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시대의 기치, 70년 후에 모이다

“그 당시에는 자신을 위해서, 또한 인민을 위해서였다. 태어나면 죽었는데, 모두가 같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쉽지 않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10-03 1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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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기자/쉬톈

 

9월1일 대열병식까지 이틀을 남겨놓은 날이다.
새벽5시30분, 이 시간은 92세의 제8로군 노병 자바이선(贾柏森)의 평소 기상시간이다. 그는 ‘항일전쟁노병방진’의 회원이 투숙하는 수도호텔을 나와 산책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의사는 자바이선에게 요즘 몇 일간 고혈압 증상이 있으니 안정을 취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점심에 2시간 동안 쉬는 시간에 그는 누웠다가 바로 다시 일어나 자신의 항전 이야기에 대한 신문을 읽고 또 읽었다.
91세의 전 제8로군의 적 후 무공대원이었던 란펑원(兰凤文)은 수도호텔에서 40년만에 노전우를 만났다. 란펑원은 노전우와 매일 같이 만나 항일전쟁 때의 일부터 최근 근황과 건강상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이틀 동안 그는 매일같이 날씨를 확인하며, 열병식 당일 날씨가 쾌청하기를 빌었다.
저녁 8시30분, 67세의 황후이난(黄慧南)은 마음속 고요한 호수에 돌맹이를 던진 듯 했다. 그녀는 북경시위원회 통전부(统战部)로부터 익일 오후 4시 전에 베이징 신챠오호텔에 도착하여 9월3일 오전 열병식과 당일 저녁 인민대회당에서 열리는 문예만찬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전화를 끊고 난 후 그녀는 행사가 끝난 뒤에 팔보산(八宝山)에가서 아버지 황웨이(黄维)와 만나 이 날의 행사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당일 받은 기념 배지을 아버지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웨이리황(卫立煌)의 손자인 59세의 웨이즈(卫智)는 열병식 관례명단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70주년 기념배지’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백단대전에 참가했던 참전노병


자바이선은 92세가 되는 올해 ‘승차방진(乘车方阵 차를 타고 사각형으로 대열을 만드는 것)’형식으로 항일전쟁 기념 및 세계 반 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가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7월 초 그는 공군이 선발한 7명의 항전 노병과 함께 9월3일에 열리는 대열병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수 십년 동안 그는 열병방진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단지 1999년 국경 50주년 열병식과 2009년 국경 60주년 열병식 때 관례 귀빈으로 참석한 것이 그가 참가한 열병식의 전부였다. 60주년 열병식 당시에는 ‘중국 인민 항일 전쟁승리 60주년’을 기념하는 배지를 받았다. “아버님은 저에게 꼭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자바이선과 함께 참가한 그의 사위가 <중국신문주간> 기자에게 말했다.
공군이 선발한 8명의 노병들은 모두 병원 신체검사를 통과하였다. 신체검사를 마친 후 전문가의 손길아래 열병전용복장을 맞췄다. 

 

자바이선(贾柏森)

1941년, 제18그룹군 129사단 385여단769단3영 통신반 부반장 자바이선은 백단대전에 참가함.

란펑원(兰凤文)

1942년, 란펑원과 제8로군 동자오위안 무공부대의 전우들은 8명의 괴뢰군 소대를 생포하였다.

황웨이(黄维)

항일전쟁 기간 동안, 국군 장령이었던 황웨이는 쑹후(淞沪)대전, 우한(武汉)대전, 뎬난(滇南) 보위전에 참전하였다.

웨이리황(卫立煌)과 부인

1943년 웨이리황은 중국 원정군 최고 사단이 되어 일본군을 타격을 입히고, 뎬몐 (滇缅)고속도로를 개통하였다.

 

그 때부터 자바이선은 건강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매일 체력단련을 하고 오후에는 참전용사들과 함께 베이징 덩스커우(灯市口)의 공군 퇴직간부 휴양소에서 산책을 했다. 

