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푸야오(장자커우(张家口)에서)] 거우징이 자비를 들여 창업하기로 결정하기 전부터 베이징과 장자커우가 계획 중의 잠재적인 사업 하나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1994년 베이징시의 11개 지역이 장자커우시의 11개 빈곤지역과 빈곤구체를 중점으로 하는 동업지원관계를 맺었다. 경제, 기술, 근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10년기한의 동업지원을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비공식통계에 따르면 10년간 두 시의 기술협력협의는 1,100여 건에 달했으며 투자 총액은 50여 억 위안, 협력사업계약은 340여 건을 기록했고 자금조달 액수는 12억 위안을 넘어섰다.
베이징과 장자커우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베이징,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네이멍구(内蒙古) 등 4개 성의 접경지에 위치한 장자커우는 역사적으로 통상물류의 집산지이자 베이징-장자커우 철로의 종점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초기에는 장자커우는 화베이(华北)지역의 중요한 공업기지로 군수, 기계, 방직업이 번영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네이멍구 고원과 화베이평원을 잇는 중요한 교통요지이자 나아가 베이징의 북쪽 ‘대문’으로서 수도를 지키는 중요관문의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구소련의 관계가 좋지 않던 1960년대에는 정식으로 군사요충지에 들면서 상당규모를 이루던 공업과 상업이 대거 철수하고 많은 군대가 주둔하며 각종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1995년까지 자유로운 출입과 새로운 사업이 불가능했고 아스팔트도로조차 깔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개혁개방이 추진되던 17년째 해부터 장자커우 역시 조금씩 개방되기 시작했다.
장자커우는 공업발전과 인프라건설의 황금시기를 놓쳐 개방 이후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주변지역보다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 이후의 발전과정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한편 장자커우는 베이징의 ‘바람막이’이자 수원지로서 중요한 ‘천연병풍’으로 여겨져 개혁개방 후의 공업발전 역시 제약을 받았다. 자료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베이징과의 동업지원 10년동안 장자커우의 600여 개 오염유발기업이 문을 닫고 정화를 위해 상산을 중단한 기업이 280여 개에 달했으며 수익률이 높은 20여 개의 대형산업이 포기되었다.
2003년 베이징의 생태환경을 더욱 개선하고 ‘천연병풍’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장자커우는 다시 한 번 입산과 방목을 금지하고 경작을 중지하는 등 숲 복원정책을 시행한다. 장자커우의 상류에 위치한 충리는 맑은 수원으로서 황사발원관리, 생태조림 등의 국가적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10만에 육박하던 농업인구와 주민들이 가장 주된 수입원이던 목축업이 타격을 입으면서 3분의2의 지역주민들이 영향을 받았다.
목축을 할 수 없게 되자 자구책으로 양식업과 채소 비닐하우스제배 등이 행해졌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고 수년간 계속된 빈곤으로 자금과 수자원 부족이 항상 난제였다. 나무를 심고 채소를 기르는 데 물이 필요했으므로 충리는 생태조림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우물에까지 엄격한 허가제를 시행했다. 구제반의 한 간부에 따르면 “우물을 파려면 현장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허베이 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2008년까지 충리 농민들의 연간소득은 2,918위안 였다.
베이징-톈진(天津)-허베이의 지역통합과 공동발전이 추진되면서 장자커우는 ‘수원함양기능지구’인 베이징 덕에 ‘창장(长江) 이북에서 공기가 가장 좋은 곳’으로 선정되었으나 이를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향을 받은 지역은 장자커우나 충리 뿐만이 아니었다. 2004년부터 츠청(赤城)이 매년 윈저우(云州)댐의 물을 베이징으로 방류하면서 경제성장의 기반인 광산기업들이 대거 문을 닫았다. 2007년 미윈(密云)과 관팅(官厅)댐의 수량과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베이징은 허베이와 협력각서를 체결, 츠청을 포함한 허베이 세 지역에 ‘벼 해갈(稻改旱)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손실은 베이징이 면적에 따라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하였다.
지리적 우세로 이룬 ‘설빙경제’
화베이지역 최초의 스키장이자 중국 최초의 민영스키장 ‘사이베이’의 등장으로 충리의 설빙자원이사람들에게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사이베이’스키장은 중국의 유명관광명소가 되었고 관계부처와의 협력으로 베이징에서 출발하는 ‘사이베이 스기열차’가 개통되었다.
‘HoliLand(好利来)’그룹 창시자 중 한명인 뤄리(罗力) 역시 ‘스키 광’이다. 거우징은 스키장시설이 빈약하고 리프트도 없어 산 위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 직원들이 운전하는 지프차를 기다렸다 타고 올라갔다며 당시를 기억한다. “한참을 기다려야 탈 수 있었지. 나중엔 너무 짜증나서 우리 직원들한테 ‘돈 줄 테니 내 전용으로 차 한대 빌려오라’고 까지 했다니까요.”
곧이어 찾아온 사스(SARS). 퇴직 후였던 뤄리는 차를 몰고 충리 곳곳을 다니며 장소를 물색했고 5억 위안을 투자해 중국 최초의 개방형스키장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번에는 정부의 출자지원으로 2개월만에 스키장 주변의 통신, 전기, 수도, 도로시설이 완비되었다. 같은 해 연말. 시설이 완비하고 전문화된 ‘완룽(万龙)’스키장이 개장하면서 충리의 스키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3년, 대다수의 충리 주민들이 스키산업발전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완룽’에 이어 허베이성 체육국의 주도로 ‘창청링(长城岭)’스키장이 개발되었고, 2006년에는 ‘사이베이’가 이탈리아업체와의 제휴로 ‘사이베이-돌로미티’스키장을 건설하였으며, 2012년에는 말레이시아 겐팅(Genting)그룹과 엑설런스(Excellence)그룹의 투자로 ‘윈딩(云顶)’스키랜드가 정식으로 착공되었다.
베이징경제권에 속한 지역으로서 지리적 우세는 결국 충리에 ‘선물’을 안겨주었다.
거대한 관광객시장이 호텔, 식당, 팜 스테이(Farm Stay) 등 여행부대시설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통계에 따르면 2013~2014년 스키시즌 충리를 찾은 관광객 수는 142만 2천명, 여행종합수입은 9억 8천만 위안에 달했다. 또한, 외자도입으로 충리는 스키시설이 전면 개선되고 ‘스키도시’의 면모를 갖추며 국제화 단계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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