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저우의 미소

칭저우(青州)박물관은 용흥사(龙兴寺) 조각상으로 국가 1급 중 유일한 현(县)급 박물관이 되었다. 천 년을 묻혀 세월의 깊은 곳에서 온 조각상이 특유의 ‘칭저우 미소’로 보는 이들을 감동시킨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08-28 11: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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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저우()에서 출토된 조각상 비석은 모두 삼존(三尊)상 위주로 본존(本尊) 1개와 협시() 2개로 되어있다. 조각상은 석회석, 흰 대리석, 화강암, , 도기, 나무, 진흙 등 일곱 가지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절대다수가 색체그림이 그려져 있고 아름다운 형체와 정교한 조각, 매끄러운 선이 돋보인다. 사진/신화사 사진설명/ 전훙거

 

[글/겅셔우] 필자는 산둥(山东) 칭저우(青州)박물관 2층 불교석재조각전시실에 서서 동위(东魏)시대의 금을 입힌 채회석 보살입상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불상은 1.64m의 표준신장에 늘씬한 몸매, 둥근 얼굴에 콧대가 높고 용모가 수려하다. 머리에 보관(宝冠)을 쓴 화려한 차림새에 양 어깨에 늘어뜨린 피백(披帛)에는 영락(璎珞)이 매우 정교히 조각되어 있고, ‘주름치마’의 치맛자락은 비단처럼 가볍다. 팔은 없지만 이러한 ‘장애’조차 팔이 없는 비너스처럼 심금을 울리고 흥분되는 아름다움이다. 입가가 살짝 올라간 미소도 아름답다. 


관람에 함께한 친구의 소개에 따르면 이 불상은 많은 나라에서 순회전시 되었다고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니 각양각색의 불상들의 저마다의 단정하면서도 장엄하고 온화한 표정과 고결한 기품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마침 중국불교예술의 역사를 다시 쓴 이 불상들이 출토지가 박물관의 남쪽, 전시장에서 100m밖에 되지 않는 곳의 용흥사이다. 


용흥사는 중국고대사원의 옛 터로 1996년 10월 인부들이 공사를 위해 땅을 고르다 우연히 불상조각을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물관 직원들이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고 산둥성 고고소(考古所) 전문가들까지 칭저우로 건너가 응급고고발굴을 진행하였다. 


낯선 땅에서 발굴 된 토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동서 8.7m, 남북 6.8m, 깊이 3.45m 토굴에는 수 많은 불교 조각상이 질서정연하게 들어있었다. 조각상은 대부분 위, 가운데, 아래의 3층으로 뉘여 있고 토굴 벽을 따라 입상이 놓여 있었다. 정확한 통계에 따르면 토굴에서 출토된 조각상은 400여 점에 달했다.
이번 발굴은 중국불교예술의 유례없는 발견이라 할 수 있으며 당시 ‘중국의 10대 고고학발견’이란 평가와 함께 ‘20세기 중국 고고학의 100대 중대발견’의 영예를 얻었다. 이로서 칭저우박물관은 1급국가박물관 중 유일한 현(县)급 박물관이 되었다. 


발굴 된 조각상은 95% 이상이 칭저우 본토의 석회석을 조각해 독특한 ‘칭저우 스타일’을 취하고 있다. 많은 불상이 서역에서 전해진 가볍고 친근한 차림새를 하고 있으며, 회화의 ‘조의출수(曹衣出水)’ 화풍과 흡사하게 몸체의 선이 뚜렷한 선으로 드러나 새로운 느낌을 준다. 


운 좋게도 일부 조각상에는 신자들이 공양을 드리며 소원을 빈 문자도 새겨져 있어 조각상이 만들어진 당시의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중요한 기록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북위(北魏) 영안(永安)2년(529), 가장 최근의 것은 북송(北宋) 천성(天圣)4년(1024)에 새겨진 것으로 5세기 간격이 있으며 6세기인 북송 말의 작품이 가장 많고 예술성도 가장 뛰어나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이 같은 불교의 성행과 예술의 발달은 칭저우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칭저우는 중국의 9대 고대도시 중 하나로 <상서 우공(尚书·禹贡)>편에 ‘해대유칭저우(海岱惟青州)’라 기록되어 있다. ‘발해(渤海)에서 태산(泰山)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모두 칭저우에 포함된다.’는 의미로 동쪽에 위치한 ‘푸른 나무가 많은 곳(东方属木,木色为青)’이라 하여 ‘칭저우’라 이름하였다.

 

 서한(西汉) 무제(武帝)시기에는 자사부(刺史部)를 세우고 지금의 칭저우 시내 부근 광현성(广县城)에 관청을 두었다. 4세기는 중국 북방지역이 오랜 혼란에 빠져있던 시대로 마지막 해에 선비귀족 모용덕(慕容德)이 자신이 세운 남연(南燕)정권의 수도를 지금의 칭저우로 정하고 광고성(广固城)이라 부르면서 중국역사의 수도도시로 등장하였다. 북조(北朝)에서 수(隋), 당(唐), 북송(北宋)시대까지 창저우는 동양의 1대도시로서 ‘풍물이 다양하고 고상함과 속된 것이 함께하며, 교통이 발달하고 부유한(风物懋盛,雅俗杂处,修涂四达,富焉庶焉)’ 도시로 불렸다. 