8월20일 공군 출신 노병 8명과 기타 노병들이 함께 수도호텔에서 숙박을 시작했다. 그 중에서 공산당 노병은 제8로군, 신사군, 둥베이(东北) 항일 연합군, 화난(华南) 유격대 등 노병 전사 중 선별되었고, 국민당 노병은 주로 전면전에서 싸웠던 관병과 중국 원정군 노병 전사 중에서 선별되었다. 총 300여 명의 노병이 30여 대의 차량에 타 열병에 참여하였다.
열병 리허설에는 대부분 옆에서 간호하는 친척들이 대신하여 참가하였고, 노병들은 리허설 녹화영상을 보며, 연습을 하고, 자리를 맞추면서 체력을 보존하였다. 매일 전문 의료진들이 아침저녁으로 노병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하루에 4차례씩 혈압을 측정하였다.
다리가 불편한 92세의 자바이선은 오래 앉으면, 통증이 오고, 혈압도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는 “한평생에 단 한번 참가하는 열병식인데 꼭 참가하겠다.”고 했다. 몇 일 동안의 치료를 마친 후 그의 혈압은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의사와의 상의하여 열병식 하루 이틀 전 진통제를 맞고 열병식의 전 과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자바이선에 있어서 평생에 한번뿐인 기회는 1937년 누두교사변 후 스스로 느낀 것이다. “살아서는 하고 죽으면 말고”라는 생각이다. 1938년 7월, 한참 혈기왕성하던 14살의 소년은 이미 훼손된 집을 뛰쳐나와 몰래 집에서 몇 십 킬로미터가 떨어진 바저우(霸州)의 제8로군 주둔기지로 가 입대신청을 해였다. 그는 자신의 나이가 너무 어려 입대를 거절당할까 두려워, 큰소리로 울면서 자신의 부모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사실은 그 당시 그의 부모는 살아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그는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129사단 385여 769단 3영 12련의 사병이 되었다.
이 부대에서 수많은 명장이 배출되었다. 사단장 리우보청(刘伯承), 정치위원 덩샤오핑(邓小平)이 배출되었고, 신중국 해군의 창시자이자 개국 상장 왕홍군(王宏坤)은 385여단 여장 출신이었으며, 후에 국무원 부총리가 된 개국 상장 천시롄(陈锡联)도 769단 단장 출신이었다.
자바이선은 부대에서 빠른 진급을 통해 1940년에는 삼영 영부(三营营部)의 통신반 부반장이 되었다.
1940년 8월 중순 경, 삼영은 명령에 따라 산시(山西) 우샹(武乡)에서 산시 양췐(阳泉)지역으로 주둔지를 이동하였다. 4일 동안의 야간 행군을 마친 후 양췐시 서남쪽의 스나오산(狮脑山)에 도착하였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고, 부대원들은 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밥을 데워 먹으려던 찰나, 일본군이 스나오산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부대원들은 즉시 산 정상으로 이동하여 고지를 점령하고 우측 산 방향에서부터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자바이선은 통신병 두 전사를 데리고 교도원의 옆을 지키며 시시각각 명령을 전했다. 전투 중에 그들과 대부대가 연락이 끊겼다. 교도원은 그들을 데리고 산의 좌측에서 아래쪽으로 진격을 하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고, 교도원은 일본군의 사격을 받아 쓰려졌다. 약 30여분 동안 일본군이 세 차례 진격을 하였고, 3사람의 수류탄, 보총 공격에 후퇴를 했다.
점차 총소리가 줄어들고 일본군이 사라졌다. 차후에 자바이선은 산 우측에 있던 주력 부대가 일본군을 진격하여 쫓아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즉시 쓰러진 지도원을 살폈다. 그는 “지도원이 가슴에 큰 상처를 입어 희생되었다. 지도원을 모시고 하산하자.”고 하였다.
부대는 스나오산을 1주일 가량 지키고 우군이 정타이 철로(正太铁路)를 공격할 수 있도록 엄호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자바이선은 그 전쟁이 펑더화이(彭德怀)가 지휘하는 백단대전의 일부 전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백단대전이 끝난 후 그는 전투 영웅으로 인정받아 전투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았다.
그 이후부터 태행산(太行山)의 전역이 있을 때마다 그는 모든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과정에서 3번의 중상을 입었으며, 수많은 끔찍한 전쟁터를 경험하였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전투 중에 100명이 출격하면 겨우 18명만 살아오곤 했고, 취사병은 보급할 식량이 없어 설움의 눈물을 흘렸다. 일본 부대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는 시체만이 있었고, 사람, 소, 양의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1945년 자바이선은 싱타이 독립단의 지휘원이 되었다. 일본군이 철퇴한 이후 괴뢰부대는 싱타이에 주둔했다. 그들은 상대의 창을 노획하고 10월에 성에 들어왔다.
어렵게 승리를 얻은 후 그는 성안의 사진관에 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몸에는 제8로군의 배지를 부착하고 있었고, 누추한 무명옷, 일본군에게 노획한 외투 차림에 다리에는 행전을 차고 있었다. 이미 7년 동안 참전한 젊은이의 나이는 겨우 21세였다.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고 거울 속의 모습은 풋풋한 젊은이 같기도 하고, 침착하고 노련해 보이기도 했다.
해방 전쟁 시기에 그는 줄곧 남쪽으로 진군해 화난지역의 해방에 참여하였다. 1955년에는 소교로 진급하였으며, 2개의 3급 공훈장을 받았다. 1988년에는 ‘독립자유공훈 영예훈장’을 받았으며, 1986년에는 공군 기율 위원회 위원(부군직)에서 명예 퇴직 하였다.
전장에 참여한 후 이미 66년이 흘러 겉으로 보기에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 되었지만, 손을 흔들며 지나면서 모든 전장에서의 기억들과 젊은 시절의 혈기가 뚜렷이 떠올랐다.

