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의사 부시에르의 특별한 중개인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7-29 10: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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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에르와 우스단의 결혼사진
[기자/저우펑팅] 1915년 6월 “중화민국의 4대 원로’중 하나인 리스청 등이 ‘성실히 일하고 아껴 공부해 노동자의 지식이 되자(勤以做工、俭以求学,以劳动者之智识)’는 주장과 함께 파리에 ‘파리유학생 근로장학회(留法勤工俭学会)’ 조직을 제안하면서 기세 등등한 ‘파리유학생 근로장학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부시에르 역시 친구 호르몬의 제안으로 동참해 중법(中法)대학 프랑스분야의 이사를 맡았다. 그는주중(驻中) 프랑스대사관에서 높은 직급과 의술로 외국관료들의 존경을 받으며 프랑스인이 나서야 할 일을 거의 다 주관하였다. 


1919년 3월 17일 1기 근로장학생 89명이 상하이(上海) 황푸(黄浦)강 부두에서 출항하는 일본 이나바(因幡丸)호를 타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1919년부터 1920년까지 17팀 2천 명 가량의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로 근로장학유학을 떠났다. 그들 중 많은 혁명선구자와 신(新)중국 창시자가 배출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덩새오핑(邓小平)이 있다.


당시 부시에르는 프랑스유학생들의 건강검진 책임자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프랑스의 중국교육회를 대표해 추천서를 발급하는 일을 하면서 저우언라이 등 인사들과 교제하며 친구가 되었다.


브시에르가 정원에 있는 망루 1층 철문의 문미에는 돌로 만든 작은 현판이 벽에 박혀있고 위에는 리스청이 쓴 ‘济世之医(제세지의-세상을 구한 의사)’ 네 자가 쓰여있다. 부시에르는 직위가 높고 명성과 위세가 대단할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그는 정원 산비탈에 있던 방어용 망루를 주민들을 위한 진료소로 개조해 주민들을 진료하였다.


1932년 교육부의 허가로 설립된 상하이 진단(震旦)대학 의과대학에서 부시에르를 초대 학장으로 초빙하였다. 부시에르는 학장으로 있는 6년 동안 중국 의학계에서의 지위를 마련하였다. 신(新)중국 설립 후 진단(震旦)대학 의과대학은 다른 의과대학과의 합병으로 상하이 제2 의과대학(현재 교통대학교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의학계의 수 많은 전문가와 학과대표들을 영입하였다.


2차세계대전때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정원에서의 떠들썩한 사교생활은 어쩔 수없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부시에르는 중국인들과의 교류와 소통을 멈추지 않았다. 


부시에르가 정원과 핑시(平西)항일활동기지가 맞물려 일본군은 쉽게 프랑스인을 수색하지못했고, 부시에르는 친구의 위임을 받아 핑시기지에 필요한 약품을 비밀리에 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그가 있던 베이징과 시산(西山) 두 지역의 저택이 핑시와 베이핑의 비밀 접선장소가 되었다. 부시에르의 비밀임무는 상당히 오랜 기간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자료에만 간간히 기록되어 있다.


<북평인민 8년항전(北平人民八年抗战)>이란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하당 황하오(黄浩)가베이핑 시산을 통해 약품을 운반하는 것을 도왔던 사람 중에는 프랑스의사 부시에르도 있었다. 그는 50이 넘은 나이(나이가 틀렸다. 

 

부시에르는 1940년에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다)에도 베이징 시내에서 먀오펑(妙峰)산까지 수십 리(里)의 거리를 수십 근(斤)무게의 약품을 자전거로 전달했다. 훗날 그는 시트로엥 자동차를 구매해 자신의 차로 약품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약품전달뿐만 아니라 국민 혁명군 제팔로군(八路军)의 수술까지 비밀리에 직접 했다. 


하루아침에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다


공산당은 항일전쟁에서 승리 후 내분이 일었다. 1948년말 산시로 가는 길이 끊어지고 동교민항(东交民巷)의 외교사절단 민심이 흉흉해 프랑스대사관이 중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국민들에 철수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부시에르는 자신을 진짜 중국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유창한 중국어는 물론 봄, 여름, 가을로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부채를 부치는 완벽한 베이징 토박이였다 그는 베이징을 떠나지 않고 중국에서 생을 마칠 생각으로 친구 호르몬과 함께 산시에 묘지까지 샀다.


부시에르가 베이징을 떠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시국이 불안하기는 하나 새로운 정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천이(陈毅) 등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프랑스로 근로장학유학을 떠날 때 그들의 사전 건강검진을 담당했으니 그들과 오랜 친구인 셈이다. 


부시에르는 친인척에게 보낸 편지에 “이곳은 의사와 약이 부족합니다. 나는 환자들을 떠날 수 없고 직책도 있고 해서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그의 인생에 ‘제2의 봄’을 맞은 해였다. 10년 정도의 연락과 교제 후 1952년, 당시 80세이던 부시에르는 28세의 중국아가씨 우스단(吴似丹)과 혼인신고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생각처럼 좋지 않았다. 프랑스가 1950년대까지 계속해서 중화민국을 인정하면서 베이징에 남은 프랑스대사관이 외교지위를 상실하고 부시에르 역시 교수와 의무직원의 직무를 박탈당해 개인진료소의 의사 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많은 지인과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 진료를 받았고, 베이안허(北安河)일대의 주민들도 병에 걸리면 여전히 시산의 부시에르가 정원을 찾았다. 


악재가 이어졌다. 건국 후 체포된 수 차례 간첩사건의 주인공들과의 교류가 너무 긴밀했던 것이다. 1954년 6월 82세의 부시에르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위생국(卫生局)에 의사면허증을 취소당하고 중국에 거주하는 합법적인 신분을 의심받은 것이다. 


부시에르에게는 중국국적을 따거나 떠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그 해 7월 부시에르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중국을 제2의 조국으로, 중국인들을 같은 국민으로 생각하며 나 스스로가 중국이라는 나라에 어울리는 손님이라 생각합니다. 

 

이곳에 나의 모든 재산과 가장 소중한 감정들이 있습니다…시골에서 나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곳을 떠나기 싫습니다. 중국이 외국의 침략, 즉 우리 공공의 적의 침략에 저항할 때 나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군 검문소를 건너 약품을 조달하고 공산당 전사들을 치료하고 수술하였으며, 그들을 시골집에 숨겨주었습니다. 

 

가장 큰 위험을 무릅쓰고 도시의 정보원을 내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외에 나는 의사로서의 마땅한 책임만 다해야 할 뿐 다른 어떤 일에도 관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인으로서 부시에르는 프랑스국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의 끝자락인 82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갔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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