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쿼제(八廓街)의 영혼을 찾아서I
- 바쿼제(八廓街)는 라싸(拉萨)의 영혼이다. 이 곳은 수십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의 다른모든 도시들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도시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경제와 주민생활이 빠르게 성장한 반면 이전의 평화로움은 사라졌다.
- 진상욱 기자 amote521@gmail.com | 2015-11-13 10: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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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
기자/류단칭(라싸(拉萨))
라싸는 베이징(北京) 시간을 사용하지만 이곳의 모든 것은 베이징보다 두 시간 느리다.
새벽 6시, 조캉사원(大昭寺, 다자오스) 입구는 칠흑같이 어둡다. 낮은 하늘에 구름이 두껍게 깔리고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이 모든 것이 베이징 4시의 풍경이다. 해가 뜨기 전까지 라싸는 한여름이지만 절기상으로는 베이징의 입추와 비슷해 빗속에 있으면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미 수 백 명의 사람이 비를 맞으며 땅에 엎드려 무릎을 끓고 절을 한다. 종소리가 끊어지다 이어지다 하는 조캉사원의 문 앞에 공양된 수천 개 등의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불자들이 합장과 오체투지를 하며 연신 몸 전체를 땅에 붙인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사람들이 앉았다 일어났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소리뿐이다. 이들 동작에는 두려움, 경외, 숭배가 뒤섞인, 질서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내적 질서가 담겨있다.
하루 24시간 중 조캉사원이 온전히 티베트인의 것인 시간은 새벽 몇 시간뿐이다. 다른 시간에는 광장의 짙은 향불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젊은 티베트 청년들이 보안검사대에 서서 밀려들어오는 수십 만 관광객들을 보고 있다.
몸을 땅에 붙이고 무릎을 꿇어 절하는 이들에게 날이 밝은 후의 세계는 번화하면서도 낯설다.
인기 관광지
라싸은 영혼은 바쿼제이고, 바쿼제의 중심은 조캉사원이다.
1500년 전, 문성공주(文成公主)가 12세 석가모니(释迦牟尼)의 등신상을 가지고 티베트로 들어가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티베트인들의 오래된 전설에 따르면, 라싸의 지형이 나찰(罗刹)요괴의 모양과 같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문성공주가 요괴의 관절마다 절을 세워 나쁜 기운을 눌렀는데, 많은 절 중에 조캉사원만 요괴의 심장위치에 지어졌다고 하니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1,500년 동안 티베트인들은 조캉사원을 돌며 불경을 읽고 멀리 목축지에서부터 현지 특산물과 음식, 수공예품을 들고 참배를 오는가 하면 조캉사원을 중심으로 살면서 점차 최초의 물물교환과 자생적인 시장—바쿼제의 전신이 생겨났다.
라싸 구 시가지에서 바쿼제는 점차 모든 사람이 아는 전경도(转经道)와 상권이자 티베트족 사람들이 말하는 ‘신성한 길(圣路)’이 되었다. 티베트(西藏)에는 가장 신성한 전경권(转经圈) 세 개가 있다. 첫 번째는 포탈라궁, 약왕산(药王山), 마반산(磨盘山), 가상대(加上大), 소소사(小昭寺)를 둘러싸고 한 바퀴를 도는 코스이다. 티베트어로 ‘투이랑(堆廓)’이라 하는 이 코스는 가장 ‘위의 고리’라는 뜻으로 범위가 가장 좁고 가장 신성하다. 두 번째는 ‘바쿼(八廓)’로 범위가 약간 넓고 ‘두 번째 고리(次圈)’라는 뜻이다. 세 번째 코스는 흡채강(恰彩岗), 마색다붕(马索多崩)、공덕림(功德林), 각종로강(角宗鲁康)을 둘러 한 바퀴 도는 ‘링코르(林廓)’로 ‘큰 고리(大圈)’라는 의미이다.
바쿼제 거리는 1km로 길지 않다. 35개의 골목이 조캉사원을 휘감으며 구불구불 오래된 도시로 이어지고, 회족, 티베트족, 네팔의 소상인들이 모여사는 주민 뜨락 199개가 있다. 매일 전경(转经-돌면서 기도하는 수행방식)을 하는 불자들이 바쿼제를 돈다. 절이나 오체투지로 이마에 딱지가 앉은 사람들도 많다.
이 거리에는 사람보다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조캉사원의 승려 니마츠런(尼玛次仁)은 역사, 문화,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꽃들 가운데서 세상사의 변화와 풍물의 변천, 그리고 조금씩 번화 해가는 조캉사원과 바쿼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번화한 세계의 질서와 규칙에 익숙해져 있다. 중국어(표준어)도 잘하고 말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 급해지면 까치발까지 한다. 그렇게 깡총거리는 중에 잽싸게 초조함을 드러낸다.
