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신: 바오펑(暴风) ‘몬스터주’를 만든 남자 (3)

“청춘은 소모하는 것”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6-29 09: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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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위안루] 은둔시기 불혹의 나이였던 펑신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펑신은 1993년 대학졸업 후 고향의 광무국(矿务局)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업무는 각종 증권신문을 읽은 후 선물과 증권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매주 금요일 오후 마다 한 시간 동안 임원에게 보고하고 중국 주식시장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자유스럽지 못한 상태에 구속감을 느낀 펑신은 몇 개월 만에 광무국을 나와 타이위안(太原)에 있는 대학동창을 찾아갔다. 회사를 등록해 호출기수리, 석탄운송, 식품무역 등의 사업경험이 있는 친구였다.

“그때는 아무런 목표 없이 그저 미친 듯이 놀았죠.” 젊었기에 펑신은 마음껏 청춘을 소모했다. “후회는 없어요. 청춘은 소모하는 것이니까요.” 1996년 그는 몸싸움 중에 다쳐 반년 동안 입원했다. 그 해 여름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는 생각에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청춘호르몬에 이끌려 당시 24세이던 펑신은 베이징에서 기회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그 해 같은 산시 양취앤출신 리옌훙(李彦宏)이 실리콘밸리에서 중국 검색엔진사업을 준비 중이었고, 마윈(马云)은 ‘중국 옐로우페이지’에서 일하며 버스로 각지 업무를 뛰었다. 마화텅(马化腾)이 QQ의 전신 QICQ를 창설하고, 장차오양(张朝阳)은 귀국해 자신의 인터넷회사를 세웠다. 


1997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 펑신은 이력서를 들고 일자리를 찾아 궈잔(国展)인력시장으로 향했다.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오오캔디(喔喔奶糖), 신주(三株)에서 일하긴 했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었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고 <중국신문주간>에 회고했다.


1998년 봄까지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그는 집에서 천후이샹(陈惠湘)이 쓴 <레노버는 왜(联想为什么)>에서 양위안칭(杨元庆), 궈웨이(郭为)의 이야기를 읽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IT였음을 발견했다. 레노버 건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거절당하고 레노버의 주주 진산(金山)소프트웨어에 편지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력서를 들고 다시 한 번 인력시장을 찾아 결국 ‘원취싱(文曲星)’에 채용되었고, 얼마 후 지인의 소개로 그토록 바라던 진산에서 일하게 되었다.


진산에서 그는 화시(华西)지역 업무를 담당했는데, 화둥(华东), 화난(华南)지역보다 실적이 좋았다. 기존 직원들은 그를 ‘강인하고(韧), 영특하며(聪慧), 의리있는(江湖义气)’인물이라 평가한다.
1999년 중국의 인터넷기업이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꺼지기 쉬운 ‘거품’과 함께 매력적인 사업기회가 생겨났다. 마윈의 알리바바, 리옌훙의 바이두(百度), 마화텅이 개발한 중국 최초의 실시간 통신프로그램 QICQ가 속속 등장하였다. 


몇 년 후 펑신은 사업부 부사장의 직위를 맡았다. 당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몰랐지만 원하지 않는 것은 알았다. 2004년 진산에서 나와 청두(成都) 산중을 다니며 낚시를 했는데 갔다 하면 3개월이었다.
당시 야후 차이나(Yahoo China) 중국총재 저우훙웨이(周鸿祎)가 펑신이 진산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알고 여러 번 그를 찾아가고 계속해서 전화를 했다. “저우총제가 하도 끈질기게 부탁해 미안해서 베이징으로 돌아가면 그에게 가겠다고 했다.” 


펑신은 베이징으로 돌아가 약속대로 야후 차이나에 입사했다. “가자마자 저우총제가 자신은 남은 계약기간 1년이 지나면 나가야 할 텐데 자기가 나가면 나도 남아있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저우훙웨이는 펑신에게 쉰레이(迅雷)에서 일 해볼 것을 권했다. “당시 선전에서 적응도 안되고 마음도 안 잡히고 잠도 편히 못 잤어요. 베이징에 남고 싶었어요.” 펑신은 마음을 정하고 사업의 방향을 보았다. “를레이어, 브라우저, 보안프로그램 다 생각해 보았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그를 앞으로 당겼다. 펑신은 제일 먼저 레이쥔을 찾아갔으나 레이쥔은 그으; 생각을 지지하지 않았다. “창업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고 아르바이트 정도는 할 수 있었어요.” 레이쥔을 만난 후 펑신은 저우홍웨이를 다시 찾아갔다. 저우총재는 그가 동적 페이지 검색엔진 치후(奇虎)를 만들 것이라며 펑신에게 함께 할 것을 권했으나 펑신은 관심이 없었다. 펑신은 졘징(简晶), 바오위에챠오(鲍岳桥), 주총쥔(朱从军) 등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업계영웅들을 한번씩 만나보았으나 “모두 해 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펑신은 자신이 창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투자자를 찾고 사람을 모았다. 그가 다시 한 번 저우훙웨이를 찾았을 때 저우총재는 동영상프로그램사업은 안 한다고 했다. 전(前)사장 레이쥔은 2주동안 생각해 보라고 했다. “3일을 생각했는데 못 참겠더라 고요. 다른 사람의 선고를 기다려야 할 운명인가보다라고 생각했죠. 실제로 200만위안을 투자 받아야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을 저는 20만위안으로 시작했어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펑신이 회고했다. 


생각을 정리한 후 2005년 펑신은 사비를 털어 회사 두 개를 세웠다. 하나는 ‘Kuree’ 플레이어, 또 하나는 플러그 인(Plugin)업체였다. 두 사업으로 그는 2~3달 만에 100만위안을 벌었다.
이 때 벤처창업투자자 차이원성(蔡文胜)이 펑신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밤 12시쯤 처음 만나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다음날 차이원성이 300만위안을 투자했다. 두 달 뒤에는 IDG가 펑신을 찾아와 3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매우 중요한 돈이었죠. 그 돈이 없었으면 바오펑을 인수하지 못했을 거에요.” 


“어떤 때는 머리 없는 파리 같아요.” 2008년과 2009년, ‘바오펑 Box’ 온라인사업 시작이 너무 미뤄지고 투·융자 기회까지 놓쳐 회사상황이 좋지 않자 펑신의 상태도 매우 나빴다. 그는 현재 바오펑 부총재 왕강(王刚)을 찾아가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왕강이 바오펑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왕강은 최근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꾀 오랫동안 회사이야기는 하지 않고 철학, 시, 인색, 록음악 이야기만 했죠. 매우 성의 있고 진심이 느껴져서 들어가기로 결정했어요.”라고 회고했다. 


회사에서 펑신의 별명은 ‘행동가’이다. 직원들은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나도 같은 평사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해요. 20여년 동안 성격 하나 믿고 일하고 있는 걸요.” 펑신이 웃으며 말했다.
펑신은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로서 2년 전 컴퓨터와 IPAD까지 처분하고 휴대폰만으로 사무를 처리하고 있다. 이렇게 큰 사무실에 간단한 가구장식만 남겼다. “휴대폰이면 되요.” 자산이 60억위안인 남자가 손 끝으로 담뱃재를 털며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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