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난징(南京)대학살 II

그들이 어떻게 침해를 받았는지, 또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많이 묻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배우자, 가족들, 사랑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와 그 세대 생존자들이 겪어온 삶을 생생히 이야기하도록 할 뿐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일상에 재난을 재현하고 마음속 깊이 와닿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6-02-01 12: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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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캐런은 “어떻게 침해를 받았는지, 역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물어보지 않아요. 어린 시절과 취미, 가족, 사랑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 세대 생존자들이 겪어온 삶을 서술할 수 있어요. 이러한 방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겪은 그들의 고난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2014년 가을, 캐런은 쟈크 등 동료들과 함께 다시 중국을 찾아 중국 직원들과 함께 인터뷰 두 번째 단계를 진행했다. 8일이란 시간 동안 그들은 생존자 18명의 증언을 기록했다.
그 중 두 명은 1923년과 1926년에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100년 넘은 고택에서 이사한 적이 없는 자매였다.
지금의 난징은 현대화된 도시로 고층빌딩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들의 집을 둘러싸고 있지만 그녀들은 아직도 오래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신다. 인터뷰 당일 캐런과 동료들은 좁은 골목을 가로질러 갈 수밖에 없었다. “번화한 도시의 거리에서 고택 입구까지 걸어가는데 시공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는 것 같았어요.”
촬영 팀은 두 자매를 각각 인터뷰한 후 공동 인터뷰도 했다. 대학살 시기의 경험을 되살리고 소녀시절 함께 놀던 이야기도 하면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캐런은 90세 전후의 두 자매가 자세한 부분을 수시로 서로 고쳐주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소녀 같은 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터뷰는 한 가족 탐방으로 확대되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자매의 여러 친척이 모두 찾아와 의욕적으로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자매의 자녀들은 캐런를 데리고 근처 고택을 찾아 방공호였던 곳을 정확히 가리키며 2차세계대전의 흔적이 어디에 남아있는지도 이야기 해주었다.
인터뷰 각본은 엉망이 되었지만 캐런은 성가시거나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입체적인 서사수법과 인터뷰 대상의 즉흥적인 표현에서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걱정, 당황, 모험, 기쁨 등 매우 짙은 ‘인간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었다.
두 노 자매의 자손들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오래 전 어린 시절 이야기와 난징대학살 시기의 경험을 거의 듣지 못한 듯했으나 그 때의 역사 이야기로 한 데 둘러 앉았다.
캐런은 “식구들이 우리의 방문에 매우 감격했어요. 모두가 우리가 하는 일들이 고무적이라며 존중해 주셨죠. 진실되면서도 강렬한 느낌이었어요. 대학살기금의 모든 직원이 그 순간을 경험해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라고 회상했다.
그녀는 생존자들의 이야기 자체가 작은 역사지만 그 가운데 큰 역사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에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역사문헌은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왜 좀 더 일찍 물어봐 주지 않았나요
캐런은 대학살기금 문헌연구부의 주임으로서 세계 각지의 협력자들과 함께 세계의 여러 대학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과 협력하여 난징대학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공동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녀 자신도 남경대학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단언하면서 “아는 것이라곤 대학살로 몇 명이 죽었는지 정도의 기본정보가 전부였다”고 고백했다. 미국에는 캐런과 같이 난징대학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학살기금 집행주임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는 2011년 홍콩으로 출장을 갔다 지인의 추천으로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관람해 보기로 했다. 그는 당시 기념관 관장으로 있던 주청산(朱成山)의 설명을 듣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대학살기금과 기념관이 협력하는 일에 합의했다.
2012년 4월 난징대학 유대·이스라엘연구소 소장 쉬신(徐新)교수는 캘리포니아대학의 초청을 받아미국으로 건너가 학술교류를 진행했다. 당시 캘리포니아대학 학살기금회는 난징대학살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기획중이었다. 첫 만남에서 스미스와 캐런은 서로에게 쉬(徐)교수 및 그가 있는 난징대학 유대문화연구소와의 협력에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쉬(徐)교수는 1993년부터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기획했고, 미국 대표단이 관람을 왔다. 그들은 난징대학살과 나치의 유대인학살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매우 흥분했다. 대표단의 대부분이 난징대학살을 모르던 때였다.
전시회를 미국으로 옮겨가도 되겠냐는 대표단의 제안에 쉬(徐)교수는 주(朱)관장과 상의를 시작했으나 정책적으로 난징대학살 관련자료의 해외전시가 허가되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
쉬(徐)교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자신의 중점 연구과제인 유대문화를 바탕으로 어떻게 유대인의 방법을 참고해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자료와 배후의 역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지를 고민해 왔다. 이들 역사자료를 해외에서 전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빨리 난징대학살이란 인류의 재앙에 대해 알게 될 터였다.
