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한 '두르바르광장'
- 1768년 네팔이 통일된 후 1870년대 궁을 옮길 때까지 샤(Shah)왕조의 왕궁이었다.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은 역대 국왕들의 끊임없는 투자로 증축되어 지어진 것으로 샤왕조 중기에 35개의 정원과 수십 개의 궁전, 사당이 지어졌다.
-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5-27 09: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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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30일, 카트만두 스와얌부나트사원 부근에서 불교 신도는 파손된 사원 속에서 불상을 업고 나온다.
촬영/Niranjan
Shrestha |
[기자/민지에 카트만두에서] 두르바르광장의 많은 고대신전 가운데 남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카스타만다프는 눈길을 끌지 못하다가 ‘카트만두(Kathmandu)’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이자 도시 전체의 기점으로서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두르바르광장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초기에는 사람들이 모여 쉬는 공간으로 사용되다. 훗날 위대한 수행자 고라크나트(Gorakhnath)를 모시는 사당으로 개조되었다. 3중처마의 탑묘식 건축물로 높이는 약 20m이며, 12세기에 나무 한 그루의 목재로 지어졌다 하여 카스타만다프라 부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카스타만다프를 완공하고도 목재가 남아 사람들이 남은 목재로그 옆에 지은 작은 사당이 ‘남은 목재 사당’이라 불린다고 한다. 카스타만다프의 북동쪽 자락에는 금정소묘(金顶小庙)가 있다. 코끼리신전으로 카트만두계곡에서 가장 좋은 4대 코끼리신전 중 하나이다.
예량이 지진 후 두르바르광장을 찾았을 때 9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 사원은 안타깝게도 무너져 있었다. 왕족의 수레양산 같던 3중의 처마가 무너져 내려앉고 나무로 만들 대들보들이 끊어져 폐허로 변했다. 사원 옆의 ‘남은 목재 사장’과 코끼리신전은 멀쩡했다.
광장 중앙으로 들어가자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광장 중앙에 빼곡히 자리잡고 있던 5개의 핵심신전 중 마주데왈, 트라이로키아 모한 나랴얀 등 세 곳이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던 건축물들이 곳곳의 썩은 나무, 벽돌, 먼지와 뒤섞여 아수라장이었다.
광장 정 서쪽의 마주데왈은 광장 전체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17세기에 지어졌으며 9층 기반과 3층 처마로 되어있고 안에는 시바(Shiva)신을 상징하는 링가(Linga, 남서생식기)가 봉안되어 있다. 매일 오후면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발판에 앉아 아래 광장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내려다 보며 바람을 쐰다. 예량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동남쪽자락의 트라이로키아 모한 나랴얀 신전은 1680년에 지어져 1934년 대지진으로 크게 파손되었으나 원래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5층의 대좌와 3층의 지붕으로 이뤄져 있다. 사원 앞 꿇어 앉아 합장을 한 가루다(Garuda, 머리는 독수리, 몸은 사람인 금시조)에서 사람들은 이것이 비슈누신의 신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나라얀(Narayan)은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로 우주만물을 포용하며 바른길을 가는 중생들을 보호하는 것을 상징한다. 예량은 이 신전이 무너졌으니 금시조가 영원히 주인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다 생각해 본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5개 신전 중 2개의 ‘핵심’신전이 남아있다. 광장 정 북쪽의 시바 파르바티(Shiva Parvati)사원과 광장 동남쪽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여신사원’(쿠마리(Kumari)여신의 침전)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다.
시바 파르바티사원 2층 창문 밖에는 시바부부의 상이 있다. 실물의 크기로 제작되어 창문에 엎드려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두르바르광장의 시민들을 굽어보고 있다. 시바는 네팔의 주류신앙으로 고대인도어로 ‘상서롭고 자비하다’는 의미이다. 아름답게 채색된 두 나무조각상은 카트만두여행의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진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사로잡을만한 곳은 쿠마리사원이다. 네팔의 무수한 신불들 가운데 실재로 존재하는 ‘살아있는 여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쿠마리는 신전에 사는 여자아이로 산스크리트어, 네팔어, 기타 힌두어로 모두 ‘처녀’라는 의미이다.
쿠마리로 선정되면 집을 떠나 사원에서 살며 가족들과 만날 수 없고 땅에 발을 디뎌서도 안 된다. 지금에야 신앙과 상업화로 네팔 곳곳에 쿠마리가 있으나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카트만두에 있는 쿠마리 만이 국가와 국왕을 위해 예언을 하며 복을 주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져 중시되고 있다.
두르바르광장에서 작은 골목을 따라 북동쪽으로 가면 광장의 부속구역이자 옛 황궁—하누만(Hanuman)궁이 있던 곳이다. 하누만궁은 13세기전 리차비(Licchavis)왕조가 처음 건립해 15세기말부터 역대 국왕들의 왕궁이 되었다.
1768년 네팔이 통일된 후 1870년대 궁을 옮길 때까지 샤(Shah)왕조의 왕궁이었다.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은 역대 국왕들의 끊임없는 투자로 증축되어 지어진 것으로 샤왕조 중기에 35개의 정원과 수십 개의 궁전, 사당이 지어졌다.
