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천웨이, 마하이옌] 이불도 개지 않고 빨래도 하지 않는다. 밥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밥을 떠서 아들 앞에 대령한다. 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낮 12시까지 늦잠을 잔다. “겉보기에는 어른이지만 실은 애에요.” 구량은 32세의 전남편을 이렇게 형용했다.
인구를 통제하고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중국이 1970년대 말부터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한 결과 1억명 이상의 외동자녀들이 생겨났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빠링허우 가운데 5명 중 1명은 외동자녀이며 이들 중 70%이상이 도시에 호적이 등록되어있다.
빠링허우 외동자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다. 결혼할 때 집과 차를 사고 결혼 후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까지 거의 모든 일에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경제적, 심리적인 의존으로 부모와의 구속이 긴밀해지면서 빠링허우의 결혼에 개입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결혼 전 양저우(扬州)여자 옌페이(阎菲)는 남편에게 결혼 후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없다고 공표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진정한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외동아들인 남편은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씻을 때 속옷까지 챙겨주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옌페이의 요구를 듣고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결혼 한달 후 시부모님이 갑자기 짐을 싸 들고 신혼 집 밖까지 직접 찾아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후 시어머니가 옌페이의 생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옷장 안의 옷들은 가게보다 가지런히 개여져 있어야 하고, 겨울 모직코트는 옷장이 아닌 진공수납장에 보관해야 하는 등 많은 생활규칙을 정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을 신발장에 얹었다가 “손이 지저분해지지 않니. 어떻게 신발장에 손을 얹을 수 있니?!”라며 꾸중을 들었다. 심지어는 소변을 볼 때는 휴지를 한 칸만 써야 하며 반드시 변기의자를 올려야 한다는 규정까지 있었다.
옌페이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변기의자는 남자들만 올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시어머니는 그녀에게도 그렇게 하라 시켰다. 화장실을 다녀올 때마다 “변기의자 올렸니?”라며 물었다.
이런 시간이 계속되자 옌페이는 자신이 강박증에 걸린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밤에 잠을 자다 갑자기 침대에 앉아 “변기의자 올렸니?”라며 혼잣말을 하고는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가 변기의자를 올렸다.
“우리 부모님이나 당신 부모님이나 똑같다고 생각하고 존중할 수 있어. 하지만 순종만 하지는 않아.” 옌페이는 점점 지쳐 자신이 돈을 댈 테니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더 얻어 시부모님을 모시고 한 집에는 살지 말자고 제안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너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니? 우리랑 따로 살겠다고? 나는 내 아들이랑 떨어져 살기 싫다!”며 반대했다.
중국 혼인가정상담서비스연구센터 부주임 왕쥔은 부모를 빠링허우 결혼생활의 ‘제3자’라 표현하면서 “빠링허우세대는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부모님과 이야기하는 거죠. 부모님은 무조건 자기 자식 편이기 때문에 보통 부모님이 연루되면 여지없이 문제가 오히려 악화 되요.”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을 쫓아내면 두 번까지는 부부간의 정을 생각해 사무실로 가지만 세 번째부터는 시댁으로 간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네 남편 여기 있으니 걱정 말라”며 전화를 한다. 그 후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대해 큰 편견을 가지게 된다.
왕쥔은 “내가 만났던 많은 이혼가정들은 모두 부모가 따라다니며 부부가 싸우면 시부모와 장인장모가 전화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둥베이(东北), 다른 한 쪽은 남방에 있더라도 연락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옌페이가 남편과 트러블이 생긴 것도 결국 시어머니 때문이다. 딸을 낳고 나서 시어머니는 현지의 민간요법에 따라 백반으로 주름진 부위를 닦아 습진을 예방했다. 그러나 옌페이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전에 의사와 상담한 결과 의사는 백반은 화학물질이니 송진가루나 분말 땀띠 약으로 대체할 수 있다며 시어머니의 방법에 반대했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옌페이가 남편과 백반을 쓸지 말지를 의논하는데 시어머니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화가나 손까지 떨며 “너만 잘났다고 생각하지마!”라며 “너희 날개가 굳었어. 대단한 분들 부모 노릇 한번 하기 참 어렵구나.”라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산후조리중인 옌페이가 처음으로 말대답을 했다. 시어머니는 옌페이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과 너를 이혼시키겠다!”고 했다. 그 때는 옌페이의 어머니도 방에 있었는데 당연히 딸이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날 두 어머니는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얼굴을 붉힌 셈이다.
딸이 한 살 때 옌페이의 결혼생활은 최종적으로 끝났다——결혼을 다그쳤던 것처럼 양가의 부모님은 매우 열성적으로 두 사람의 이혼을 지지하고 장려했다.
요즘 옌페이는 자신의 전남편이 원망스럽기보다 불쌍하다고 말한다. 부모님 앞에 고분고분 순종적인 외아들 ‘마마보이’는 이혼법정에 설 때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판사가 당사자들의 의견은 어떻느냐 묻자 그는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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