대학살기금의 제안이 쉬(徐)교수의 오랜 숙원과 맞아 떨어졌다.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쉬(徐)교수는 “대학살기금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영향력은 매우 크죠. 중국인으로서 이러한 기회를 맞아 당연히 참여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어요”라고 전했다.
난징으로 돌아온 후 쉬(徐)교수는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자신과 함께한 박사 후 연구원 루옌밍에게 미국 팀의 취재에 협조하기를 원하느냐 묻자 루옌밍은 두말 없이 동의했다.
2005년에서 2006년까지 루옌밍은 <난징대학살 해외 사료집(南京大屠杀海外史料集)> 시리즈총서 제10권을 번역했다. 그는 유대사상과 문화를 연구방향으로 1년간 이스라엘에서 교류하며 나치의 유대인학살과 난징대학살 연구를 연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왔다.
루옌밍은 처음에는 인터뷰 진행자이자 번역자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이후 연락, 협조 및 현지연구 등 점차 여러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2013년 난징대학 대학살기념관에 입사한 후 연구원의 신분으로 프로젝트에 계속해서 참여했다.
미국과 중국 팀, 그리고 관계자 측의 노력과 추진으로 2012년 12월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시작되고 약 일주일간 첫 번째 인터뷰 대상자 생존자 12명을 인터뷰했다. 기록한 영상자료는 난징대학으로 보내져 검색할 수 있는 동영상자료로 만들어졌다.
전에도 이스라엘 대학살기념관과 미국 워싱턴대학살기념관은 기타 대학살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았으나 소재는 검색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대학살기금의 특징 중 하나는 검색될 수 있는 영상자료를 제작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금의 역사시각자료실에 수록된 생존자 영상자료는 10만7000시간을 넘으며, 자료에 포함된 키워드는 6만2000개, 인명과 사진은 각각 130만 개와 62만8323장에 달한다.
현재 대학살기금 역사시각자료실의 일부 통계자료는 33개국의 199개 사이트에서 검색할 수 있다. 여기에 일부 난징대학살 생존자의 증언영상자료 역시 이 역사 시각자료실 사이트에 업로드 되어 열람할 수 있다.
쉬(徐)교수는 “증언은 1분안에 정확하게 검색할 수 있다. 서든캘리포니아대학에서의 연구기간 동안 영상의 키워드가 검색되는 것을 확인하고 진정한 협력을 결정한 것이다”라고 소개했다.
중국과 미국의 협력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시작된 후 스티브 스미스는 인터뷰에서 유대인이 역사지식 심화에 어떠한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가 서사의 중요성이라 밝혔다. 그는 역사적인 사실과 현재 대중들 간의 연결점을 찾아 난징대학살 이야기를 ‘국제화’해 세계 각지 모든 사람들이 난징대학살을 한 국가, 지역, 일부 사람들뿐만이 아닌 전세계, 전 인류의 이야기임을 알리기를 희망한다.
프로젝트 참여과정에서 쉬(徐)교수는 나치의 유대인대학살과 난징대학살의 공통점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그는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오웬(David Owen)이 나치의 학살을 부정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힘과 자금을 모아 그를 고소했어요! 결국 오스트리아 법원이 3년구금형을 내리면서 유대인들이 승소했죠”라며 두 사건의 반인류적인 본질은 같으나 유대인학살이 세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인정받는 것은 그들의 끊임없는 상소 덕분이라 주장했다.
프로젝트의 영향에 관해 쉬(徐)교수는 ‘구조’와 ‘시야’를 강조했다. 유대인 스필버그(Spielberg)가 세운 대학살기금 영상기획에는 유대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르완다 민족대학살과 난징대학살도 포함되어있다.
앞으로 중국과 미국은 네 번째 인터뷰 협력을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 이는 시간과의 경주로 변해버렸다. 인터뷰에서 어떤 생존자가 루옌밍에게 물었다. “몇 년 전에 물었으면 더 많은 일이 기억났을 텐데 왜 오지 않았나요? 오래 기다렸어요.”
2007년 출판된 <난징대학살 생존자 인명록(南京大屠杀幸存者名录)>에는 1960년대부터 수집된 생존자 2,592명의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2010년에는 이들 생존자 중 300여명이 건재했으나 난징대학살 기념관 통계에 따르면 현재 건재한 생존자는 100여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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