칭저우에서는 불교가 성행했는데 그 중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불교사원이 용흥사이다. 특히 북제(北齐)시기의 용흥사는 ‘정동쪽의 갑사(甲寺)’로 불리며 고귀하고 성대한 지위와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용흉사는 11세기 전엽까지도 예사롭지 않은 대사원으로 높은 지위를 유지했다. 


용흥사 외에도 시내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의 운문산(云门山)과 타산(驼山)에는 수·당시기에 굴착한 토굴에서 크고 작은 조각상 천여 점이 발굴되었다. 그 중 타산의 석굴은 규모가 크고 완벽히 보존되어 있다. 수·당시기 초에 지어진 타산 제3굴의 주존(主尊)아미타불은 높이가 6m에 달하는 산둥 최대의 가부좌불상으로 지금도 많은 관광객과 불도들이 찾아와 참배하고 있다. 


용흥사 조각상이 발견된 후 사람들은 궁전에 바쳐지던 이 신성한 불상들이 언제, 무슨 이유로 지하에 묻히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 추측과 고증이 이어진 가운데 역사적인 진실에 가장 가까울 가능성이 있는 관점은 남송(南宋) 초기 칭저우에서 발발한 전쟁의 영향이라는 의견이다. 


남북의 연접지대에 위치한 칭저우는 남송 건염(建炎) 3년(1129)부터 수 차례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으며 ‘수 많은 사찰이 불타 없어졌다.’ 요충지에 위치한 용흥사 역시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금이 쳐들어오기 전 승려들이 절에 굴을 파고 불상들을 묻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묻힌 후 천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시간 속 깊은 곳에서 나온 수 많은 불상이 특유의 ‘칭저우미소’로 보는 이들을 감동시킨다. 


12세기 송과 금의 전쟁은 칭저우에 사는 한 여인의 운명까지 바꿔 놓았다.
송(宋)대 휘종(徽宗) 대관(大观)원년(1107) 여성문인 이청조(李清照)의 시아버지 조정지(赵挺之)가 권위 있는 신하 채경(蔡京)의 배척으로 상서 우부사(尚书右仆射)직에서 파면된 후 얼마 안되어 병들어 죽었다. 조씨 가문이 수도 뺀량(汴梁, 오늘날 허난(河南) 카이펑(开封)의 옛 이름)에서 생활하기 어려워지자 이청조는 남편 조명성(赵明诚)을 따라 전에 살던 칭저우 사저로 돌아와 10여년의 긴 고향 생활을 시작한다. 그 해 이청조의 나이는 25세였다. 

 

▲ 용흥사(龙兴)에서 출토된 동위()시대 금을

   입힌 채색보살상 사진/cfp

칭저우는 남양강(南阳河)이 동서를 가로질러 흐르는데, 물살이 잔잔해 강가를 따라 고목이 우거져 있었다. 조명성부부는 물가를 찾아 강 북쪽연안의 동양성(东阳城), 오늘날 칭저우 베이관(北关) 일대에 살았다. 이청조는 도원명(陶渊明)의 <귀거래사(归去来辞)>를 좋아해 자신의 거주지를 ‘귀래당(归来堂)’이라 이름 짓고, ‘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倚南窗以寄傲, 审容膝之易安: 남쪽 창에 기대어 고고한 기상을 뽐내니 도원명은 좁고 누추한 곳에 살면서도 쉽게 안도하는구나)’의 시구를 이용해 자신을 이안거사(易安居士)라 불렀다.

 

칭저우에서의 시간동안 부부의 생활은 ‘고개를 들면 물건이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했다(仰取俯拾,衣食有余).’ 함께 서예와 그림을 감상하고 제기(祭器)를 손에 들고 구경하며 차를 마시고 매일 밤 밤새도록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청조의 협조로 조명성은 후대 금석학(金石学)연구에 깊은 여향을 끼친 논저 <금석록(金石录)>을 완성하였으며 이청조는 중국문학사 최초의 체계적인 사학(词学) 이론저서 <사론(词论)>을 썼다. 서재 외에도 부부는 칭저우의 산수를 두루 여행하며 풍경이 아름다운 양천산(仰天山)에서 조명성의 4개 제기(题记)를 남겼다. 


