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펑(汪峰)의 성공학 (6)

그는 "직업가수이자 예능인으로서 점점 잘하고 싶어요. 수입원도 필요하고 돈도 있어야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모든 생각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이야기 해요."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5-28 1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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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펑은 “돈과 재물을 대하는 자신 만의 태도와 추구하는 바가 있다면 재물은 전혀 해롭지 않아요.더 좋죠’라며 “너무 궁핍하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너무 궁핍하고 가난하면 심령의 연단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는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더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가 큰 시련이잖아요. 개인적으로는 그 정도 되니까 곡을 쓸 때 저를 포함해서 제 주변 사람들이 원망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라고 고백한다.


매일 번잡한 매니저업무를 처리하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공연도 많지 않아 매일같이 곡을 쓰고 연습했다. 따라서 당시 많은 시간을 자신이 왜 그렇게 엉망으로 살아왔는지 생각하며 지냈다. 그는 자신이 ‘차를 잘못 탔다”고 생각했다. 그가 하는 음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이상한 음악시장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음악학원 정규교육과정을 수료한 학생으로서 그는 비정규적인 방식으로 음악을 하는 예루즈(野路子)의 록 가수처럼 자포자기하기나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대신 음악적인 아름다움과 다양성, 중국의 시대적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사를 추구하며 역전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였다. 


Warner 음반사 쉬샤오룽(许晓峰) 중국지사총재가 왕펑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차오양(朝阳)공원 근처 식당에서 만나 40분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쉬 총재가 왕펑에게 두께가 몇 센치미터 되는 영문 계약서를 건넸다. 어떻게 보면 이 40분이 왕펑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2개월의 고민과 생각 끝에 왕펑은 여러 해 동안 함께한 밴드동료들을 떠나 홀로 Warner 음반사에 가입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배신의 오명은 반드시 져야 할 ‘원죄’라 생각했다. 성공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Warner 음반사에 입사한 후 발매한 첫 번째 앨범 <하나비>는 왕이가 그의 개인명의로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타이완 풍의 앨범이름을 사용하고 표지디자인도 눈에 띄게 밝고 아름다워졌다. 왕이는 당시 성공에 대한 절실함을 이렇게 기억했다. “이 앨범은 된다, 이 곡은 분명히 뜨리라 생각했어요. <하나비>, <아름다운 세상의 고아>, <청춘(青春)> 같은 곡들이 안 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제 자신에게도 이렇게 이야기 했고요. 제 스스로를 응원하는 차원에서도 잘 될 거라고 얘기해야 했어요.” 


그때부터 왕펑은 공식적으로 자신을 ‘예능인’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까지는 통보와 연출도 있었으나 음악가에 가깝다는 생각에 연예계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렇게 제 자신을 보는 것이 제 일과 사장님과 동료들을 비롯한 주변 직원들을 존중하는 것 이더라고요. 남이 저를 전형적인 예능인으로 본다고 제 독립적인 인격과 개성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런 개념이 있는 모든 것은 약하죠.” 수년 후 왕이는 이렇게 기억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위치를 분명히 알고 성공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전 작품들의 감동을 유지하면서도 타협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연을 할 때 반드시 밴드와 함께 할 것을 요구했는데 “후에는 이 조건을 고집하다가는 공연의 기회 80~90%가 없어 지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혼자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그는 “직업가수이자 예능인으로서 점점 잘하고 싶어요. 수입원도 필요하고 돈도 있어야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모든 생각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이야기 해요’라고 덧붙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왕펑은 승승장구하며 몸 값과 지명도가 크게 오르기 시작했고 많은 공연과 CF에 출현했으며 훌륭한 공연의 선두주자가 된 한편, 전 국민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 전 부인과 전 여자친구의 폭로 속에서 결국 장쯔이에게 프러포즈를 성공하였다.


왕펑은 예술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이를 위한 모든 대가를 치렀다. 요즘에는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해 상업적인 공연 외에도 매년 수 십 차례의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매년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과 맞먹는다. 

 

그는 항상 불안하고 두렵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한다고 단언한다. 단지 지금은 어쩔 수없이 예전이나 자신의 노래가사처럼 한동안 멈춰 서 있을 뿐. 가끔 아내 장쯔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면 상영관의 불이 다 꺼져 어두워진 후 마스크를 쓰고 조심조심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담배 한 대라도 피우려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 때문에 자신의 자주색 Rolls-Royce 창문을 통해 자신이 노래했 전 베이징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수습기자린샤오펑(林晓岚), 이옌징(李若晶), 왕환위(王焕宇)가 기사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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