보하고 비적을 알고도 제보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고, 버쩡과 마즈커우는 3년 감화 받는 것을 선고 받았으며 류즈잉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이번 일이 벌어진 후 <자유중국> 동료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후쓰(胡适)가 미국에서 대만으로 돌아올 무렵에야 만나게 되었다. “내 눈에서 정치는 전쟁 같기도 하고 한편의 연극 같기도 합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녜화링의 모친은 2년 후에 돌아가셨다. 남편과 6년을 떨어져 살던 녜화링은 혼자서 두 딸을 보살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하고 있을 때 1962년 대만대학 중문과 교수 타이징눙(台静农)은 녜화링의 집에 와서 그녀를 대만대학에 와서 문예창작을 가르쳐 달라고 초청하였다. 그제야 녜화링은 다시 문학과 창작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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