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의사와 근대 중국의 은밀한 과거
- 100여년 전 부시에르(Bussiere)와 같은 프랑스의 학자, 외교관, 군인들이 동방고국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품고 ‘달처럼 먼 중국’을 찾았다. 그들은 중국에 기술과 선의를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무의식 중에 중국의 복잡한 역사에 개입하면서 중국 ‘3천년 역사에 없던 큰 변혁’을 직접 경험했다. 신(新)중국이 수립된 후 그들은 암울하게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중국에서 점차 잊혀졌다. 최근 다큐멘터리영화 <부시에르가 정원의 과거(贝家花园
-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7-29 10:27:37
[기자/저우펑팅] 역사에 잊혀진 지 반세기 만에 부시에르가의 화원과 주인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작년 중국과 프랑스의 수교 50주년 기념총회에서 중국 시진핑(习近平) 국가주석은 반세기 전의 프랑스인 한 명을 특별히 언급하며 “우리를 수 많은 프랑스인들이 중국 사업발전을 위해 중요한 공을 세웠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전거 ‘육봉노선’을 개척해 귀한 약품을 중국의 항일기지로 운반해 준 프랑스의사 부시에르(Bussiere)가 있었습니다…” 1954년 조국으로 송환된 프랑스 의사 부시에르눈 반세기 여 만에 공신(功臣)의 모습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고 중국과 프랑스간 우호의 중요한 부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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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의료활동을 하며 세상을 구한 부시에르(Bussiere). 사진/취재원
제공 편집/허시위 |
부시에르가 정원의 수요일
1913년 중국에 온 후 42년 동안 부시에르는 청말, 민국, 항일, 해방을 겪으며 중국 ‘3천년 역사에 없던 큰 변혁’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으면서 중국에서의 명예와 재산, 사회적인 지위와 함께 한 젊은 중국여인의 사랑을 얻었다.
부시에르는 외과전문의로 베이징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허리의 악성종기로 생명이 위독한 중국 관원의 종기제거수술을 집도해 관원이 두 달 만에 회복되었다. 이 일로 당시 서양의학에 대한 의혹을 품고 있던 중국관원들 사이에 파문이 일었고 부시에르는 베이징 상류층인사들이 앞다투어 모셔가는 서양의사가 되어 순중산(孙中山), 리위안홍(黎元洪), 돤치뤼(段祺瑞),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을 진료했다.
부시에르는 ‘황제의 의사’라 불렸다. 그는 위안스카이(袁世凯)의 의료고문으로 지내면서 위안스카이가 친히 수여하는 3등문호 훈장을 받았다. 3등문호 훈장은 1912년말 설립된 훈장으로 공적이 뛰어난 육군 및 해군장병을 표창하였으나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것은 대통령 만의 특권이었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요독증으로 생사의 고비에 있을 때 부시에르가 마지막으로 수술을 했다.
부시에르는 의사와 함께 중국과 프랑스 정부의 여러 공직을 겸했다. 남아있는 자료에 따르면 베이징대학 의무직 월급만 해도 당시 은화 200에 많은 고문, 의관, 원장, 교수직까지 더하면 그의 월 소득은 천문학 적인 액수였을 것으로 추축된다.
부시에르의 이름은 장 제롬 오귀스탬 부시에르(Jean Gerôme Augustins Bussiere)로 1872년 프랑스의 산촌 오베르뉴시에서 태어나 해군의학원을 졸업해 의과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군의관의 신분으로 인도, 페르시아 등 프랑스의 아시아 및 아프리카 식민지를 다녔다. 영사관 의관으로 중국을 찾은 것은 1913년.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부시에르는 호탕한 사람이었다. 매주 수요일이면 영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다톈수이징(大甜水井)16호의 자택에 살롱을 열어 중국과 프랑스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음식, 다과, 술과 담배를 준비해 적게는 3~5명에서 많게는 열 명이 넘는 손님을 초대했다.
전(前) 주중프랑스대사 마오레이(毛磊)는 브시에르의 살롱을 이렇게 그렸다. “모두들 만나 인사를 하며 근황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베이징 내부의 상호기만과 외부 성(省)의 형세변화 등 위기에 있는 나라에 한 주간 일어났던 중대한 사건들과 여행, 활동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월간지 <북경정치(北京政治)>에 난 소식으로 누가 가게 되었고 왔는지 정보를 공유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프랑스 문학가 스갈랑(Segalen), 한학자 호르몬(Hormon), 외교관 알렉스 라거(Alex Leger)를 비롯해 중화민국의 여러 유명인사, 특히 프랑스를 방문하거나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총리와 외교총장을 지낸 순바오치(孙宝琦), 중화민국 대총통 대행 보좌관과 외교총장을 지낸 루정샹(陆征祥), 롱링(容龄)과 그녀의 언니 더링(德龄) 등 베이양(北洋)정부요원, 그리고 순중산을 지지하는 국민정부동맹회(国民政府的同盟会)의 원로 차이위안페이, 리스청(李石曾), 왕징웨이(汪精卫) 등도 포함되었다. 살롱에 참석한 양국의 엘리트들은 중국의 역사를 바꾼 ‘근로장학(勤工俭学)’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3년 부시에르는 베이징 시산(西山)지역에 중국식과 서양식을 접목한 아파트단지를 직접 설계해 건축했다. 단지는 크게 유럽 성 스타일의 석조건물 한 동, 중국식 식당과 음식점 5개, 중국식과 서양식을 접목한 2층 건물과 정원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주민들이 “부시에르가 정원’이라 부르던 이 단지는 베이징 시내에서 시산까지 말을 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어 당시 대사관지역 주민들에게는 신비의 존재였다.
그 후 ‘수요살롱’의 장소가 베이징에서 시산의 부시에르가 정원으로 점차 옮겨지면서 시산 역시 양국 엘리트들의 중요한 모임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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