 

적진 후방의 무장 부대원

자바이선과 같이 란펑원은 역시 14세에 군에 입대하였다. 그와 다른 점은 자바이선은 전면전에서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란펑원은 제8로군의 적진 후방의 무장 공작부대에 참가하였다.
1939년 제8로군 산동 종대 제5지대 사령부가 핑두(平度), 자오위안(招远), 라이양(莱阳), 액현(掖县) 등 지역에 산 지역에 근거지를 세웠다.
1941년 겨울, 자오위안현(招远县)무공 부대에 참가하였으며, 대중을 동원하고, 적을 감시하는 것이 그의 주요임무였다.
무공 부대원들은 모두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안에는 현지 군중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잘한 일이 있으면, 이름 뒤에 빨간 점을 그리고, 잘못 한 일이 있을 때는 검은 점을 그렸다. 시간이 지나자 빨간 점이 그려진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매국노에게는 우선 권고를 하고 계속해서 소용이 없을 시 진압을 했다.
그가 만난 일본군은 변장을 하고 몸에는 검정 칠을 하고 있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그는 괴뢰군과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간담이 서늘한 경험이었다.
그와 한 최씨 성을 가진 무공대원이 차를 타고 외출하던 날 괴뢰군에게 발견된 적이 있었다. 그와 함께 나섰던 무공대원은 괴뢰군에게 잡혀가고 란펑원은 차에서 뛰어내려 벽을 뛰어넘어 항일전쟁참전 군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급히 땅콩기름이 담기 항아리에 몸을 숨겼다. 혼자 집에 있던 안주인이 침착하게 항아리에 흙을 가득 부었고, 괴뢰군은 한참 수색을 하다가 기름통에 흙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는 의심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란펑원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942년 가을, 무공부대가 3명의 괴뢰군 사병을 투항시켜 주둔 지역의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저녁, 란펑원은 3명의 무공대원과 함께 괴뢰군 주둔기지로 침입하여 적진의 소대장을 포함한 8명의 소대를 생포하였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소대장이 소총을 꺼내 란펑원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는데, 이때 총알이 날아와 소대장을 즉시 막을 수 있었다.
이 때의 돌격으로 10개의 보총과 1개의 소총을 획득하였다. 란펑원은 자오둥(胶东) 군구의 표창과 격려를 받으며 소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자오둥일보>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보도하며, 란펑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란펑원은 현 무공부대의 2연대 부지도원이 되었다. 항일전쟁에 참전한 동안 그는 거의 단 하루도 편히 수면을 취한 날이 없이, 산에서 적을 급습하는 날이 대부분 이었다. 란펑원의 가족들은 이미 여러 차례 그의 시체를 확인하러 갔고, 이미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란펑원 본인도 “수 백번의 전투 끝에 자신이 살아서 돌아갈 줄은 몰랐고, 더욱이 신중국 성립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란펑원은 중국의 첫 번째 낙하산병이 되었다. 1980년 그는 공군 제41사단 부사단장의 직위로 퇴임하였다.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란펑원은 자신의 군복을 높이 들어 보여주었다. 군복의 왼쪽 가슴에는 4개의 훈장이 달려있었고, 그 중 두 개는 이미 녹이 슬어있었다. 그는 모든 훈장이 가보와 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것은 1955년에 받은 ‘중화인민공화국 3급 독립 자유 훈장’으로 코드번호는 21075입니다. 이것은 (같은 해 받은) ‘중화인민공화국 3급 해방 훈장’으로 코드번호는 30506입니다. 1988년에 받은 ‘독립공훈 영예훈장’도 있습니다.” 그가 보여준 훈장 뒤에는 C05526라고 코드번호가 쓰여 있었다. 가장 최근에 받은 훈장은 2005년에 받은 ‘중화인민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을 기념해 받은 훈장 이었다. 란펑원은 한 글자씩 공로 훈장에 쓰여진 글자를 읽었다. 고향을 떠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의 말투에서는 여전히 고향 말투가 느껴졌고, 90이 다 되가는 그였지만,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기자의 질문을 또렷이 알아들었다. 단지, 병력이 있는 관계로 말하는 것이 조금 어눌할 뿐이었다.
2015년 8월 20일, 란펑원과 자바이선 등 노병은 함께 수도 호텔로 들어섰다.
그와 함께 탄 차량에는 공산당 노병과 국군 관병, 영웅 열사의 자녀들이 함께 타 방진으로 향했다.
방진으로 향할 때 란펑원은 5호 차량에 탔다. 자리는 2열로 줄지어 있었고, 10명의 사열노병과 운전병, 군의관 등 현역 군인과 함께 앉았다. 란펑원은 톈안먼(天安门) 광장 쪽의 다섯 번째 자리에 배석하였다. 함께 탄 차량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병은 95세의 비호부대(飞虎队) 대원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모여 그날을 회고하는 말을 했다. “그 당시에는 자신을 위해서, 또한 인민을 위해서였다. 태어나면 죽었는데, 모두가 같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쉽지 않다.”라며 <중국신문주간> 기자에게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푸(黄埔)의 후손

