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옌다이(巴彦岱)>, 위구르족 사람의 마음 세계로 들어가다
- 이 영화는 왕멍(王蒙)이 신쟝(新疆) ‘노동단련(劳动锻炼)’ 시절에 있었던 경력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이다. 제작사는 이 영화를 통하여 ‘위구르족 사람의 마음 세계’로 들어가고자 했다.
-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3-28 12:16:02
[기자/완쟈환] 1965년 베이징에서 다시 공민권을 얻은 우파 로우왕(老王)은 신쟝 이닝시(新疆伊宁市) 외곽에 있는 바옌다이(巴彦岱)에 가서 ‘노동단련’을 하도록 명받았다. 현지 서기 뤄청(罗成)은 그에게 검은 테 안경을 건네주고 담소를 나누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쟝에 왔다. 내가 바로 조직부에서 새로 온 젊은이입니다! ”
이것은 영화 <바옌다이> 중의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쉽게 이 영화의 한 장면이 작가 왕멍(王蒙)에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멍은 바로 극중 ‘로우왕’의 현실인물이다. 왕멍은 1956년 <조직부에서 새로 온 젏은이>를 발표한 후 ‘우파’로 분류되어 신쟝에 오게 되였다. 그 후 16년을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하나의 문화가 다른 하나의 문화를 인정하는 것’
2013년 5월 23일, 79세인 왕멍은 다시 한번 신쟝 바옌다이 마을을 찾아 ‘왕멍책방(王蒙书屋)’의 개막식에 참석하였다. 무대에 올라선 그는 완벽한 위구르어로 말을 하였다. “신쟝 친구들은 나에게 한없는 온정을 베풀었다. 나는 영원히 신쟝의 왕멍이다. 나는 영원히 당신들과 함께 있다.”
개막식에 참석하러 현장에 온 100여 명의 위구르족 농민들은 매우 감격해 했다. 1960년대 그들은 왕멍과 같이 생활하고 노동을 했다. ‘대대장’, 그들은 지금도 왕멍을 예전처럼 그렇게 부른다.
언어는 왕멍이 현지 주민들의 우정과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다. 신쟝에 온 후 그는 노동하는 것과 가족을 만나는 것 외에는 모든 시간을 위구르어를 배우는데 바쳤다. 그는 미친 듯이 위구르족과 관련된 모든 서적을 읽고 위구르족의 장례, 파티모임에 참석하여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며 농민들의 어려움을 귀담아 들었다. 몇 개월 후 왕멍은 생산팀 회의에서 위구르어로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신쟝 사회문제에는 여러 사회 원인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위구르족과 한족 사이에 교류가 적다는 것이다. 지금 신쟝 농촌에서 일하고 있는 한족은 거의 위구르어를 하지 못한다.” <바옌다이> 총 프로듀서 리더화(李德华)가 <중국신문주간>에게 알려준다. 건국 후 왕쩐(王震)이 신쟝 정무를 주관 할 때 신쟝에 가는 한족 간부와 전사들 중 위구르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행정 등급을 한 단계 상승시켜 주었다. 지금은 이 정책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리더화는 왕멍의 신쟝 바옌다이에서의 경력은 한 편의 영화로 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왕멍의 신쟝 생활은 1963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에 <청춘만세(青春万岁)>가 출판 되지 못하고 있었다. 왕멍은 정치형세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문학계에서 ‘완전 봉쇄’ 당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 중심과 거리를 두고 먼 신쟝에 가기로 결심했다.
1년 후 그는 우루무치(乌鲁木齐)에서 이리(伊犁) 바옌다이에 가서 노동단련을 하면서 위구르족 최하위 계층의 농민생활에 녹아들려고 했다. 그곳에 7년 동안 있으면서 왕멍은 줄곧 농민의 집에서 살았다. 매일 현지 사람들과 같이 낭(馕)을 먹고 같이 곡괭이(위구르족이 사용하는 철제 농기구의 일종)을 사용하고 함께 110㎏이 넘는 포대를 들었다.
그 당시 그에게는 작은 카메라가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은 왕멍의 책방에 진열되어 있다. 사진 속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는 <바옌다이> 감독 둥링(董玲)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사진을 보면 사진 속의 사람들은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감독이 보기에는 그 당시 왕멍은 ‘밝고 찬란하고 혈기가 왕성하였다.’ 신쟝에 대한 무한한 열정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왕멍은 위구르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위구르춤도 배웠다. 그는 농민들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위구르족을 위해 지붕을 수리하고 주민들의 갈등도 해결해 주었다. 마을에서 걷다 보면 항상 마을 주민들이 그한테 낭과 고구마 등을 건네 주었다. 왕멍의 말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한 민족이 다른 한 민족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한 문화가 다른 한 문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순박하여 종족간의 마찰과 폭력사태는 없었다. 그 당시의 정치환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위구르 빈곤계층은 보편적으로 많은 권력과 이익을 받았고 새로운 정부에 좋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사회 모순도 주로 계급투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리더화는 그때 당시 두 민족문화가 서로 융합하고 기층 위구르족 인민과 한족이 ‘한 집식구’처럼 지내는 것을 반영하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는 왕멍보다 적합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과 구상은 이닝시 정부의 인정을 받아 프로젝트도 빨리 진행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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