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속의 증오는 어떻게 소멸될 수 있을까?

영화 ‘인설트’ 스틸 컷
김지영 bnu0827@gmail.com | 2018-06-16 15: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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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판결은 쌍방을 해방시켰지만 이 화해는 여전히 이상주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원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해피엔딩은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레퍼토리에 불과하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글/ 양스양(楊時旸)] ‘인설트’와 같은 소재의 영화는 태생적으로 화제를 몰고 올 영화이며 어떤 면에서 보면 일부러 창작할 필요 없이 현지 생활에서 임의로 소재를 골라 조금만 가공하면 이야기로 엮을 수 있는 영화이다. 한 사람은 레바논 출신의 기독교 신자이며 다른 한 명은 팔레스타인 난민으로 두 남자 다 성격이 괴팍하고 고집이 세다. 두 사람은 입구 건설 공사를 하다가 배관에 대한 사소한 충돌로 싸움을 벌인다. 논란이 조금씩 증폭되고 결국 법정 다툼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신앙심을 갖고 있고,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 오랜 세월 축적된 원한과 대립이 크게 분출돼 결국 재앙을 불러온다. 이야기 구성에서 보면 ‘인설트’는 오늘날 사람들이 이미 친숙하게 느끼고 있는 뉴스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하나의 작은 해프닝이 큰 사건으로 번져 사회 구조와 기제를 엿볼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객관적으로 이 영화의 기법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특히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대규모 사회적 시위, 법정에서의 두 변호사의 대결, 그리고 각자의 사생활 속의 부득이한 상황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는 것이 특징인데 기존 스토리 구성에 비해 새로운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오래 된 서사방식 이외에 인심과 원한, 화해에 관한 도덕적 이슈들이 가치를 더해 준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원한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또 없어질 수 있는 문제인지 하는 부분이 ‘인설트’가 던져주는 가장 가치 있는 메시지이다. 이야기는 감명 깊은 연설로 시작된다. 토니는 무대 아래에 앉아 진지하게 리더의 말투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집회가 끝난 뒤 그는 차를 몰고 귀가했다. 영화는 차 안의 백 미러에 달려있는 십자가와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음악을 디테일 하게 다루었다. 이는 그의 두 신앙의 원천을 묘사한 부분인데 하나는 신성한 높은 곳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 현실이다. 이 두 가지가 매일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때부터 라디오 소리가 수시로 이야기 속에서 흘러나온다. 그와 팔레스타인 난민 야세르 사이에 실랑이가 발생할 때에도 정치 방송이 그의 공장 작업장에 쩌렁 쩌렁 울렸다.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토니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복수의 온상으로 만들었고 강성 지도자의 초상화를 집에 걸고 두고 일할 때 감정적으로 격양된 라디오를 듣고 있었으며 시시각각 자신의 심리를 전투준비 태세로 만들었다. 그는 평범한 세상에 살고 있었으며 평범한 자동차 수리센터 업자에 불과했고 하루 종일 엔진 오일과 스패너와 접촉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에서는 스스로를 전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의 심리적 토대였다. 이는 또 다른 이슈를 몰고 오기도 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의 복수심을 일으키는데 일조하였을까 아니면 원래 마음 속에 원한의 씨앗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씨앗이 자랄 만한 적절한 기회를 만났던 것일까? 현실생활의 절망과 강박, 어쩔 수 없었던 상황, 그리고 일찍이 겪었던 뼈아픈 아픔의 고통들이 뒤섞여 복수가 되었다. 그는 분노와 공격으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중동에서 일어난 주인공의 감정이지만 우리도 평소에 느낄 만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야세르는 건설현장 노동자였고 난민 신분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다툼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겨냥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 이데올로기가 다른 한 이데올로기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다툼이 벌어지는 순간, 토니는 자신을 더 큰 상징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는 자신이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을 상징하는 대표이며 팔레스타인의 침입을 받는 대표로 생각했다. 그 공사장 배수관은 단지 오랫동안 묻혀있던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도화선이었을 뿐이었다. 이는 신분과 신분의 대결이지 개인과 개인의 갈등이 아니었다.

 


 ‘인설트’ 중 다수의 장면은 법정 공방이며 대질 레퍼토리는 검증과 대결뿐만이 아니라 양측과 그 배후 진영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법정에서 방청객들과 법정 밖 거리와 도로를 가득 메운 지지자들은 이번 재판을 자신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로 삼았다. 물론 분노는 광란의 분위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토니와 야세르 두 사람 모두 복수의 피해자들이다. 그들의 생활은 무참하게 짓밟혔고 마을도 풍비박산이 났으며 내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들의 운명은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고, 두 사람은 대책 없이 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누구든지 빨려 들어갔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걷잡을 수 없는 한 맺힌 감정을 품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 원한을 어떻게 제거하고, 무엇에 의지해야 할지 누가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 곳은 재앙과 전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몇 년 동안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마치 텔레비전 속에 나오는 그 군 수뇌부의 말대로 전쟁이 끝났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끝나지 않은 모습과도 같았다. 복수심은 여전히 피어나고 마음 속의 원한은 소멸할 길이 없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모든 사람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만큼 무죄 재판으로 쌍방을 해방시켜 주었다. 그들은 피곤한 대치 과정을 거쳐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느꼈다. 그러나 이 화해는 여전히 이상주의적인 빛을 지니고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이다. 대단원의 끝은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레퍼토리이다. 현실 세계에서의 이 원한은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쳐야만 소멸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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