1985년 조캉사원에 들어올 때 니마츠런은 이 곳에서 30년을 기다렸다. 까만 얼굴에 온몸에 조급한 기운이 역력하고 몸에 두른 검붉은 승려 복을 제외한 말과 행동은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려나 말하는 속도와 말투에서 그가 매우 똑똑하며 지쳐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생활에 지쳐가지만 그는 벗어나려 서두르지 않는다. 한편으로 원망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대응하는 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좋은 교육과 먹고 입을 것 걱정 없는 생활, 틀림없는 안목 등 시대는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의 운명은 티베트의 변화에 거의 달라붙어 한발한발 오늘까지 왔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에게서 일부를 가져갔다. 둘 중 어느 것이 많은지 말하기가 어렵다.
오후 5시를 향하고 있는 시간에도 조캉사원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니마츠런은 단체관광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마에 땀까지 흘리며 큰 소리로 설명한다. 너무 크게 외치다 보니 첫째줄 사람들 얼굴에는 가끔 침까지 튄다.
나마츠런은 사람들이 얼굴에 튄 자신의 침을 닦을 때마다 사과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 상관 없이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섰다. 여행객들은 내륙에서 온 전통 라마불교 신자들이다. 이들은 나마츠런을 ‘대사(大师)’라 부르며 인사를 하는가 하면 보이스레코더를 그의 입 주변에 대거나 옷을 잡아당기고 팔을 집는 것은 예삿일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나마츠런은 조캉사원 역대 달라이라마가 경전강론을 인도하는 공터에 서서 모두에게 거듭 말한다 “금색 항아리에 담긴 물은 소방용이 아니라 몇 백 년 역사를 지닌 유물입니다. 당시 20일 동안 계속된 경전강론법회에 참석했던 스님들이 드셨던 밥을 지은 물이죠.”
말을 마친 후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며 iPhone6를 가지고 위쳇(WeChat)을 자유자제로 사용하는 이 승려의 말투가 더욱 강경해지고 태도는 더욱 단호해졌다.
많은 인파 속에 니마츠런이 이끄는 팀이 개인 여행객들로 계속 흩어졌다. 어슴푸레한 등불 속에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통에 그의 이야기소리가 몇 번이나 파묻히는 바람에 까치발을 들어 표시해 뒤쳐진 일행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손님맞이, 입장권 구매, 지도자에게 설명—니마츠런이 매일 하는 가장 주된 일이다. 내일은 입장권판매 당번이라 더욱 바쁘다고 했다—할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 그나마 일부는 상주임원이라 스님들이 돌아가며 입장권을 팔고 있다.
두 시간 후 날이 어두워지고 조캉사원이 문을 닫고서야 니마츠런도 바빴던 하루를 끝내고 20여명의 불자들을 자신의 수행실로 안내해 오렌지사탕과 냉차를 나눴다. 불자들은 잠시 앉았다가 각자 탁자에 100위안짜리를 두고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줄줄이 나갔다.
전형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수행실은 조캉사원 맨 위층에 있어 향기가 올라오고 법문과 티베트장식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사탕과 음료는 요즘 유행하는 것들이다. 방에는 고서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니마츠런은 그 중 한 권을 뽑아 보더니 다시 꽂아넣고는 풀이 죽어 의자에 앉아 “솔직히 말하면 불경 읽을 시간이 거의 없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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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캉사원이 낮아졌다
니마츠런은 전에는 조캉사원이 많이 개방되지 않았고 1980~1990년에 조캉사원에서 대학 같은 청년시기를 보냈다고 전했다.
그 때는 그의 전성기였다. 매일 매 순간 조캉사원의 정원마다 다양한 스승님들의 법전강의가 있었다. 난이도와 내용이 다양해 제자들이 자신의 실력과 수준에 따라 다른 과정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그때는 식당도 없어 법전강의가 끝나면 방으로 돌아와 작은 화로로 밥을 지어 먹었다.
그 시절 나마츠런의 생활은 가난했다. 라마불교의 엄격하고 뚜렷한 위계질서 속에서 그는 가장 높은 직급의 승려가 아니었다. 이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기란 어려웠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가 맡은 일은 사원을 물청소하고 등유를 채우는 일이었다. 바깥의 넓은 세상은 그와 관계가 없었다.
이런 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의 니마츠런는 인물이 된 셈이다. 이틀 전에는 관광국 지도자 두 명이 찾아와 그에게 조캉사원이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문을 닫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람들이 돈을 싸 들고 오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1분 늦게 열면 손해가 얼만데.”
그들의 제안을 거스를 수는 없었지만 걱정도 됐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여행객들에게 “건물 안에서 뛰지 마세요. 콘크리트가 아닌 토목구조라 뛰면 바닥이 흔들립니다.” 라고 거듭 주의를 주는 일이었다. 그는 옆의 비계를 가리키며 “전에 조캉사원은 10년에 한 번 수리했는데 지금은 해마다 보수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방문객들을 감당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현재 조캉사원 스님들이 공부하는 법당은 텅 비어있고 자리도 어수선하다. 일부 스님들이 남아있다. 지붕이 높고 깊어 흐릿한 벽화와 들리는 기름 등 아래 여행객들의 진입이 금지된 이곳은 장한 기운이 서려있다.