 

67세의 황후이난(黄慧南)은 자바이선, 란펑원보다 빨리 이번 열병식 활동 참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금년 봄에 황후이난은 중공중앙 통전부(中共中央统战部)로부터 아버지의 이름, 항일전쟁 중의 직무와 경력 등에 대해 작성하여 제출하라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현대사를 어느 정도 아는 이는 익히 들어봤을, 황웨이(黄维)였다. 화이하이 전역(淮海战役)에서 이름도 유명한 ‘황웨이 군단(黄维兵团)’이 전멸되고 황웨이 자신 마저도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황후이난은 1948년 9월 출생하였으며, 그 해 12월 아버지가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 태어난 후로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이모, 이모부, 외할머니와 함께 상하이(上海)에서 생활하였고, 이모부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주어 별다른 부족함 없이 자랐다. 她并不觉得有什么缺憾。反而真正的父亲第一次出现在她的生活里时,她觉得“不搭界”。(没有翻译)
그녀는 별로 유감스러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녀의 생활에 나타나서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1965년, 황웨이 등 전범이 조가 되어 각지를 참관하고 있었고, 항저우(杭州)에 들렸다 북쪽에 있는 상하이로 올라와 가족들과 만나도록 했다. 개조를 하고자 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상하이 북교(北郊) 중학에서 고등학교2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후이난은 담임교사의 지도하에 상하이 진쟝호텔(锦江饭店)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선생님이 정치적인 임무라고 해서 꼭 가야만 했습니다.” 황후이난은 말했다.
황후이난은 어릴 때부터 황웨이가 ‘살인마귀’, ‘대전범’이라는 교육을 받아왔지만, 직접 자신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니 눈 앞에 있던 61세의 따뜻해 보이는 노인은 전혀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황웨이는 딸에게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몇 학년인지, 어느 대학에 가고 싶은지 등을 물었고, 부녀와 이모부 세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다. 그 때의 면회에는 서기가 동행하여 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황후이난은 아버지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관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잠깐의 만남이 부녀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좁힐 수는 없었다. 그 후 그녀의 생활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다시 사라졌다. 부녀가 그 후로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이후의 일이었다.
1975년, 황웨이를 포함한 293명이 특별 사면되었다. 이것은 최후의 최대 전범 특별사면이었다. 그 때까지도 ‘완고한 항거’ 의 태도를 유지하던 황웨이는 드디어 27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사면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쳰만(前门饭店)으로 달려와 그를 만났다. 그 이후 황웨이는 가족들과 함께 베이징에 살았다. 황웨이는 전국 정협 문사 자료 연구위원회에 근무한 후 제5,6,7차 전국 정협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전국 정협 상무위원회 대우를 받았고, 1989년 작고하였다.
아버지의 노년 생활에 대해 황후이난은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많지 않아,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궁금한 점이 없었는데도 묻지를 못했으며, 아버지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군대에서 반평생을 보낸 아버지는 직언을 잘하고 이불을 갤 때도 네모 반듯이 각을 잡아 정리하는 사람이었으며, 서있는 모습이나 걸음걸이가 반듯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열심히 했고, 자신이 하는 일로 가족들을 귀찮게 하지 않았으며, 국군부하가 도와달라고 찾아오면 언제나 들어주었다.
황후이난은 2004년 처음으로 항전 역사를 접했다.
