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에르가 중국에서 얻은 영예를 후손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7-29 10: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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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집에서 유물을 정리하고 있는 부시에르 아들 루이 사진/취재원 제공

 

[기자/저우펑팅] 1954년 10월 중국을 떠날 때 부시에르에게 허가된 돈은 30달러였다. 골동품 다섯 상자는 세관에서 반출이 금지되어 지금까지 프랑스 대사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가 가져간 물건은 원고, 사진, 휘장, 증서, 편지 그리고 몽고 종달새가 든 새장 하나였다.

 

저우언라이의 특별허가로 아내 우스단은 함께 갈 수 있었다.프랑스로 돌아온 부시에르는 경제적으로 궁핍해 우스단과 함께 오베르뉴의 샤트라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오베르뉴는 부시에르가 나고 자란 곳으로 인구가 4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촌이다. 60년 전만 해도 번화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가난하기 그지없다. 인생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아내 우스단은 보인(辅仁)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한 명문가 출신으로 시중 받는 것에 익숙한 아가씨였다. 그러나 그녀는 장작 패고 농사짓는 생활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고 나이 든 부시에르도 돌보아야 했다. 둘은 작은 나무집을 짓고 정착했다. 문 앞으로는 강이 흘렀다. 아들 루이(Luis)는 어머니가 베이징의 시산 같다며 앉아서 먼 곳의 산을 바라보기를 좋아하던 것을 기억한다. 


부시에르가 세상을 떠난 1958년. 우스단은 34세, 루이는 3세였다. 그 해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일어나 우스단과 베이징에 있는 가족들과의 연락이 점점 어려워졌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중국영화에 나오는 중국 화면과 중국 음악에 우스단은 목놓아 실컷 울었다. 


오베르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혼혈아 루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친구들 모두루이를 ‘쁘띠 마오(‘마오저둥’을 이르는 말)’라 놀렸다. 다행히 루이는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로 선택하고 15세의 나이로 해군의과대학에 합격해 오베르뉴를 떠난다.


우스단은 8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은 생에 그들의 마지막 집을 지켰다. 그녀는 내성적이고괴팍해 외부인과의 왕래가 매우 적었다. 부시에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그림을 팔고 잡일을 하며 번 돈으로 집안에 보탰다. 아들에게는 중국어를 배우지 않게 하고 중국의 옛날 이야기도 거의 해주지 않았다. 


최근 시산 산자락 주민들은 부시에르가 정원의 이전 주인이 프랑스인이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내력이 어땠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반세기 동안 이 격변의 역사는 그렇게 점점 잊혀져 가고 버려진 정원만 범상치 않았던 지난 날을 어슴푸레 보여주고 있다. 정원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문과 창은 벽돌로 막히고 안은 비가 새며 무너져 가고 밖은 잡초들이 무성하다.


2013년 5월까지 부시에르가 정원은 베이징시 명성위원회 판공실(名城委员会办公室)이 지정한 보호시범지점으로 하이딩(海淀)구 정부의 주관으로 새롭게 보수되었다. 2014년 4월 루이가 처음 시산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처음 만나 사랑하고 함께 생활했던 곳으로 들어갔다. 


루이가 베이징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 프랑스를 방문중인 시진핑 중국국가주석이 특별히 그를 만났다. 자료를 정리하던 중 루이는 1953년 아버지가 적어 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방금 자료들을 읽어 보았는데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미 이런 어수선함에 익숙되어 있다.


이 서랍을 닫으면 영원히 다시는 열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 자식이나 손자들은 언젠가 이것들을 다시 보면서 이 안에 소중히 간직된 내가 오랜 세월 중국에서 얻은 작은 영예를 알게 되겠지.”

 

[저작권자ⓒ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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