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버위(夏伯渝), 의족을 하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다
- 두 다리에 의족을 착용한 69세의 산악인, 이것이 샤버위가 다른 산악인들과 다른 특징이다.
고령과 신체 장애는 그가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 김지영 bnu0827@gmail.com | 2018-06-27 10: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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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전 샤버위(夏伯渝)는 베이스캠프에서 사진을 남겼다. 사진/응답자 제공 |
[기자/ 저우톈(周甜)] 5월 25일 오후 2시. 훠젠쥔(火箭军)병원 병실에는 꽃 바구니가 병동 입구까지 놓여 있었고 의족을 한 한 사람이 그 꽃 더미 속에 있었다. 69세의 샤버위는 다리를 틀고 병상에 앉아 있었고 손가락에는 거즈를 두르고 있었다. 이는 에베레스트에서 동상에 걸렸던 손가락이었고 얼굴 몇 곳에도 동상에 걸려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거의 휴식을 취할 틈이 없었으며 매일 여러 언론사 기자의 방문을 받았다. 병실 안은 늘 시끌벅적하고 모두들 거의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를 받고 있는 샤버위는 지친 기색과 귀찮아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눈을 크게 뜨고 높은 목소리로 43년간 다섯 번 에베레스트 등반에 도전한 이야기와 산정상에 오른 과정을 설명했다. 1975년 26세의 샤버위는 국가 산악팀 대원 100여명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올랐다가 동상으로 두 발을 잃었다. 그는 43년 만에 의족을 한 채 다섯 번째 도전 끝에 끝내 정상에 올랐다.
샤덩핑(夏登平)은 아버지가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등정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고 부친의 산악인으로서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지켜봤다.
아들인 샤덩핑이 보기에 샤버위에게 있어 에베레스트는 대부분의 등산가들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제가 보기에 아버지는 등산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에베레스트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 목표 하나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1975년에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했고 두 발을 잃었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샤덩핑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이름인 샤덩핑에 대해서도 샤버위와 아내는 각기 다른 의미를 담아 이해를 하고 있다. 샤버위는 아들의 이름은 평지를 걷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고 그의 부인은 산악인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풀이하고 있다.
“올해도 제가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2018년 5월 14일, 10시 41분, 샤버위는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해 중국에서 최초로 의족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
“사실 그렇게 흥분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올라갈 것 같았고 오늘 목표를 이룬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산에 오른 뒤 샤버위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산 정상에서 취할 포즈까지 이미 생각해 두었다. “푸른 하늘을 손으로 가리키며 사진 한 장 남기고 또 국기를 들고 한 장 찍고 싶었어요.” 샤버위 말고도 당시 정상에 오른 등산객 몇 명이 있었는데 그가 의족을 하고 나타나자 사람들이 다가와 그와 사진을 남기려 했다. 그렇게 되어 샤버위는 원래 했던 계획대로 포즈를 취할 수 없었다. 10여 분 뒤에 눈보라가 휘몰아치자 사람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혼자 찍은 독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모진 눈보라 때문에 하산 도중 그의 안경에는 얼음이 맺혔고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닦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장갑에서 손을 꺼내 얼음을 걷어냈다. 불과 몇 초 만에 장갑에 눈이 찼고 다시 꼈을 때 장갑이 금세 얼어 버렸다. 그의 손은 동상에 걸렸다.
베이징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올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기 힘든 일이죠.” 등산 과정에서 위험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샤버위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매번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올라갈 수 있을 것’과 ‘올라갈 수 없을 것’ 두 가지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매번 출발하기 전에 그는 가족들과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했다. 또 그는 아내에게 어떤 보험을 사 뒀는지를 알려 줬고 전기 요금을 내는 날짜까지 귀띔해 주기도 했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마다 샤버위는 일기를 썼다. 가끔씩 글을 쓰기 힘든 조건에서 그는 녹음으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남겨두었다. 그는 앞으로 그 동안의 등산 일기를 묶어 책 한 권을 펴낼 계획을 갖고 있다.
