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사오싱(绍兴)을 추억하다
- 사오싱은 역대 중국문인의 이상적인 산야이다.
특히 문인의 영혼이 깃든 곳으로 유명하다. - 이경우 news@inewschina.co.kr | 2015-02-03 19: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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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장 사오싱 수향 사진/IC © 중국신문주간 |
자정무렵, 저는 추워서 잠에서 깬다. 차가운 이불을 덮고 등잔 밑에 있는 나방을 본다. 50 M 떨어져 있는 집이 바로 루쉰(鲁迅)의 낡은 주택이다. 사오싱에서 구식적인 높은 대문이 장착되여 있는 저택을 노대문이라 불린다. 저는 그의 집 서쪽 골목에 있는 한 노대문으로 개조한 청년 여인숙에서 산다.
깊은 가을의 한기가 루쉰 신혼의 신방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날 밤, 그는 주안과 함께 나무 구조의 계단을 올라가 2층의 한 음울한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에 그의 집 고공을 보았다. 루쉰은 눈물이 난 것 같았다. 어느 해, 저는 사오싱에 와서 바로 루쉰의 자택으로 갔으며 그의 허락을 받아 방을 참관하였다. 그 다음,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자택도 가보았다. 저우언라이가 짧은 시간 머물었던 2층 방도 보았다. 그 때 저는 이러한 어두운 방에서 오랫동안 있으면 사람이더라도 곰팡이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저는 이러한 방에서 보잘것 없는 나방을 마주하며 있었다. 루쉰의 대부분 문장에서 밤 벌레의 울음소리를 언급하였다. 사오싱에서 저는 이러한 작은 나방도 루쉰과 관계가 있으니 하물며 여기는 그가 말한 백초원과 거리가 아주 가깝다. 밤에는 생각이 많아지며 저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허운 승님이 해마다 겨울이 되어야 밖으로 나온다. 주의하지 못하여 산길의 작은 생명체를 밟을 까봐 두려워 한다. 홍이 법사가 좌석에 앉을 때마다 뒤돌아 등나무의자를 흔든다. 등나무의자에서 집을 지은 벌레를 앉을까봐 그런 것이다. 일정적인 나이가 되고나서, 어려을 때의 호기심과 두려움은 점점 사라지고 이러한 동물을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사오싱은 풍아한 곳이고 야마인도 부드러워진다. 잠을 설치며 갑자기 생각났다. 국공 합작 때 저우언라이 국민당 정부에서 높은 직위를 겸임하여 1939 년 봄에 소오싱에 들렀다. 새벽 3 시에 컴컴하지만, 현지의 당, 정,군 등 스물 명이 항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쉰의 “고향과 점점 가까워질 때, 날씨는 음침해졌다” 그 한마디는 참담한 풍경이 어둠침침하고, 전부 드문드문하다. 모든 사람들의 고향은 늘 관료에게만 길거리 늘어서서 환영한다. 문인에게는 밖에서 어느 만큼의 명색이 있어도 돌아오면 원상태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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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장 사오싱 나정 사진/IC © 중국신문주간 |
이 때 별이 밝아서 문을 열어 울타리를 통해서 보면 높은 벽 사각의 하늘이 파랗다. 마당에 쥐 죽은 듯 소리가 없다. 소오싱의 대표로서의 루쉰의 고향은 저녁에 관광객이 흩어진 다음 작은 도시는 일상 상태로 돌아가 세상일에 무관심하여 모두 평등하다. 저번에 소오싱에 왔을 때, 루쉰의 명망 아래서 대부분 시간에 여기에 머물러 다른 데에 가서 볼 기회도 없었다. 이번에 와서 왕희지, 추근과 서위도 만나러 가고 싶었다. 소오싱은 유명한 사람이 많으며 모두 실력이 있는 분이다. 구천(勾践), 혜강(嵇康), 사영운(谢灵运), 범중엄(范仲淹), 육유(陆游), 왕수인(王守仁), 채원배(蔡元培) 등이 있다. 서예, 회화, 시가, 소설, 교육, 철학, 정치 등 각 영역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하여 어떠한 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최고봉이 되었다. 예를 들면,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가 있다.
그날 밤에 산책할 때, 추근의 자책을 우연히 보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근무하신 분들은 퇴근하였고 대문이 잠겨져 있었다. 여인숙에 돌아갈 때, 바이두 지도를 열어 루쉰의 집까지 걸어갔다. 1000 M도 되지 않는다. 추근이 형을 집행한 고현정은 루쉰의 자택과 멀지 않다. 루쉰이 사람의 피를 묻은 진빵에 관한 내용을 썼을 때, 아마 추근을 은유하는 것이 될것이다.
추근을 알았을 때는 젊었을 때 ‘추풍추우수살인’라는 시를 보았을 때였다. 그 때는 이 한마디가 통철심비한 죽음 전 절필인 줄 몰랐고, 문장을 쓸 때 몇번정도 인용했었으며 나의 가벼운 심정을 묘사하였다. 그 때는 늘 사람이 죽음을 앞두는 문장을 생각한다. 하나는 “하나도 용서하지 않는다”이며 또 하나는 완령옥의 “여론의 힘은 무섭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홍이법사의 “슬픔과 기쁨의 모임”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것과 무관한 사람이 마지막에 한 말은 다 똑같다.