텅충 전역(腾冲战役) 승리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현지에서 기념활동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황후이난이 초청되었던 것이다. “저는 원래 항일전쟁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그때 부터 ‘원정군’이라는 개념을 알게되었다.”고 대답했다.
2005년 황후이난은 중공중앙 통전부의 전화를 받고 항일전쟁 승리 60주년 기념 활동에 참가하였다.
그녀는 <중국신문주간>을 향해 갑자기 통지를 받아서 많은 부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아직도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인민대회당 안에서 후진타오(胡锦涛)전 주석이 “전국 항일전쟁 초기에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군대들이 전면전을 펼치며 쑹후(淞沪), 신커우(忻口), 쉬저우(徐州), 우한(武汉) 등 전역을 공격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전면전(正面战场)’이라는 말을 듣고 굉장히 흥분되기도 하고 기뻤다. 이전에 아버지가 전장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전면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버지가 참여했던 전면전이 사실은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과거 어느 때보다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실록이나 어릴 때의 기억을 담은 글 등이 없어 아버지의 자료를 모으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아버지가 황푸1기 학생이라는 것과 그 이 후에 동정(东征)과 베이파(北伐)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우선 선발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쑹후 뤄뎬(罗店)전투에서 황웨가 사대장으로 있던 국민 형명군 육군 제18군대 제67사단은 계속해서 일본군에 대항하였으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황웨이는 명성을 얻었다.
1948년 그는 18군 군대장이 되었다. 18군대는 국민당의 5대 주력군 중 하나로 장제스(蒋介石)의 적파부대였다. 그는 완난(皖南), 장시(江西)로 이동하고, 우한결전에 참전하였다. 1940년 가을, 그는 54군대 군대장이 되어 뎬웨(滇越)변경에서 일본군의 친입을 진압하였다.
황후이난은 도서관, 기록보관소, 인터넷 검색 등에서 아버지의 자료를 검색해 보았지만, 대부분 자세하지 않는 내용으로 모호한 정보들 뿐이었다. 그녀는 국군의 기타 회고록을 보았지만 역시 짜투리 내용밖에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쑹후대전, 우한대전, 뎬난(滇南) 보위전에 참가했다는 것을 들었고, 더 상세한 내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팔년의 항전 동안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를 알고 싶습니다.”
2008년 그녀는 일찍이 부친과 함께 난정북전(南征北战)에 참가했다는 국군노병이 창사(长沙)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창사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노병의 귀가 어두워 많은 세부내용을 얻지는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녀는 통전부의 전화를 받고 요청 서류를 작성하였으며, 통전부 측은 그녀와 수 차례 연락하며 많은 정보를 확인하고 그녀의 건강상태가 하루 종일 행사를 감당할 수 있는 지 등을 체크했다. 그녀는 통전부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부터 그 전화가 9월3일의 대열병 관례와 기념 훈장 수여와 관련된 전화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녀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녀는 “10년 전, 아무런 개념도 없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 기대가 많이 된다. 나는 많은 국군 노병을 만났고 그들은 나와 같이 이번 열병식을 매우 기대하고 있으며, 역사 사료를 발굴하고 중화민족의 항일 전쟁 역사를 다시금 재현하여 항일전쟁 정신을 세계에 알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관례시 많은 ‘고인’들을 만나기를 바랬다. “우리는 아버지세대의 인연 때문인지 처음 만났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10년 전, 아무런 개념도 없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 기대가 많이 된다. 나는 많은 국군 노병을 만났고 그들은 나와 같이 이번 열병식을 매우 고대하고 있으며, 역사 사료를 발굴하고 중화민족의 항일 전쟁 역사를 다시금 재현하여 항일전쟁 정신을 세계에 알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용장 손자의 기념

 