예량의 관찰과 통계에 따르면 황궁구역은 지진으로 손실되긴 했으나 심각하지는 않다. 가장 핵심적인 손실은 황궁 출구에 높이 솟아있던 국왕기둥이 무너진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국왕기둥은 두르바르광장의 3개 국왕기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프라타프(Pratap) 마라 왕이 1670년 완공하여 본인과 두 부인, 다섯 아들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을 위에 앉혔다고 한다.
육신이 위로부터 부활해 이 땅을 다시 통치한다는 환상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국왕의 환상은 재와 연기로 사라졌다. 국왕과 왕족들은 그의 왕후와 왕자들의 금상을 안은 채 떨어지고 돌기둥만 광장에 솟아있다.
현지답사를 통해 카트만두, 파탄, 바드가운 두르바르광장에 세워진 국왕기둥 가운데 바드가운의 기둥만 훼손되지 않았고 카트만두와 파탄의 기둥은 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손실은 기괴한 네와르와 시카라 양식이 매치된 황국 서쪽의 카케쉬와르(Kakeshwar)신전이다. 예량이 <중국신문주간>에 설명한 것에 따르면 이 신전은 1934년 지진 후 중건에 실패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다.
네와르(Newar)양식은 네팔의 가장 특색 있는 건축양식이다. 네와르민족의 기원은 현재까지 미스터리로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의 생김새는 몽고인과 코카서스인의 특징을 가지며 카트만두 계곡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이다.
네와르 양식의 신전은 목석구조와 다층지붕의 탑 식 건축물로 대부분 계단이 있는 정사각형 대좌 위에 새우고 지붕은 독특한 물결모양의 기와를 가로로 배열하며 신전 구석구석을 비할 데 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나무조각으로 장식한다. 사카라 양식은 주로 돌을 쌓아 만든다.
산스크리트어의 ‘사카라’는 ‘산봉우리’라는 뜻으로 대표적인 사원으로는 파탄두르바르광장의 마가나천(Mahakala, 암흑의 신성)이 있다.
황궁 정 북쪽의 탈레주(Taleju)사원은 두르바르광장에서 가장 웅장한 신전이나 외부에 개방하지 않고 있다. 힌두교도라도 신전에 들어가는 것이 제한 되 1년에 한 번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기간에만 짧게 참배할 수 있다. 탑에 부분적으로 금이 가긴 했지만 심하게 훼손되지는 않았다.
자세한 탐방과 관찰 후 예량의 통계에 따르면 카트만두 두르바르광장의 주요건축물 중 8개가 훼손되었으며 가장 핵심적인 국왕기둥과 카스타만다프를 비롯한 남부의 일부 건축물들의 훼손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행히 중요한 쿠마리궁전과 대표적인 관광지 시바 파르바티 사원은 보존되었으며 하누만궁 역시 여러 곳 무너지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지는 않았다.
화려했던 광장이 지진으로 거대한 쓰레기더미가 되어 곳곳에 벽돌, 나무조각, 먼지가 널브러져 있고 길도 막혀 경로가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다. 지진으로 두르바르광장이 순식간에 혼란과 무질서에 빠졌고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폐허가 된 광장을 드나들거나 무너진 계단에 올라간다. 문물을 도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보도도 있다.
그러나 현지 경찰들이 나서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5월 1알 두르바르광장에 도착했을 때 두르바르광장을 둘러싼 주변 수 킬로미터의 거리의 입구에 경계선이 쳐져 있었으며 사람이 지키고 서서 군인과 경찰, 자원봉사자와 기자들만 출입을 허가했다.
그래도 기쁜 것은 폐쇄되었던 코트정원(Kotsquare)이 지진 후 이재민구제를 위해 특별개방 되어 수백 명의 이재민을 수용하고 있다. 이곳은 대학살이 있었던 곳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1846년 9월 15일 네팔의 명문세가 라나(Rana)집안의 장 바하두르(Jang Bahadur)가 영국의 지원으로 대학살을 일으켜 정적과 라이벌을 모두 죽이고 군사정권을 탈환해 국왕을 꼭두각시 삼아 수상의 지위를 세습하였다.
“지진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한 노인이 광장에 쓸쓸히 서서 불도저와 자욱한 먼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예량은 “매일 국기를 휘두르던 어른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라크스미 나라얀. 영어도 할 줄 모르는 59세의 이 노인이 카드 한 장을 꺼난다. 두르바르광장 박물관 발전위원회에서 발급한 사원증으로 자신의 사진이 있다.
예량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매일같이 광장에서 사람 키보다 높은 네팔국기를 흔들던 광장의 마스코트였다고 노인을 <중국신문주간>에 소개하면서 “두르바르광장을 찾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을 했지만 어르신은 한 번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네팔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 때문이죠.”
지진으로 신전은 무너졌을지 몰라도 라크스미의 자긍심은 무너지지 않았다. 5월 1일 오후,<중국신문주간>은 폐허가 된 광장에 서서 네팔 국기를 흔드는 라크스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깃대가 있던 커다란 국기가 반듯하게 접을 수도 있고 가슴 앞에 두기에도 좋은 작은 국기로 바뀐 것 외에는 예전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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