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베이징 사범대학 예술학과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뤼졘민은 “영화를 제작할 때는 잘 찍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를 파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마케팅과 배급으로 집을 일으켰다. 1998년 푸저우(福州)에서 하던 부동산사업이 실패하고 혼자 베이징으로 올라와 뜨내기 생활을 하는 중 친구를 통해 독일 바이에른 영화사가 중국영화판권을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사가 그에게 중국 영화에 대해 아느냐 물었다.
그는 “정말 몰랐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며 “당시에는 영화 보는 사람이 없었고 나도 그랬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그에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곧 상업적인 기회를 의미했다. 외국의 기자 한 명이 그에게 지아장커(贾樟柯) 등 제6세대 감독들의 작품을 강력히 추천하면서 베를린영화제 수상작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독일이 중국영화에 관심이 있다는 생각에 바로 영화를 보냈다. 독일의 반응은 의외였다. “뤼선생님. 우리가 찍으려는 영화는 전문가들에게 보여줄 영화이지 일반 관객들에게 보여 줄 영화가 아닙니다.”
그는 호기심으로 영화들을 보다가 ‘소외된 계층’의 주인공에서 공감대를 찾았다. 제6세대 감독들의 나이와 경험, 생각이 자신과 비슷했다. 뤼졘민은 역시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많은 고통을 당한 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읍내에 서 일하면서 문학잡지 <포성문예(浦城文艺)>에 투고를 했다.
1985년 푸졘(福建)성 문학 예술연합회(文联)의 작가반 제2기를 수료한 후 푸저우에서 신문사, TV 방송국에 글을 쓰며 생활했지만 호적도 직장도 없었다. 1990년대에야 광고회사를 차린 후 또 부동산 매매를 하기 시작했다.
뤼졘민에게는 ‘사업가’와 ‘문예청년’ 두 역할이 재미있게 합쳐져 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언더그라운드영화를 팔기로 결심했다. 당시 영상물 마케팅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포스터를 만들어 줄거리를 적어 전국으로 보낸 다음 주문 받는 만큼 생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뤼졘민은 그런 영상제품을 주문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상업적으로 영화를 포장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무산운우>가 나왔을 때 그는표제에서 작품의 특징을 찾아 연인 한 쌍이 함께 안고 있는 나체사진을 찍어 포스터로 제작하고 옆에 ‘중국 영화등급 작품’과 함께 “8년간 금지된 사랑을 다시 만나는 날(被禁八年,重见天日)이라는 홍보문구를 넣어 ‘야한 영화’인 것처럼 포장했다. 영화는 흥행을 했고 DVD가 순식간에 50만장이 팔려나갔다——일반적인 방법으로 홍보 했다면 500장도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뤼졘민은 “감히 말씀 드리자면 중국 독립영화 마케팅도 제가 하기 시장한 겁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그는 같은 방식으로 시장성이 없는 영화를 하나하나 팔았다. 루쉬에장(路学长)의 <어른이 되다(长大成人)>, 성즈민(盛志民)의 <마음(心心)>, 리위(李玉)의 <물고기와 코끼리(鱼和象)>. 왕샤오솨이(王小帅)의 <봄을 기다리는 날들(冬春的日子)>, 리양(李杨)의 <망정(盲井)> 등의 작품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팔렸다.
제일 명성이 높을 때는 거의 모든 제6세대 감독들의 작품의 마케팅을 맡았으며 이름 모를 감독들까지 매일 전화해 식사나 차를 권하며 도움을 청했다. 뤼졘민은 배급 외에도 영화 생산과 제작에도 점차 참여하기 시작했다. 쟈장커 감독은 그에게 “협력해 본 적은 없지만 독립영화 발전에 아낌 없는 공헌과 도움을 주셔서 대표로 감사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2002년 후 중국의 영화 정책완화로 일부 ‘언더그라운드영화’가 공개적으로 상영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사제품시장의 내림세가 시작되면서 언더그라운드영화의 판매가 점점 어려워졌다. 가장 충격이었던 일은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중학교 교사인 외삼촌이 그에게 어떤 영화를 팔고 있느냐 물어 득의양양하게 많은 수상작들을 소개했는데 외삼촌이 “들어본 영화가 하나도 없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영화는 관중들에게 보이기 위해 만드는 것인데 계속 이렇게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영화가 수상을 했다 쳐도 해외로 배급하고 DVD를 팔아봤자 본전도 못 찾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에는 ‘벤츠’였는데 몰다 보니 ‘샤리(夏利)’가 되어 버렸다.”라고 자조하곤 한다.
몇 년 후 극장을 찾는 중국 관객들이 점차 늘어나고 상업영화가 중국영화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일부 중등 자본영화들도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는 데 이상이 있어야 하지만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죠.” 뤼졘민은 상업으로 전향해 차세대감독을 기용해 재미있는 중소자본 상업영화를 제작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 2008년 그는 저우싱츠(周星驰)영화에 1천만 위안을 투자해 린즈총(林子聪)을 상대역으로 캐스팅해 코미디영화 <대사희(大四喜)>를 찍었다. 그러나 경험부족으로 공동 제작한 영화는 심의문제에 걸렸다. 남자주인공이 세 명의 아내를 둔 영화가 어떻게 심의를 통과하겠는가? 대륙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3명의 아내를 여동생으로 바꾸면서 영화 전체가 완전히 바뀌었고, 결과는 참패였다. 그 후 뤼졘민은 또 다른 코미디영화 <식탐왕(大胃王)>에 투자했다. 궈더강(郭德纲), 왕바오챵(王宝强), 판장쟝(潘长江)을 캐스팅했으나 한 투자자에게 파토를 맞았다. 그는 영화의 실패 원인을 ‘규범화 되지 않은 시장과 많은 업계 종사자들의 소양부족’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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