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훠딩(张火丁): 이번 생에는 이 일을 하고 있기에 다른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 경극 정파(京剧程派)의 제3대 청의(青衣: 경극 중 젊거나 중년 여성의 역)전수자인 장훠딩이 2014년 4년간의 공백기를 끝내고 복귀하자 창안대극장(长安大戏院)은 전석이 매진되었다. 2015년에는 링컨센터 공연으로 해외까지 뜨겁게 달궜다. 장훠딩의 제자, 친구, 파트너들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녀와의 인연을 회상하며 음미했다. 왕자웨이(王家卫: 홍콩의 유명 영화 감독)는 그녀를 위해 다큐멘터리를 찍기
-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6-03-14 11: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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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
본지기자 류단칭(刘丹青)
44세의 장훠딩은 마치 하나의 수수께기 같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도 남에게 잘 보이려 하지도 않지만 희곡(戏曲: 중국 전통극)시장이 깊은 침체에 빠진 지금도 엄청난 티켓파워를 가지고 있다. 쟈오룽천(赵荣琛: 유명 경극 배우)의 마지막 제자인 장훠딩은 경극정파의 제3대 청의 전수자가 되었다. 분장을 하지 않으면 그녀는 더욱 왜소해 보인다. 귀밑까지 오는 단발에 검은 색 옷을 주로 입는 그녀는 군중 속에서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분장을 하면 장훠딩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녀가 분한 <숴린낭锁麟囊>의 쉐샹린(薛湘灵)과 <황산레이荒山泪>의 장훼이주(张慧珠)은 모두 반듯하고 신중한 인물로 물소매(水袖: 긴 덧소매)를 이용하는 기교가 좋고 춤사위가 규범에 정확히 맞으며 교태를 부리는 모습 하나 없이 위엄이 넘치는 품격을 보여준다.
그날 오전 9시 장훠딩은 악사들과 함께 다섯 번째로 음악에 맞춰 연습을 시작했다. 중국희곡학원(中国戏曲学院) 영상센터 연습실에는 호금(胡琴), 삼현(三弦), 대완(大阮), 월금(月琴)등 악기가 각자 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장훠딩은 악사들보다 일찍 이곳에 도착했다. 무대와 비슷한 음향 효과를 느끼려면 소리가 울릴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녀는 특별히 이곳을 연습실로 정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악사들은 소리를 조율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호금 연주가 시작되었고 장훠딩도 노래를 시작했다.
바로 정파의 명작인 <황산레이>였다.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어 장훠딩 본래의 목소리와 각 소절의 토자(吐字: 중국 전통극에서 노래 또는 대사를 할 때 전통적인 정확한 음으로 발음하는 것)와 행강(行腔: 중국 전통극에서 노래할 때 곡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목소리를 조정하는 것)이 분명하게 들렸다.
정파는 매파와는 달리 교자(咬字: 중국 전통극에서 정확하게 또는 전통적인 음으로 글을 읽거나 가사를 부르는 것)가 완전하고 분명해서 같은 노래 단락이라도 매파는 3분이면 되지만 정파는 5분을 노래하며 글자 하나, 곡조 하나도 모두 충분히 표현한다. 난징(南京)대학 문학원 교수이자 희곡학자인 푸진(傅谨)은 장훠딩은 언제나 섬세하게 작은 소절까지도 충분히 부른다고 말했다.
연습실의 장훠딩은 분장도 의상도 하지 않은 채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표정은 절제되어 있었다. 그녀가 몸 전체로 하는 이야기는 매우 신중했고 이따금 손 동작을 하긴 했으나 그 외의 불필요한 눈빛이나 몸짓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단 잠 자는 아이에게 바람이라도 들까(看娇儿正酣睡恐被风侵)”까지 부르고는 멈추더니 악사에게 말했다 “시작 부분의 박자가 조금 급하네요.”
경호(京胡)연주자인 왕제(玉杰)와 장훠딩이 서로 알고 지낸 지 벌써 20여년이 된 사이다. 많은 경우 그녀는 악사들의 열정 가득한 연주에 만족했지만 4번째 <황산레이>를 연습하던 날은 느린 박자에서 원래 박자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3,4차례 연습을 하더니 ‘숨을 고르기 어렵고’,‘극중 인물에 몰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황산레이>를 부르는 2시간동안 그녀는 거의 쉬지 않았다. 사이 사이 간혹 기침을 하긴 했지만 계속 불러 나갔다.
물 흘러가는 듯한 서피(西皮: 중국 전통극 곡조의 일종)선율 속에서 장훠딩은 매우 조용히 그녀만이 알고 그녀만이 갈 수 있는 그 곳에 가 있었다. 이때의 장훠딩은 소박하면서도 힘 있고 프로페셔널 했다.
