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을 다루는 상인과 그의 아내 (1)

진심으로 옥을 사랑하는 사람은 최상급 양지옥(羊脂玉)을 보기 위해서 10만 위안을 지불하고 1시간을 감상한다. 구매하고 나서 바로 팔아 차액을 남기는 상인도 있다. 옥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처럼 어떤 인연이 있다. 나의 부친과 모친의 이야기는 이런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3-28 11: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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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얼반쟝
[글/쿠얼반쟝 사이마이티] 나의 부친의 고향은 아투스(阿图什)이고 모친의 고향은 카스(喀什)이다. 모친은 외할머니의 가족 사업을 위해 허텐(和田)에 정착하게 되었고, 부친은 나와 모친을 위해 이 도시에 남게 되었다.

 


부친과 모친이 만나게 된 사연은 서로 말하는 것이 달랐다. 부친의 이야기에 의하면, 자신은 상인이었고 모친은 가출한 반항심이 강한 소녀로서 두 분은 카스에서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친의 이야기로는 자신은 집안일을 도와 시장에서 스카프를 팔고 있었고, 부친은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모친을 본 부친이 한 눈에 반해 계속 따라 다녔다고 한다. 두 분은 고향인 아투스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니카(Nika)를 읽었다. (Nika: 결혼관계를 확인하는 이슬람교 독경 의식)


처음 두 분은 아투스에서 부친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 외할머니로부터 전보를 받게 된 모친은 고향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모친은 아투스에 돌아가지 않았다. 부친은 모친이 나를 데리고 떠난 그날부터 매일 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나의 기저귀 냄새만 맡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할머니는 부친에게 “아내와 아이가 어딘가에 있으면 너도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옥을 생명의 일부분으로 여기다 


신장 허톈시는 허톈옥을 많이 생산하는 명소이다. 허톈에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옥에 관련된 사업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말하자면 허톈옥은 그들이 돈을 버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 밥통’과 같은 것이다.


모친의 집안은 허톈에서는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 모친의 집으로 온 부친은 모친 집안을 도와 집안 사업을 할 수 있었지만 부친은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카펫, 담요 장사를 해보았고 고기를 구워 팔아보기도 했으며 한때 음식점도 운영해 보았다. 마지막에는 옥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듣기로는 외할머니가 데릴사위인 부친을 업신여겨서 태도가 있어서 부친이 더욱 분발하였다고 한다.


어느 직종이든 벼락부자들은 지속적으로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위룽카스강(玉龙喀什河)을 파면 팔수록 옥석 산출량은 줄어들었다. 시장에서 옥석들이 끊임없이 유통되면서 질 좋은 옥석은 점점 적어졌다. 옥석 사업 경쟁도 치열해져 갔다. 옥석 가격도 하늘 높이 치솟아 억만 장자들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옥을 발굴하는 사람은 줄어만 가고 있었다. 


부친도 옥석 사업을 하는 상인 중의 한사람이었지만 억만 장자는 되지 못했다. 진심으로 옥석을 다루는 부친은 많은 손님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윤이 적어도 부친은 질 좋은 옥을 진정으로 옥을 아끼는 사람에게 주었다. 같은 업계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독특한 경영이념으로 인해 그 당시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친은 보람을 느끼고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상인으로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부친은 자신을 ‘옥석계의 중매인’이라고 자칭했다. 부친은 모든 손님과 옥석 사이에 홍실을 맺어주어 서로를 아껴주기를 바랐다.
부친은 옥석을 생명의 일부분으로 여겼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에서는 부친은 거의 매일 마당에 앉아 옥을 씻고 있었다. 


오후 햇볕이 마당을 쪼이게 되면 매번 부친은 햇볕이 가장 충만한 곳에 큰 대야를 놓고 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나서 옥석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물에 담그고 손으로 반복하여 문지른다. 이런 과정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그 당시 나는 부친이 왜 이러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4명의 형제가 모두 부친한테 물어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돌을 물에 담그세요?” 그때마다 부친은 나지막이 대답한다. “얘들이(옥석) 자기 고향에서 실컷 물을 마시고 햇볕을 실컷 쪼인 후에 떠나게 하려는 것이다. 얘들이 한번 떠나면 다시는 자신들이 자란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이다.” 


모친은 집안일을 돌보면서 부친의 일도 도왔다. 모친은 옥석에 대해 약간 알고 있다. 옥석이 돈이 된다는 것이다. 돈이 되면 좋은 물건이고 아니면 쓸모없는 것이다. 모친은 나와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을 낳았다. 편안하고 한가롭게 생활했지만 그렇다고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셋째 남동생이 태어날 때 부친은 이미 옥석 사업을 시작하였다. 사업 때문에 부친은 자주 집을 비웠다. 때로는 몇 개월 길게는 1년을 비운 적도 있다. 부친은 사업에서 번 돈을 모두 모친에게 드렸다. 

 

집을 비우기 전에는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돈을 준다. 집을 나가면 돌아오는 시간을 알 수 없는지라 어떤 때는 부친이 돌아오기 전에 돈을 전부 쓴 적도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대가에서 태어나 고생 한번 하지 않은 모친은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보석 액세서리를 전당포에 맡긴 적이 있고 손수레를 끌고 과일 장사를 한 적도 있다. 황금 액세서리는 모친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지만 생활고 앞에서 모친은 그것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힘든 일을 자신이 짊어지고 이겨나갔다. 그러면서도 모친은 한 번도 힘든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부친도 모친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모든 집안일은 부친이 도맡아하였다. 자식 넷 중에서 셋째 동생만 병원에서 태어났고, 나와 여동생, 넷째 남동생은 전부 부친이 손수 받았다. 부친과 모친이 서로 도와가면서 일하는 이런 정경은 당시 남성주의를 선호하는 허톈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로 인해 주위 사람들의 온갖 비난과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 

 

우리 집안의 운명은 내내 기복이 심했다. 부친의 허톈 옥석 사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연이어 사기를 당해 부친의 모든 옥석을 빼앗겼다. 신분증마저 남겨 놓지 않았다. “알라(真主)가 준 돈은 알라가 다시 가져갔다.” 부친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부친은 집안의 기둥은 자신이 받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기 당한 돈을 다시 벌어오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돌아온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부친은 다시 길을 떠났다. 집을 떠난 부친은 4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와 동생들은 부친이 잘 살아있기만을 바랐다. 모친에는 이 보다 더 큰 충격은 없었다. 우리 집을 비난하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모친을 자극하였다. 어떤 사람은 부친이 이미 죽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부친을 만났는데 이미 가정을 꾸려 다른 여자와 같이 살고 있고 아기도 있다고 했다. 매번 모친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집에 와서 울었다.

 

그때마다 나는 부친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모친을 위로했고, 부친이 결혼을 했다면 새로운 남편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모친은 어이없어 했지만 모친에게 있어서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모친의 건강은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4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허난(河南)의 작은 모텔에서 부친을 찾아 집으로 모셨다. 모친은 그제야 맘을 놓았다. 우리 집안은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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