같은 해 봄, 59세의 웨이즈(卫智)는 통전부의 지인으로부터 이미 항일전쟁 70주년 열병식 준비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들은 바로는 원칙적으로 관례에 참여하는 것은 “북경에 있는, 2대 자녀, (민주당파)중앙 위원 이상’의 조건에 부합하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국민당 장군의 손자로서 ‘2대 자녀’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웨이즈의 조부 웨이리황(卫立煌)은 국군 10대 항일 전쟁의 용장으로, 장제스의 ‘다섯용장’ 중 한 사람이었다.
웨이즈는 그의 조부가 세상을 떠난 후 6년 후에 태어났지만, 그는 조모, 아버지와 일가친척 및 친구들로부터 조부의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웨이리황은 쑨중산(孙中山) 호위대에 들어갈 당시 동정과 베이파에 참여하였으며, 홍군의 제4차 토벌에도 참가하였다. 시안(西安)사변이 발생했을 때에는 이미 육군 상장이었던 그와 나머지 20여명의 국민당 고위 장령들이 함께 구류되었다.
1937년 7월, 항일전쟁이 시작된 후 위완(豫皖)감독이었던 웨이리황과 홍군이 협상하여 평화구역을 세웠다. 그 이후에 제2전장 지역의 부사령관이 되어 제18그룹군(즉 제8로군)의 2전장 지역 전투 서열에 올라섰다. 그는 제8로군에게 대량의 무기, 탄약, 식품, 의복 등 군수품 등을 나눠주었다.
1938년 4월 그는 연안(延安)을 지나 뤄양(洛阳)으로 가서 마오쩌둥(毛泽东)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첫 번째로 연안지역 국민당 전투지역 장관 1급 장령이 되었다. 1941년 완난사변(皖南事变)이 발생하고 그는 다시 자신의 부대를 구속하고, 공산당 부대와의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1943년 11월 웨이리황은 중국 원정군의 최고 통사가 되어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타격했으며, 뎬미엔(滇缅) 고속도를 개통하고 반일 전략의 불자 운송을 책임졌다 마오쩌둥은 그를 “애국심이 있는 국민당 군정원.”이라고 평가했다.
1947년 웨이리황은 둥베이 “토벌” 총사령 임명을 받았다. 랴오선전역(辽沈战役) 후 ‘계속 망설이고, 전투기와 요충지를 잃어’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난징(南京)에 연금되어 장제스가 하야 할 때서야 석방되었으며, 그 후 홍콩에 은거하였다.
1955년 그는 신중국에 돌아왔으며, 전국 정협 상임위원회와 민혁 중앙 상임위원회, 국방 위원회 부주석을 연임하였다. 5년 이후 북경에서 작고하였다.
웨이즈(卫智)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많은 경험자들을 만나 역사의 진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조부는 역사책에 ‘국만당전범’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일부 사람들은 ‘공산당간첩’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 속으로 나중에 진상을 쫓아봐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진정으로 조부의 이야기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이었다.
당시 해외에 있던 친척들이 귀국하여 자료를 모았다. 동시에 그의 아버지이자 웨이리황의 막내 아들인 웨이다오옌(卫道然)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웨이즈는 사료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와 다른 친척들이 한 이야기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조부가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2005년은 항일전쟁 승리 60주년이며, 중공중앙통전부대가 인민대회당에서 환영 연회를 개최하는 해이며, 기념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을 대접하는 해였다. 웨이다오옌은 대표로 참가하여 “항일전쟁기간에 나의 아버지는 국공이 진정으로 협력을 했었다고 주장했다. 지금 뒤를 돌아 보니 애국주의는 나의 아버지 세대 항일전쟁 시기의 지도사상 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11년 웨이다오옌은 세상을 떠났다.
이번 대열병식 준비의 연락업무에 참여한 한 직원은 <중국신문주간> 기자에게 6월 중순에 통전부의 서한을 받았으며, 9월 3일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대회의 인선을 추천해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인선의 요구는 각 민주당파의 중앙현임, 북경소재, 중앙위원 및 이상 지도자, 둘째 노병동지, 노병전사, 유명한 애국지사, 항일전쟁 장령 또는 기타 유족대표 등의 조건이었다.
비록 인원수가 한정되어 있어, 관례대 관례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웨이즈는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 배지’를 받았다.
배지는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위의 명의로서 항일전쟁 노전사, 노동지, 항일전쟁 장령 또는 유족에게 반포되었다. 웨이즈의 훈장은 민혁 중앙에서 심의한 79개 휘장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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