샤버위와 에베레스트와의 인연은 4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그는 체육학교에서 축구를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그 학교가 더 이상 수업을 하지 않게 되자 공장에 배치돼 노동자로 일했다. “그때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체육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거든요.” 여러 해가 흐른 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던 중 칭하이(青海)산악팀에서 그가 일하고 있던 공장에 산악 운동원을 선발하러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축구를 포기하고 등산 쪽으로 전향할 생각이 없었으며 등산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에베레스트는 그에게 있어서 아주 먼 곳에 있는 존재였다. 8,848미터라는 산의 높이는 그에겐 지리 교재에서나 나올법한 숫자에 불과했다.
건강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샤버위는 등록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팀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당신 대단해.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잖아.”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샤버위는 국가대표 산악팀에 들어간 이유 중 주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던 게 가장 컸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축구를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1975년 국가대표 등산팀 100여명의 대원들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했고 8,600m에 이르렀을 때 심한 눈보라에 시달렸고 팀은 며칠 밤을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으며 극심한 체력 저하로 숨진 대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게다가 단체 음식과 산소 부족으로 결국 집단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고 내려오는 도중에 티베트 출신 동료가 침낭을 잃어버리는 사태도 발생했다. 그때 샤버위는 동료들보다 추위에 더 잘 견디는 편이라 ‘화신옹(火神爺)’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두말없이 자신의 침낭을 동료에게 줬다. 그 뒤에 샤버위는 바로 신발을 벗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중에 신발을 벗겼을 때 그는 자신의 발등이 어느새 블루핑크로 변했다가 보라색으로 변하고 최종적으로 검은 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때 그는 발이 동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26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했던 샤버위는 장애인이 되었다.
“걷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산에 오를 생각을 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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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른쪽 사진: 5월 25일, 다섯 번째 도전 끝에 에베레스트 정 상에 오른 샤버위가 베이징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 병상에서 취재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샤버위의 모습. 사진/ 본지기자 둥제쉬(董潔旭) |
일반적으로 종아리 절단은 무릎 아래쪽 2/3의 곳에서 이뤄지며 이렇게 해야만 의족 착용이 편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수술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축구를 생각했다. “최대한 적게 절단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요.” 이것은 당시 그의 유일한 요구였다. 그 요구에 따라 첫 절단수술은 괴사된 두발 부위만 잘라냈다.
축구에 대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등산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저는 체력과 추위에 견디는 능력과 적응력 면에서 모두 산악 등반에 적합하다고 느꼈습니다. 등산 과정에서 자극적이고 모험적이며 도전적인 과정들이 당시 젊은 저의 도전정신을 건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등산 과정에서 얼음이 깨지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모험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보호책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69세의 샤버위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등산할 때 사람과 자연의 친근함을 느낄 수 있고 그 점이 그가 등산에 매료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슴 아픈 사실은 두발을 잃은 것이 등산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큰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부분이었다.
1975년 말 한 외국인 의족 전문가가 샤버위의 건강 상태를 면밀히 점검한 뒤 “당신이 의족을 착용하게 되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걷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산을 오를 수 있겠냐”며 회의론을 폈다. 샤버위는 이 전문가의 판단을 굳게 믿었다.
절단 수술 후 종아리 끝의 뼈가 피부와 살로 감싸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났고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뼈에 살이 찌려면 뼈를 깎아 내는 치료를 해 뼈에 피가 흐르게 해야 한다. 뼈에 신경이 없기 때문에 괄골(刮骨)치료는 허리에 마취제를 주입해야만 했고 매번 마취 후 다음날 그는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통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취를 할 때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고 며칠이 지나도 온 몸에 기운이 없었다.
“그때 저는 하루 종일 운동을 해야 했고 하루도 멈출 수 없었어요.” 그는 의사에게 허리에 마취제를 투약하지 않고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의사는 그에게 상상할 수 없을 아픔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아프더라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몇 분만 참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나중에야 정말 아프고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리를 묶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차버려서 날아났을 거예요.” 샤버위는 병상에 앉아 <중국신문주간>과의인터뷰를 진행하며 추억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취제를 주입하라고 할 때 마취제를 써야 했던거예요.”