루쉰이 “죽을 때까지도 그와 갈등이 생겼던 사람을 가만 두지 않는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몇 년 전까지 청화미술대학의 진단청 교수는 이 한마디에서 오히려 루쉰의 장남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루쉰 자택의 게시판 앞에서 그가 직접 쓴 ‘그 옛날 호기와 격정 어디로 갔나, 꽃이 피고 지여도 할 말이 없구나’ 시를 보면서, 갑자기 저는 그가 이 모든 것을 이미 간파했다고 느껴졌다. <술집에서 在酒楼上>,<고독자 孤独者>와<상서 伤逝>3편의 소설을 읽었다면 루쉰은 진짜 세상의 마지막 온정도 믿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신은 마음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가 너그럽지 않게 적을 원망하는데 사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원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서하지 않음은 홍이법사의 철저한 불쌍함의 마음이고, 또한 쓸쓸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도 용서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 마음이 아팠다. 루쉰이 돌아가기 전에 “매장, 관둬, 기념에 관한 일을 하지 마라”라고 당부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그의 본가 먼 친척조카 저우언라이 돌아가실 때, 유언은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것이며 또한 등영초(邓颖超)를 시켜 소오싱 고향 조상의 무덤을 무너뜨리라고 하였다.
추근(秋瑾)은 헌신정신을 갖고 있는 담사동(谭嗣同)을 모방하는 것에서 루쉰과 저우언라이 미래의 선택까지 우아한 소오싱 사람 뼈속의 단호함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전형적인 강남수향으로서 소오싱의 패방이 제일 많으며 효자도 많고 여자도 정렬하다. 그 당시에 손중산을 따라다니는 추종자가 많으며 손중산(孙中山)이 소오싱에 가고나서 소오싱의 삼다를 말하였다. 즉 돌 패방, 조상의 무덤과 똥항아리이다. 이 삼다는 소오싱 사람의 풍격, 문맥 전승과 그 당시의 일상생활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현지의 일반화 말 중에서 소오싱을 동방의 베니스를 비유한다. 저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베니스 도시에서 물길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바닷물의 구성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소오싱 도시 종횡으로 교착된 강의 물길은 뼈속의 혈맥이다. 소오싱의 부드러운 빛이 조용히 흐르며, 베니스의 푸른 파도가 출렁인 것과 완전 다른 것이다. 샤오차오류수이런자의 풍토와 인정, 또한 베니스의 보루를 높게 지은 것과는 더욱 더 큰 차이가 있다. 소오싱 미녀인 서시와 베니스 귀부인이 다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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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
보는 것을 다 끝난 다음, 1 원짜리 동전을 하나 던지며 조각 앞에다가 한송이 하얀 꽃을 바친다. 조각 근처에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라는 24 글자가 달려 있다. 추근은 차라리 사지에 가며 24 글자 중의 단어와 같이 사람을 지금이 언제일지도 모르는 느낌이 들게 한다.
강남연우, 인사태평, 길거리에 조용한 분위기가 나타난다. 차를 타서 난정에 갈때 이미 해가 서쪽으로 지었다.
난정이 사오싱의 외교에 있다. 공원 문을 닫기 전 1시간 빨리 들어가며 관광객이 이미 사라졌다. 성인 왕희지가 제일 좋아하는 거위가 물에서 놀고 있다. ‘난정’이라고 글이 새겨진 유명한 비석이 숙연하며 부드러운 광택이 난다. 비록 파손이 있지만 속세를 잊고 홀로 서 있다. 왕우군사의 벽에 역대 최고급 수준의 서예가 모사한 <난정서>는 법률과 제도 삼엄하여 오래 세월이 지속되었다. 왕희지는 그 당시에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이런 아름다운 곳에 갔다. 이것은 역대 중국문인의 이상적인 산야이다. 특히 문인의 영혼을 배치한 장소이다. 역대 제왕도 경모한다. 이세민(李世民)을 모범으로 하여 청나라 강희(康熙) 건륭(乾隆)까지<난정서>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경지를 찬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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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장 사오싱, 엣날 마을 거리 사진/IC © 중국신문주간 |
사오싱에서 어디에 가든 아담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나는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큰길과 골목에 갔다. 항상 우연히 한 명인의 자택을 봤는데 마음 속에서 “아, 그분도 소오싱 사람이구나”라고 몰래 감탄한다. 나는 언뜻 눈결에 창차오즈제와 팔자교 이러한 낡은 소오싱 거리까지 걸어갔다. 아침에 타산공원 최고로 높은 칠급부처까지 갔으며 도시 전체를 구경하였다. 여기는 서화원이 많으며 곳곳에 서예와 그림 전시의 포스트가 있어서 어디든 볼 수 있는 붓글씨가 저를 부끄럽게 만든다.
소오싱을 떠난 전날 밤에 부산공원 바깥의 산을 에워도는 도로에서 걷고 있었다. 도로 양쪽에 나무가 높고, 손바닥 만한 잎이 떨어졌다. 한 ‘록천커피’라는 가게에 들렀다.
가게의 주인은 난징과 상하이에서 몇 년 동안 애니메이션을 한 젋은 커플이다. 금방 결혼하였다. 큰 도시의 번화를 겪어 보았으니 그들은 “소오싱에서 평생 살면 만족하다”고 느껴졌다. 비록 소오싱 음식을 적응하지 못했지만 사천이 고향인 신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기는 여기를 평생 좋아할 거라고 확실하였다.
오늘은 그들이 영업한지 7 일 째이다. 가게에는 나 밖에 없었다. 소오싱 시내에 제일 정통적인 커피를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낡은 방에서 배치는 모두 새로운 것이며 커튼도 새 것이다. 마당은 부산공원의 산비탈과 연결하여 한기가 자욱하며 초목은 가을을 잘 안다. 나는 벌써부터 여기에 몇 년동안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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