자기도 알 수 없는 힘
청의는 경극의 여자 역할로 푸른색 겹옷을 입고 운백(韵白: 중국 전통극에서 높낮이와 곡절이 자유롭고 음률미와 리듬감이 강한 대사)을 한다. 가창 난이도가 높고 함축적인 스타일이다. 남쪽에서는 정단, 북쪽에서는 청의라고 하는데 추상을 거친 여자 배역으로 여자 중의 여자라 할 수 있다.
각 유파에서 정파 청의를 익힌 사람은 매우 적어 희곡학원 전체를 통틀어도 6명 정도이다. 정파는 청연추(程砚秋)에서 시작되어 호흡과 운율을 중시하고, 행강이 흐느끼는 듯 구성지고 눈빛, 몸짓, 발걸음, 손놀림, 물소매 모두 다른 유파와 달라 배우기 어렵고 정교하게 다듬기는 더욱 어렵다.
경극 인기가 시들하긴 하지만 장훠딩의 공연은 협찬이 필요하지 않다. 동료들은 장훠팅의 공연을 홍보할 때는 일부 희곡극단 단장처럼 공연업체 사장에게 술 대접하며 탁자 밑에서 노래 부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2014년 장훠딩은 4년간의 공백기를 끝내고 창안대극장에서 이틀 공연을 했다. 하루는 <량주梁祝>을, 하루는 정파의 명작인 <숴린낭>을 불렀는데 티켓 오픈하는 날 <숴린낭>은 매진되었고 그 다음날 <량주>도 매진되었다. 3일째에는 680위안짜리 암표 가격이 2200위안까지 올랐지만 금세 다 팔렸다.
희곡계에서는 기업이나 기관이 공연표를 단체로 구매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는데 장훠딩의 공연은 모든 표가 유료 판매된다.
장바이(张白)가 장훠딩을 따라 경극을 배운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전업하고 싶다는 생각에 정파 청의 역할 배우기를 포기하려던 시기에 그녀는 무대 위의 장훠딩을 보았다. 그 후 그녀는 장훠딩의 제자가 되었다. 10년동안 수많은 동료들이 이 길을 포기하고 전업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경극 인기가 떨어져 관중 수가 줄다 보니 배우들이 돈 벌기가 어려워졌다. 심지어 공연 한번에 2,3백위안 정도만 줘도 괜찮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창안대극장 대표 경극배우의 공연도 객석이 겨우 30%정도 찼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장훠딩이 무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고 물소매를 흔들며 말 한마디, 웃음 하나 보태지 않고 토자와 행강을 하며 정파 청의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그녀로 하여금 계속 카펫 위에 서서 실력을 연마하게 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힘이었다.
연극평론가 주슈량(朱秀亮)은 <황산레이>속 장훠딩이 등장하는 장면을 회상하며 너무 아름다웠다고 극찬했다. “바구니를 들고 이렇게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조용 조용히 걷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먼저 조금씩 손이 나오고 그 다음에 바구니가 나온 다음 치마를 차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마치 맑은 물이 밖으로 천천히 흘러 나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이 연습해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정말 온 몸의 솜털이 곧추서는 전율이었다.”
하지만 장훠딩은 자신의 이런 힘 또는 신비한 매력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감동하는 경우도 극히 적다.
무대 위 상념 가득하고 번민에 빠진 눈빛, 걸음걸이, 물 흘러가는 듯한 몸짓, 물소매까지 결코 그녀의 원래 성격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무대 아래의 그녀는 그다지 감성적이지 않고 낭만주의자도 아니며 강호의 기질도 부족하고 꿈 따위를 일절 말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주슈량의 훗날 장훠딩에게 등장하는 장면을 어쩜 그렇게 잘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장훠딩은 “선생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어요”라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바구니 드는 모습까지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며 치켜세우자 장훠딩은 “어디가 다르죠?”라고 되물었다. “그녀는 청의가 갖춰야 할 모습을 가지고 있다” 라는 평가에 대해 장훠딩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전 청의가 반드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말수는 적지만 예의가 바르고 부드럽지만 상당히 직설적인, 천진난만함 속에 결단력이 드러나는 사람이다.
제자인 장바이는 장훠딩에게 활달한 건지 천진한 건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고민을 많이 하지 않고 또 장기 목표를 세우지도 않으며 일 할 때는 해야 할 일부터 시작하고 또 일 하나가 끝나기 전엔 절대 다음 일은 손대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이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생각해 본 적 없어요. 이번 생에는 이 일을 하고 있으니 다른 것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요.”
좋은 목소리와 맑은 이미지
이제 곧 여든이 되는 리원민(李文敏)은 장훠딩이 베이징에서 만난 첫 번째 스승이다. 그녀는 19살의 장훠딩이 맨 처음 자기 앞에서 노래하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전우경극단(战友京剧团)에는 여자 역할의 배우가 3명뿐이었는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극단을 떠나 청의 역할을 할 배우가 부족했다. 극단 간부였던 왕 정치위원은 정파를 좋아했고 때마침 장훠딩의 오빠 장훠첸(张火千)이 극단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녀를 불러 오디션을 보게 했다.