병상에 앉아 있는 샤버위는 무릎 아래쪽 종아리 부위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들 샤덩핑이 태어난 때는 아버지가 두 발을 잃은 지 8년째인 해였다. 아들은 부친의 두 종아리를 다 가지고 있을 때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몇 차례의 절단 수술을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최소 세 번은 했던 거로 기억해요.” 1975년 이후 샤버위는 여러 해가 넘도록 산에 오르지 않았지만운동을 멈춘 적이 없었다. 샤덩핑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의 상처가 늘 파열되어 있었고 아들은 아버지가 늘 거즈로 상처를 감싸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 보니 도중에 의족이 떨어져 바닥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었고 고통 때문에 그곳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경찰에 발견돼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괜찮아, 잠깐 쉬면 돼.” 샤덩핑은 아버지가 이 말을 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부친은 다음날 자전거를 타고 또 출근길에 올랐다.
정상까지 등정하다
샤버위는 스스로도 운명의 불공평함을 원망했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또 새로운 타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3년에 그는 림프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6인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병실 안에는 슬픔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낮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밤에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였다가 다음날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다시 병원에 왔다. 그렇게 한달 가까이 지나 완치가 되었고 지금까지 암이 재발되지 않았다.
1975년 절단수술과 1993년 림프암 판정을 받았던 일은 그의 기억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고 마치 기억 속에서 지워진 듯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고통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집요하게 물으면 “길고 긴 과정이었다”고 간단하게 묘사할 뿐이었다. 그는 경험했던 고통보다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던 기쁨을 더 많이 공유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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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사진: 공원에서 체력훈련을 하고 있는 샤버위. 사진/ 응 답자 제공 |
그는 의족을 착용한 채 CCTV방송국의 ‘불가능에 도전하다’라는 프로그램 현장에서 자신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이야기를 풀었다. 그가 바지를 올리고 의족을 보여주자 사람들은 “와,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른 모습이었구나”하며 감탄을 쏟았다. 그가 착용한 의족은 이미 그의 몸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그는 의족의 도움으로 길을 걷고 운전도 하며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산행 후 절단수술을 받은 지 40주년이 되는 2014년에 그는 의족을 하고 다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이는 그가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 눈사태를 만난 경우로 그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16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매장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네팔 정부는 그 해 에베레스트 등정을 취소했다. 2015년에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샤버위는 네팔 지역에서 100년 만에 일어난 지진을 맞게 되는데 지진으로 인해 눈사태가 발생해 베이스캠프에서 겨우 재난을 피했다. 그는 “이왕 살아 있으니 계속 에베레스트에 오를 것”이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2016년에 그는 8,750m높이의 고도에서 정상까지 100m떨어진 지점까지 올라갔다가 눈사태의 습격을 당해 하산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일생에서 내린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 샤버위는 “다섯 명의 젊은 셰르파들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주저 없이 끝까지 올랐을 거예요. 그 높이에 휩쓸려 위험하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갔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 해 샤버위는 67세였고 네팔 정부는 장애인의 등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례를 발표했다. 그는 이번에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영원히 정상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0m정도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신 인생의 높이와도 같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위로했다.
“완벽하지 못하잖아요. 제가 보기에 이상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화답했다.
그는 2017년에 텅거리(騰格里) 사막을 넘어 고비사막과 암벽을 넘었다. 이 모든 것은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한 훈련 계획을 세웠다. 운동량을 점점 늘여 마지막 단계에서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선 무산소 운동을 하고 난 뒤에 샹산(香山)을 등반했다. 그 동안 패혈증에 걸려 의사는 그의 몸 상태로 다시는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사의 말도 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혈액순환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전에 그는 다시 산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했던 의사를 찾아가 건강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수 있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앞에는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네팔 정부는 장애인 등산 금지령을 엄격히 집행했다. 그는 이후 인권 단체를 통해 네팔 정부와 법정 싸움을 벌여 이 금지령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샤버위는 다섯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등정에 성공했다. 69세에 그는 끝내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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