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신문주간 온라인팀]] 선양 고궁은 청나라 초대 황제인 누르하치(奴儿哈赤)와 2대 황제 태종(太宗)이 선양에 건립한 궁으로 1625년에 착공하여 1783년 완공되었으며, 총 160여 년의 시간에 거쳐 최종적으로 완공되었다. 면적은 약 6만㎡이며, 72만㎡인 자금성(紫禁城)에 비하면 12배 이상이나 규모가 작다.
수도의 황궁으로 건립되었으나 1644년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한 뒤로 이곳은 배도행궁(陪都行宫)이 되어 황제가 동북 지역을 순회할 때 머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동쪽으로 조상을 제사지내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 머무르곤 하였다. 1955년 선양고궁박물관으로 되었고,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궁전 내부는 크게 동로·중로·서로로 나뉘며, 모두 90채의 건물과 20개의 정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로에는 황제와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던 대정전(大政殿)이 있고, 대정전 앞에 좌우로 각각 5개의 정각이 있는데 이를 십왕정(十王亭)이라 한다. 중로에는 선양고궁의 정문인 대청문(大清门)을 비롯하여 숭정전(崇政殿) ·봉황루(凤凰楼)·청녕궁(淸宁宫) ·동소(东所) ·서소(西所) ·태묘(太庙) 등이 있다. 서로에는 <사고전서(四库全书)>가 수장된 문소각(文溯阁)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전통과 규칙을 중시하는 한족(汉族)의 건축물과는 달리, 북방 기마민족으로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만주족(满洲族)의 특성이 건축기법에도 반영되어 있다.
선양 고궁은 베이징 고궁과 병존하는 중국의 2대 고대황궁 중 하나이다. 선양 고궁과 베이징 고궁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연계가 있다. 첫째, 베이징 고궁은 명나라, 청나라의 전국통일 정권의 궁전이고, 선양 고궁은 명나라말년과 청나라 입관전 건립한 지방정권의 궁전이다. 둘째, 청나라때 선양 고궁의 황제는 베이징 고궁 황제의 선조이다. 1644년 청나라가 입관한 뒤 첫 황제인 순치(顺治)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베이징 고궁으로 옮겨갔다. 셋째, 베이징 고궁의 건축은 중원 한족(汉族) 문화의 풍격과 특점을 대표하나, 선양 고궁은 만족(满族) 문화의 특점을 돌출하게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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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고궁의 정전이자 동로의 중심 건물로 처음 건설되었을 때의 명칭은 대전(大殿)이었으나 1636년 독공전(笃恭殿), 강희제 때 대정전으로 개칭했다. 팔각형으로 된 특이한 구조라서 언뜻 보면 정자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정전이다. 유목민의 이동식 텐트를 본떠 지었다고 한다. 황색 유리기와로 지붕이 덮여 있으며 정면의 두 기둥에는 금도금한 용조각이 감겨 있다. 누르하치, 청태종, 순치제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십왕정(十王亭)
길이 195m, 너비 80m의 대정전 광장 양쪽 좌우에 있는 열 채의 전각이다. 동쪽에는 좌익왕정(左翼王亭),양황기정(镶黄旗亭),정백기정(正白旗亭),양백기정(镶白旗亭),정람기정(正蓝旗亭)이, 서쪽에는 우익왕정(右翼王亭),정황기정(正黄旗亭),정홍기정(正紅旗亭),양홍기정(镶红旗亭),양람기정(镶蓝旗亭)이 있다. 좌익왕과 우익왕, 팔기의 집무실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대청문(大淸門)
선양고궁의 정문으로, 오조문(午朝门)이라고도 부른다. 황색의 유리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이 출입에 사용되었다.
숭정전(崇政殿)
중앙 일곽의 남쪽에 있는 정전으로 청태종이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였으며 청나라 역대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양고궁에 머물 때 이곳에서 정사를 돌봤다. 정면 5칸이며 전각 바깥의 정원 좌우에 비룡각(飞龙阁)과 상봉각(翔凤阁) 7칸이 있다. 규모는 큰 편이 아니며, 건륭년간에 종종 중수하여 청조의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상봉루(翔凤楼)였으며, 청나라 태종(太宗, 1636~1643) 때 건립되었다. 선양고궁에 있는 청녕궁(淸宁宫)의 문루(门楼)로서 당시 성징(盛京, 지금의 선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헐산식(歇山式) 지붕에 황금색 유리기와를 얹고 테두리는 녹색으로 장식하였다. 건물 주변에 회랑을 둘렀으며, 내부에는 조각으로 장식한 들보와 그림을 그린 기둥을 세워 화려하기 그지없다. 선양이 아직 청나라의 수도일 때 태종 황태극(皇太极)이 이곳에서 정사를 논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베이징으로 천도한 뒤에는 실록, 옥첩, 어진, 옥새 등을 보관하던 공간이 되었다. 선양고궁의 주체 건물 가운데 하나로서 총 면적 1270.65㎡에 이르는 고대 채색화가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바깥 처마의 채색화는 금박을 입힌 행룡(行龙)·승룡(升龙)·강룡(降龙) 등을 주제로 하며, 푸른색과 녹색이 기조를 이룬다. 안 처마의 채색화는 소동파(苏东坡)를 그린 채색화로서 빨간색이 바탕을 이룬다. 이들 채색화는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하며 황실의 그림답게 위풍당당하다. 그러나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乾隆帝) 이후 개수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표면이 갈라지는 등 훼손되고 오염되었다. 선양고궁은2004년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과정에서 봉황루도 개수되어 '선양 8경'의 하나로 꼽히던 황실의 금빛 찬란한 풍채를 회복하였다. 채색화도 전면적으로 복구되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탈락된 그림은 “낡은 것을 그대로 둔다”는 원칙에 따라 보충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청녕궁(清宁宫)
원래 이름은 정궁(正宮)이었으며 청태종이 즉위하기 전에 왕부(王府)가 있던 자리였다. 남향이며 동서로 약 22m, 남북으로 약 18m의 전벽을 쌓고 넓은 뜰을 만들었다. 청녕궁에는 청태종과 황후가, 부속전각인 관저궁(关雎宫), 인지궁(麟趾宫), 연경궁(衍庆宫), 영복궁(永福宫)에는 청태종의 후궁과 궁녀들이 거처했는데 이 중 영복궁에서는 효장문황후(孝庄文皇后, 1613.3.28~1688.1.27)가 살면서 순치제를 낳았다.문소각(文溯阁)
<사고전서(四库全书)>를 보관하기 위해 건륭 46~47년(1781~1782)에 세워진 정면 6칸의 전각이다. 남북 약 15m, 동서 26여m로 이루어졌으며 외관은 2층이나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다. 북경고궁의 문연각과 비슷하나 그의 외관은 4분의 3 정도의 크기이고 열하피서산장의 문진각과 같은 규모이다.
희대(戏台)
건륭 46~48년(1781~1783)에 세워졌으며 청조 황제가 동북 지역을 순회할 때 이곳에 머물며 연극을 관람하는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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