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녜화링(聂华苓) 작가의 인생 스토리(2)-이별한 지 30년
- 90세 녜화링-뿌리는 중국, 줄기는 대만,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
”나는 한 그루 나무이다. 뿌리는 중국에 있고 줄기는 대만에 있으며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미국 중서부)에 있다.” 녜화링(聂华苓)은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녜화링과 남편 폴 엥글(Paul Engle)이 공동으로 창립한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은 수많은 양안(两岸-중국과 대만)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3-27 16:58:00
[기자/수졔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보냄)] 1978년, 이별한 지 30년 만에 녜화링은 다시 조국 대륙에 발을 딛게 되었다.
중국에 돌아오는 전날 밤 아이오와는 큰 비바람이 몰아쳤다. 사슴원에 있는 백 년 묵은 참나무는 윙윙 소리를 내고 아이오와강은 출렁거렸다.
18시간 장시간 비행하는 내내 녜화링은 잠을 자지 않았다. 홍콩에 착륙한 후 다시 뤄후(罗湖)로 향했다. 뤄후교의 맞은편이 바로 고향 땅이다. 녜화링 일가족은 중국으로 향하는 도로표지판을 따라 이동하였다. 뤄후교에 올라선 녜화링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길게 뻗어진 길이다.
기차는 부드러운 기적소리를 내며 보슬비와 안개, 파란 벌판을 가로질러 선전(深圳)에서 광저우(广州)에 도착하였다. 30년 동안 만나지 못한 큰 형과 동생 두 집 가족들이 역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는 장소를 잘못 알고 있어서 한참을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전부 흩어지고 나서야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서로 부르짖으며 원망하고 해명도 하면서 손에 쥔 가방도 들어야 해서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만나기 전에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했지만 정작 만나고 나니 기쁨과 혼란 그 자체였다.
한자리에 모인 일가족은 차를 타고 광저우에서 우한(武汉)으로 갔다. 마침내 큰 강 옆에 있는 고향에 도착하게 되었다. 창강(长江)의 물은 예전과 같이 흐르고 있고 쟝한관(江汉关)의 시계도 여전히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집은 이미 없어졌다. 모든 것이 변했다.” 녜화링이 말한다.
1925년 녜화링은 우한에서 태어났다. 부친 녜시(聂洗)는 꾸이저우성(贵州省) 핑웨(平越)의 행정 전문 요원이고 모친은 온화하고 선량한 여성이었다. 여덟 명의 아들 딸을 낳아 키웠다. 녜화링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모친을 묘사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올 블랙 치파오를 입고 모기장이 있는 침대에 기대어 손에 있는 책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읊었다. “<삼소인연(三笑姻缘)> <천우화(天雨花)> <필새화(笔生花)> <재생연(天雨花)>” 어릴 때 녜화링은 모친 옆에서 모친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평온한 어린 시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집안의 기둥인 부친이 돌아가셨다. 1937년 중국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일어났다. 녜화링의 모친은 일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피난하러 내려갔다. 비록 피난 중이지만 모친은 녜화링이 계속 학교에 다니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녀를 후베이언스(湖北恩施)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언스에 서 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모친은 동행하지 못했다. 녜화링을 보내는 길에 모친은 눈물을 보이며 몸 챙기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너는 이 어미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데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너희들이 출세하길 바란다.”고 녜화링 모친이 말했다. 녜화링은 <중국신문주간>에게 그때 마지막 그 한마디 말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었다고 말했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은 거의 녜화링처럼 집을 떠나 공부하러 왔다. 생활 구역에서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웃는 친구가 있고 우는 친구가 있다. 고민을 모르는 나이에 고민이 생겼으니 어떻게 그 답답함을 해결할지 몰랐다. 저녁 자율시간에 둘이서 등잔불을 사용한다.
불빛이 깜빡거린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만리, 장성 밖에는 고향, 수수는 지름지고 콩은 향기로우며 곳곳이 황금이고 재난이 없다.” 동북에서 온 여학생이 숙제를 하며 <장성요(长城谣)>를 부른다. 따라 부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책상에 누워 우는 친구도 있다. 노래 소리에 울음소리가 들린다.
집 생각을 하면 고통스럽지만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 그 당시의 삼시세끼와 드레스 옷은 전부 정부에서 대부금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대부금을 받지 못해 공부를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우리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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