그날 리원민은 희곡학교에 있었는데 동료 하나가 말을 전했다. “왕 정치위원이 극단에 연습생 한 명이 새로 온대요. 어떤지 한번 봐주세요. 괜찮으면 키우고 별로라면 그만이고요.”
이렇게 리원민은 처음으로 장훠딩을 만났다.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작고 말랐으며 양 갈래로 딴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다. “딱 보니 성격이 좀 괴팍한 것 같더라고요. 말을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어요.” 그날 장훠딩은 두 단락을 불렀는데 바로 <춘치우페이(春秋配)>의 한 단락과 <춘치우팅(春秋亭)>의 한 단락이었다. 리원민은 꼼꼼하게 들었다.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춘치우페이>는 그래도 괜찮았다. <춘치우팅>는 모두 정파 자체의 문제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 목소리의 음폭이 넓은 것에 주의했다. 비록 힘도 부족하고 할 수 있는 노래도 많지 않으며 노래의 기초도 없었지만 수수하고 스스로를 꾸미지 않았다.
자세히 알아보니 이 학생은 지린(吉林)성 바이청(白城)에서 왔으며 아버지가 평극(评戏)배우였다. 경극 기초는 별로 없었지만 10살부터 성 희곡학교 경극과에 응시했으나 매년 떨어져 자비로 톈진(天津)희곡학교에 편입한 상태였다.
전문가의 귀로 리원민은 장훠딩이 희곡학교에서 진짜를 배우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래실력은 부족했지만 기질만큼은 상스럽지 않았다. 얼굴은 드라마틱하지 않고 부끄러움과 기쁨 모두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경극에 업계 용어로 ‘얼굴로 연기한다’는 말이 있어요. 추파를 던지는 듯한 눈짓은 금기인데 훠딩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그녀의 좋은 목소리와 맑은 이미지를 보고 리원민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장훠딩은 전우경극단에 남게 되었고 전사 역할에 배치 받았다.
연습생을 하기에 장훠딩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매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그녀는 시간 맞춰 스승인 리원민의 집으로 가서 경극을 배웠다. 전우경극단은 베이징 샹샨(香山)일대에 있었는데 장훠딩의 숙소에서 리원민의 집까지 편도로만 3시간이 걸렸다. 그때는 1990년이라 지하철 1호선도 한 구간밖에 없어 앞 뒤로 모두 버스를 타야 했다. 장훠딩은 한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 9시전에 도착해서 12시까지 배우고 나서야 돌아갔다.
겨울이 되어 날이 너무 추워지자 리원민은 보기에 너무 딱해 희곡학교 교장과 상의해 숙소를 하나 마련했다. 이렇게 장훠딩은 스승의 집 근처에 살게 되었다.
리원민은 그때를 회상하며 “장훠딩은 말은 안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온 힘을 다 쏟고 있었어요. 기예와 연기에 대한 절실함이 보였고 당시 인기 있던 청의 리하이옌(李海燕)을 뛰어넘겠다고 말했죠”라고 말했다.
그녀는 빨리 배우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매번 배운 것을 확인할 때면 지적했던 것을 모두 소화해냈으며 외우고 익혀야 할 것을 모두 해냈다. 심지어 극단에는 “연습실에 누군가 한 명이 남아 있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분명 장훠딩이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3개월 후 리원민은 학생 특별 공연을 열면서 이제 겨우 3개월 배운 장훠딩을 집어 넣었다.
19살인 장훠딩은 생애 첫 무대에서 <리우위에쉬에(六月雪)>의 한 단락을 불렀다. 관중들은 환호하면서 다른 것도 불러달라 했다. 하지만 당시 장훠딩은 이 단락만 배우고 “다른 것은 모두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공연을 본 정치위원들은 호평과 함께 그녀를 “중점 육성”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장훠딩은 괴팍한 면이 있었다. 음폭은 넓지만 음색이 높지 않은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목소리에 맞지 않는 극은 배제하지도 완곡히 거절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못 부르겠다”고만 말했다. “타인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아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단장은 그녀를 좋게 보지 않았다.
몇 년 후 왕 정치위원이 은퇴하고 전우경극단이 해산하자 장훠딩은 중국경극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맨 처음 경극원에서 노래할 때 자신이 없었던 젊은 장훠딩은 리원민에게 “선생님, 무대 뒤로 가서 점검하는 것 도와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장훠딩의 명성은 그때부터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전통극은 아직 많지 않았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월극(粤剧)의 대가 홍셴뉘(红线女)는 25000위안의 경비와 60분짜리 녹음테이프를 보냈고 장훠딩이 녹음을 해서 주자 이를 간직했다. 하지만 당시 장원딩이 할 수 있었던 전통극은 테이프 하나를 채우기에도 부족했다.
