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위하이양] 유럽단일화의 흡입력이 이렇게 컸던 이유는 ‘석탄철강공동체’의 성과가 처음 보이기 시작했을 때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벨기에, 서독 등이 모여 ‘메시나 회의’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영국은 상황이 좋지 않아 처칠 시대의 낙관적인 태도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영국연방이자 유럽대륙과 미국 간의 유일한 소통경로라 보았기에 경제적으로는 영국연방시장을 자신의 기본 판으로 보았다. 유럽의 정치, 경제적인 독자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영국연방의 관세동맹이 해체될 우려가 있으니——영국이 어찌 기쁠 수 있겠는가.
‘유럽공동시장’을 마련하자는 ‘슈만계획’에서 안보상 서독을 다시 받아들이자는 ‘플레벤계획’까지 영국은 모두 냉대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다시 부상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잃을 것을 걱정하면서도 영국의 오만함을 거듭 용인하며 영국이 협상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영국은 유럽에게 “대영제국은 세계적인 국가이지 유럽국가가 아니다.” 라는 입장을 몇 번이고 표명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프랑스는 성격 나쁜 드골 대통령을 교체하고 독일과 신속히 가까워 짐으로써 유럽단일화 후 50년 구도를 마련하였다.
1957년 3월 25일 프랑스, 연방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 정부지도자와 외교부장관이 로마에서 역사적인 <유럽경제공동체건립조약》(<로마조약>)을 채결하면서 영국은 비로서 철저히 고립되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훗날 드골(De Gaulle)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영국 해럴드 맥밀런이(Harold Macmillan) 수상이 파리를 방문해 갑자기 격앙되어 ‘공동시장’, 그러니까 대륙봉쇄정책을 선포했다. 영국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포기하시지.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번 전쟁은 경제전쟁으로 시작되지만 경제에 이어 다른 분야로 점차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평생 군인이었던 드골 대통령은 위협을 느꼈고 유럽대륙과 영국의 관계는 전에 없는 대립단계로 들어섰다. 영국을 <로마조약>에 대응하기 위해 1960년 1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등 6개국과 협정을 체결해 ‘유럽자유무역연맹’(EFTA)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연맹은 경제규모가 <로마조약> 회원국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고 지리적으로도 가깝지 않으며 유럽공동체(EC)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선천적인 결함이 있었다. 결국 영국의 노력은 무산되고 연맹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다. 영국은 심각한 경제와 제국공동관세동맹의 축소로 궁지에 몰려 1961년 8월 9일 EC가입을 정식으로 신청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고질병에도 불구하고 신청서의 추가조건이 매우 많았다 크게는 EC가 경제분야를 벗어나지 않는 것에서부터 작게는 EC가 영국연방의 파트너들을 돌보는 것까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드골 대통령은 다시 한 번 크게 분노하며 “영국은 미국을 유럽으로 끌어들인 ‘트로이목마’”라고 비난했고 영국의 EC 가입이 10년 늦춰졌다.
10년동안 영국은 세 차례의 정부교차를 거치면서 매 정부마다 신청태도가 겸손해 지고 드골 대통령의 두 차례 모진 반대와 더불어 EU의 까다로운 조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1970년 완벽한 친 유럽 인사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가 영국수상에 당선되고 드골 대통령의 사직과 함께 그의 후임 퐁비두(Pompidou)가 영국을 가입시켜 서독과 EC내 확장세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면서 영국은 비로소 EC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영국이 10년간 유럽을 추종해 왔다고 영국이 유럽단일화 과정을 크게 내켜 했다고 단언 할 수 없다. 영국의 EC 가입과정을 되돌아보면 2차세계대전이후 영국경제의 장기쇠퇴와 대영제국의 해체가 EC 가입의 주요 원인이었다.
영국은 곤궁해진 부잣집 아가씨처럼 그 취향과 성격이 변하지 않고 EC 역시 벼락부자의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감정적인 공감 보다는 정황상 어쩔 수없이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영국은 10년동안 드골 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매몰차게 거절 당한 수치를 깊이 낙인 찍었다. 히스 수상은 당 내에서 반(反)유럽 화제의 토론을 엄금하는 등 당의 기율을 활용한 제약을 통해 비로소 EC의 문을 열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EC가입은 영국경제의 당연한 선택이다. 현재 영국 해외무역의 50% 이상이EU와 이뤄지고 있으며, 10대 무역파트너 중 8개가 EU 회원국이다. 그러나 영국이 가입한 후 EC-EU와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상태였다. 가장 친 유럽파인 히스 수상에 이어 가장 반(反)유럽파인 대처(Thatcher)가 집권하면서 영국은 정치적으로 EU와 거의 단절되었다.
대처 수상은 유명한 반(反)EU 브뤼허 강연에서 EC에서 EU로의 전환을 “뒷문으로 사회주의를 수입하는 것”이라 평가하면 유럽연방주의, 정체경제연맹 또는 영국의 주권을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조치도 반대한다고 표명하였다. 명백히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좌익정부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만약 소련이 갑자기 해체되지 않아 ‘대처-레이건(Thatcher-Reagan)주의’가 혁혁한 명성을 날렸다면 프랑스, 독일과 영국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91년 12월 9~10일 <마스트리흐트조약>, 즉 <유럽연맹조약>이 네덜란드에서 체결되었다. EU의 성립은 유럽단일화가 경제분야에서 정치, 사회 등 더욱 깊은 차원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EC가 경제공동체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영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많은 영국인들은 EU가 철저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입장을지키기 위해 영국은 담판 중에 1945년부터 시작된 책략을 사용하였다——끊임없이 등장하는 반대의견을 사용해 담판을 지연시켜 다자간조약에서의 예외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영국은 독립통화와 독립된 사회정책을 보류하였으나 금융 및 사회분야에서의 발언권은 상실했다. 이것은 자신이 EU를 탈퇴하면 EU가 앞으로 세세한 법안 하나하나를 통해 서서히 ‘독립’을 잠식할 것임을 알기에 선택한 영국의 어쩔 수 없는 타협이다.
1996년의 ‘노동시간지령’위기는 영국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메이저(Major)정부는 영국이 <마스트리흐트조약> 체결 당시의 사회조항 예외권을 인용해 EU가 영국국민들의 노동시간을 강제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유럽법원은 EU집행위원회의 월권조치가 아니라 판결하였다.
메이저는 유럽법원의 판정을 끝까지 보이콧하였으나 이에 따라 영국은 ‘국민들의 피와 땀을 흘리는 공장을 지원한다’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결국 영국은 EU와 동일한 노동시간표준을 적용하되 시행은 자체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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