니마츠런이 손을 들어 저쪽을 가리키며 “사원 문을 너무 일찍 열어서 새벽 6시 30분부타 7시 30분까지밖에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어요. 손님들이 오시기 시작하면 관리하느라 바빠지니까요.”라고 말했다.
관광객이 입장권을 들고 가족에게 전화 해 “나 조캉사원 왔는데 너무 재미있어.” 라도 이야기 하는 것을 몇 번 들었다. 들을 때마다 조금 서글프다. “티베트족 사람들이 중국어(표준어)를 알아 듣는다면 이 말을 듣고 매우 슬플 거에요. 조캉사원은 참배하는 곳인데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죠?”
“조캉사원에서 재미있게 논다” 전에는 이 얘기를 들어도 참배객들과 마찬가지로 슬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관광이 따른 가져온 발전과 편리를 누리면서 이러한 일들을 이해하게 되자 서서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85위안이나 내고 들어가는데 재미 없으면 당연히 돈이 아깝죠.”
저녁에 관광객들이 돌아가면 그는 다른 스님들과 함께 사원에 버려진 빈 병과 담배꽁초를 줍는다. 공부를 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사원은 티베트의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으로 지역경제의 손익등락을 좌우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으면서 예전의 티베트 경제모델이 바뀌고, 이에 따라 조캉사원 역시 더 많은 경비를 사원을 보수, 유지하는 데 사용하게 되었다. 니마츠런은 관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스님들 중에 온전한 교육을 받았기에 관념이 대담하다.
요 몇 년 조캉사원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조캉사원은 원래 바쿼제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는데 바쿼제가 발전하면서 호텔과 식당이 늘어나고 생활용수 배출이 크게 문제되었다. 배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00년 된 전경도는 여러 차례 석판을 부수고 열어젖혀 수도관을 묻은 후 다시 덮어야 했다. 몇 번의 보수 끝에 거미줄 같은 전선이 모두 지하로 들어가고 물과 전기가 안전하고 편리해 졌으며 길거리도 물로 씻은 듯 깨끗해져 어디서든 전에 없던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다. 깨끗한 화장실, 편리한 생활, 안전한 치안 등 이전에 비하면 거의 새로운 세상이다. 그러나 바쿼제의 길은 점점 높아져 비가 오면 물이 조캉사원으로 직접 들어왔다. 전에는 없던 일이다.
바쿼제의 모든 변화가 이 오래된 사원을 변화시키고 있다. 천년 동안 사원은 바쿼제와 연관되어상생하며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언젠가는 니마츠런이 조캉사원을 나와 바쿼제를 돌면서 건물들이 높아지고 호텔이 지어지고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천지를 개벽시킬 열의를 느꼈다.
니마츠런은 불경을 외우고 아침저녁으로 수업을 듣고 스승을 따라 고서를 공부하는 평범한 스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쿼제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그 역시 점차 존중받는 인물이 되었다.
관리위원회도 바쿼제와 조캉사원광장 개조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조캉사원광장에 가로등을 보수할 때는 난징(南京)과 충칭(重庆)의 디자이너를 기용해 5가지 방안을 디자인했다. 심혈을 기울여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티베트 시의 문양을 사용한 것이 보기에도 많은 공과 비용, 결심을 들였다. 그러나 니마츠런은 최종 선택된 디자인을 보고 매우 놀랐다. “정말 애썼지만 설계사가 모르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어요.”
가로등 디자인은 화려하고 복잡했다. 받침은 삼층 불탑으로 가장 아래층에는 6자진언이 새겨있고 곳곳마다 티베트의 스타일을 담고 있어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보였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에게 탑은 가로등 받침으로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또한 6자진언은 반드시 방 안의 제일 높은 곳에 걸어야지 아래에 두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이들 부호는 종교적으로 엄격한 등급 상징이 있다. 디자인을 본 후 니마츠런은 당황하며 “불자들이 보면 욕해요. 이렇게 만들면 안되요.”라고 말했다.
디자이너가 밤을 세워 수정해 등 갓을 천주(天珠)로, 6자진언을 ‘吉祥如意(길상여의)’로 바꾸었지만 불탑의 모양은 바꾸지 못했다. <중국신문주간(中国新闻周刊)>과의 인터뷰에서 니마츠런은 바쿼제의 모든 보수 중에는 이 같이 티베트의 특색을 남기려 노력했지만 몰라서 고심하다 결국 상반된 결과를 낳게 된 경우들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다음 총회에서 니마츠런은 “바쿼제를 개조할 때 종교적인 상징을 남용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스님들도 동의했지만 어떤 것들이 종교적인 상징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옛 것을 살려 개조한다’는 열정으로 새로 지은 은행의 벽을 빨강색으로 보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또한 금기였다. 빨강색 벽은 사원에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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