2007년 정월, 베이꽝미디어(北广传媒)측은 인민대회당(人民大会堂) 에서 단독 공연을 할 수 있는지를 장훠딩과 의견을 조율하며 2시간동안 청창(清唱: 중국 전통극에서 분장 없이 간단한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것)해줄 것을 요구했다. 장훠딩은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안절 부절했다.
“반드시 해야 해요.” 당시 CCTV희곡프로그램 사회자였던 바이옌셩(白燕升)은 그녀에게 인민대회당에서 경극 단독 공연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후 효과가 좋았다. 장훠딩은 순식간에 인민대회당에서 개인 공연을 한 최초의 중국 전통극 배우가 되었다. 언론이 장훠딩에게 소감을 물어보자 그녀는 너무나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전 청창이라는 형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전통극 배우라면 노래솜씨에만 의지하지 않고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저 거기에 서서 노래만 하는 것은 곤혹스러워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주변 사람들은 장훠딩에게 기회나 잡거나 무언가를 실현하겠다는 야심은 없다고 말했다.
2008년, ‘장훠딩경극예술공작실’의 명성은 높았지만 장훠딩은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그만 두고 싶어했다. 그 후 그녀는 중국희곡학원 교수가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임신해 딸을 낳았다. 이로 인해 4년 동안이나 무대에 설 수 없었다.
당시 장훠딩은 37살로 무대에 서기 가장 좋은 나이였는데 갑자기 4년을 포기하다니 이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주변사람들이 그녀 대신 조바심을 냈다. 당시 공작실은 이미 4년차에 들어갔고 상황이 좋아 많을 때는 연간 100여차례의 공연을 했는데 한 도시에서 2~3일 공연한 다음 다른 도시로 옮겨가 공연했다.
푸진은 “이런 높은 강도로 자주 공연하는 것은 배우에게 있어 좋은 훈련이 된다”고 설명했다. 장훠딩의 초기 스승인 리원민도 “청옌취우, 메이옌팡과 같은 대가도 팀을 이끌고 이렇게 공연해서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들은 장훠딩이 옛 대가들이 걸었던 이 길을 걸어가길 바랬다.
중국 전통극 업계에서 독립적으로 공작실을 운영하는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래 전 왕페이위(王珮瑜)도 이 길을 걸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당시 장훠딩공작소의 기세로 봐서는 경극원에서 독립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공작실은 장훠딩의 이름을 걸긴 했지만 그녀는 그저 주인공일뿐 공작실은 경극원 휘하에 예속되어 완전한 자주권은 없었다.
하지만 장훠딩은 독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유는 정말 보수적이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조직에 의지해야 해요.” 그녀는 전우경극단에서 중국경극원까지 오랜 기간 동안 계속 극장이나 학교의 계획대로 했다.
그래서 그녀는 여러 문제에 있어 매우 간단 명료한 판단을 한다. 예를 들어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공연을 했는데 공연 기회가 줄어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녀는 ‘물론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극단을 떠나 희곡학원으로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극단에서 오래 지내면서 힘들기도 했어요. 그때 희곡학원에서 저를 초빙해줬고 저도 즉시 응했어요. ”
‘아이를 낳은 것이 예술과 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그녀는 “영향을 주더라고 낳아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리원민은 과거 전통극 업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배우들은 극단을 키워야 했어요. 하루 노래를 하지 않으면 극단 사람 모두 밥을 먹을 수 없었죠. 이렇게 잔혹한 생존 법칙 아래 단련된 사람은 모두 몸도 건강하고 열정도 넘치는 고강도 공연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장훠딩은 체력에 있어서는 그렇게 강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 채식만 해서 몸이 좀 약했다. 체력부족으로 중간 휴식 시 그녀는 무대 뒤에서 과자를 먹으며 보충했다. 나이가 들자 목소리나 파워 모두 더 쉽게 따라갈 수 없었다.
연령과 신체상의 변화에 대해 장훠딩은 결코 소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솔직하고 대범한 태도로 “지금 이 나이를 과거와 비교할 수는 없죠. 예전처럼 공연할 수 없다면 공연하지 말아야죠”라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연기를 지도했던 완(万)선생님은 자주 그녀에게 “훠딩, 너는 너무 직설적이야”라고 말했다.
그녀의 일하는 방식에는 언제나 조금은 순응적이고 피동적인 부분이 있다. 그녀는 <중국신문주간>에게 “나는 무언가를 개척해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하거든요”라고 말했다. 당시 그녀는 왕자웨이가 찍은 자신의 다큐멘터리에 후반녹음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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