선화(宣和) 3년(1121) 조명성이 내주(莱州) 지부(知府)를 맡게 되었으나 이청조는 함께 가지 않고 칭저우 집에 나았다. 떨어져 지내면서 부부간의 정은 더 애틋해졌다.
어느 해 중양절 이청조는 혼자 술을 몇 잔 마시고 수심에 가득 차 <취화음(醉花阴)>을 지어 남편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조명성은 시의 깊은 정에 감동을 받았을 뿐 아니라 ‘부끄럽게도 나의 실력이 이만 못하니 ‘꼭 이기고 싶다(自愧弗逮,务欲胜之)’라며 이 걸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위해 그는 두문불출 먹지도 자지도 않고 3일 밤낮을 전심전력, 심사숙고 해 새로운 작품 50수를 쓰고 <취화음>도 그 가운데 섞어 넣어 친구 육덕부(陆德夫)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읽은 육덕부는 ‘뛰어난 구절은 세 곳 뿐’이라며 <취하음>의 구절 “막도부소혼, 렴권서풍, 인비황화수(莫道不消魂, 帘卷西风, 人比黄花瘦: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랴. 서풍이 불어오니 내 마음 국화와 같이 여위어 가누나)”을 꼽았다. 


금나라의 공격으로 칭저우의 보금자리에도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자 이청조는 ‘피눈물을 산과 강에 보내 칭저우 땅예 뿌리고 싶은(欲将血泪寄山河,去撒青州一掊土)’ 비분강개의 심정으로 모아둔 금석서화를 가지고 남쪽 회하(淮河)를 건넜다. 안타깝게도 이 서예와 그림 절반은 가는 길에 잃어버렸다. 건염 3년(1129) 8월 조명성이 건강(建康, 난징(南京)의 옛 이름)에서 병들어 죽자 이청조는 강남(江南) 각지를 떠돌며 전전했다. 그녀의 수 많은 수심 중에는 ‘꽃 그림자가 가득하고 커튼 드리워진 침대로 은은한 달 빛이 들어오던(花影压重门,疏帘铺淡月)’ 칭저우 고향집에 대한 여러 그리움도 있었을 것이다. 


이청조기념관은 칭저우박물관 북쪽의 양계호(洋溪湖) 주번에 있다. 회색기와와 파랑벽돌의 사합원(四合院)으로 울창한 나무들과 어우러져 돋보인다. 홀에는 이청조가 가야금을 타는 조각상이 서 있는데, 남편과 그리움으로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의 모습인 듯하다.


칭저우성 남문을 나서면 운문산(云门山)이 푸른 병풍처럼 칭저우를 보호하고 있다. 운문산은 높지 않으면서도 산세가 깊어 칭저우 주민들이 중양절에 즐겨 찾는 명승지이다. 수·당시기 불교의 발자취뿐만 아니라 산꼭대기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새겨져 있는 커다란 ‘寿(목숨 수)’자도 유명하다. 


산중턱에 오르면 멀리 ‘寿’자의 상반부가 보인다. 옆쪽으로 비껴 그 아래에 서보면 사람의 키가 ‘寿’자의 ‘寸’ 정도도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칭저우 본토의 격언대로 ‘인무촌고(人无寸高, 사람은 한 촌도 되지 않는다)’인 것이다. 


높이 7.5m, 폭 3.7m로 세상에서 제일 큰 ‘寿’자는 명(明)대 가정(嘉靖)39년 중양절(1560)에 칭저우 형왕(衡王)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조정 내 장사(掌司) 주전(周全)이 바친 글자다. 형왕부(衡王府)에서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면 ‘寿’자가 햇살아래 눈부시게 반짝이며 ‘남산만큼 장수하소서’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이 빛이 매우 멀리까지 반사되어 빛 줄기가 닿는 곳에 오늘날 칭저우 북쪽의 현(县)급 시인 ‘수광(寿光)’이란 지명이 생겨났다는 전설도 있다. 이로부터 운문산을 오르며 복과 장수를 비는 것이 칭저우의 풍속으로 자리잡아 500년 가량을 이어져오고 있다. 


칭저우는 명나라 헌종 주견심(宪宗朱见深)이 아끼던 일곱째 아들 주우휘(朱佑楎)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제1대 형왕을 시작으로 6대까지 이어졌다. 형왕부가 세워진 후 칭저우의 도시구조는 크게 변하였다. 오늘날 형왕부의 부귀영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돌로 된 기념 문(牌坊) 만이 남아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이 기념 문은 통행로가 아닌 학교 안에 있다. 꽃과 나무들 사이에서 남북으로 하나씩 조용히 서있는 두 기념 문은 모두 칭저우 현지의 돌로 만들어 정교하고 아름다운 행운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각 문에 두 개씩 달린 현판에 ‘乐善遗风(악선유풍, 즐겁고 선한 유습)’, ‘象贤永誉(상현영예, 상현의 영원한 명예), ‘孝友宽仁(효우관인, 효와 우애와 너그러움과 인자함)’ ‘大雅不群(대아부군, 빼어난 운치)’의 16자가 선명하게 적혀있다. 현판에 그려진 여의주를 문 용 두 마리의 그림이 집 주인의 황실가문 신분을 보여준다.


당시 이 기념 문은 형왕부의 남문 밖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중심선을 따라 왕족의 저택들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고층빌딩숲이 되어버렸다. 칭저우의 눈부셨던 지난날은 이 기념 문처럼 도시의 끝자락에 흩어져 인연이 닿아야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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