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상(坐床)
자유, 생불 쟝춰린이 속세에 대해 처음 가졌던 갈망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던 그는 암기력이 좋고 성적도 우수해 학창시절 자주 월반을 했다. 초등학교를 3년, 중학교를 4년 다니고 2002년 12세의 나이로 대입시험을 치러 티베트의대에 진학한다.
7대 생불 쟝춰린은 티베트의학 분야에 조예가 깊고 산에서 약초를 캐다 환약으로 만들어 신도들의 병을 고쳐주곤 했다. 그래서 가족들 역시 그가 티베트의학을 배워 7세 생불의 의술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대학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달랐다.
주변 동기들은 집의 구속에서 벗어나 수업이 끝나면 공놀이나 게임이나 데이트를 즐겼다. 그의 신분이 비밀일 때라 남학생들은 그와 호형호제하며 공놀이를 하자 불러냈다. 가끔은 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시종이 교실 입구에서 그를 맞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매년, 매일 좌선과 참선을 계속했다.
그는 생불이 무엇인지, 자신이 다음과 그 다음 생, 영원히 생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느낀 부러움의 감정은 그가 평생 누릴 수 없는 ‘자유’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12살은 사춘기의 반항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그의 반항은 부러움에만 그쳤을 뿐 가족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제자들의 고민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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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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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
8월 13일 자신의 소속사원——타베트(西藏)자치구 창두(昌都)시 볜바(边坝)현 니무(尼木)향 주당사(周塘寺)로 돌아가는 길에 차량행렬이 길을 따라 끊임없이 멈춰 섰다. 조수석에 앉은 라마불교 거루파(格鲁派) 생불 쟝춰린이 창문을 내려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도들을 위해 가지를 행한다. 가장 많을 때는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천 명 가까운 신도들이 하다를 받쳐들고 향(乡)에서 기다린 적도 있다. 촬영/쉬톈(徐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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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나빠지면 그는 계속해서 불경을 펼쳐 답을 찾고자 했다. ‘불경에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은잠시뿐이다. 사람이란 오래 앉아있으면 일어서고 싶고 오래 서있으면 앉고 싶은 법이니 이 모든 것이 잠시 잠깐의 즐거움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본질이 고통임을 더욱 잘 알게 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으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은 없으니 진정한 즐거움은 해탈 이후에 있는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그는 교리로 끊임없이 자신을 달랬다. 15세때 그는 ‘생불 쟝춰린’이라는 칭호 뒤에 있는 사명을 직접 보았다.
2005년 7월 대학교 3, 4학년 여름방학 기간 동안 그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쟝춰린사로 들어가 계승의식을 치렀다.
정부의 인증을 받은 환생선동들이 의식 후 전생의 보좌에 올라 법통(法统)의 위치를 잇는데, 이를’좌상(坐床)’이라 한다.
창두지역은 1998년 인증서를 발급해 그가 제8세생불 쟝춰린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바쁜 학업 때문에 그의 좌상이 2005년까지 미뤄진 것이다.
라싸에서 비행기로 창두까지, 창두에서 차를 타고 볜바에 도착했다. 현지 및 현의 주관 통일전선, 종교계 지도자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100대와 말 100필, 오토바이 100대가 그를 맞았다. 신도들이 손에 하다를 받쳐들고 길가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 앞의 거대한 무리를 보고도 그는 떨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눈에 익혔다. 사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문득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예식은 다음날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는 거루파 승려의 황색 모자를 쓰고 역대 생불 쟝춰린 보좌앞에 3배를 드린 후 보좌에 올랐다. 승려들이 불경을 읽고 그 중 세 명은 법기(法器)와 성수를 들고 대전 입구에서 그의 앞까지 공행모길상무(空行母吉祥舞)를 추고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약간 굽혀 그의 앞에 공손히 성수를 두었다.
예식 후 그는 생불의 직책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신도와 승려들에게 6자진언, 석가모니불주문(释迦牟尼佛心咒), 연화생대사주문(莲花生大师心咒), 문수보살주문(文殊菩萨心咒) 등 설법과 주문을 외운다.
그는 한 달 가량 본 사원에 머물며 매일 설법과 주문, 신도접견, 안수가지를 했다.
그리고 그 해 생불 쟝춰린은 어른스님으로부터 쟝춰린사의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절의 주지스님을 만나 사원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40여명의 스님들을 각각 독대하며 의견을 들었다.
이런 일들을 할 때 그는 15살 소년답지 않게 성숙하고 진중했지만 아이의 심성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떠나기 며칠 전 그는 스님들을 점차 알아가며 <서유기(西游记)>와 <봉신방(封神榜)>에서 맡은 배역을 연기하도록 시키고 옆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즐거워했다.
그는 어른스님들이 자신의 전 생불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가지를 받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백발이 성성한 노파도 만났다. 구체적인 압박과 책임감을 처음으로 느꼈으며, 이에 따라 자신에 대한 요구도 점점 구체화 되어갔다.
그는 좌상예식에서 연설을 해야 했다. 생불 쟝춰린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격리되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이번 연설을 통해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볍고 성숙하지 못해 생불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감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돌아온 후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전공까지 한 어머니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목청이 트이느냐 물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사자후(狮子吼)’를 가르쳐 주었다. 매일 벽에서 주먹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발성을 연습해 목소리를 굵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대학 4학년이던 그 해 왜 매일 수업이 끝나면 그를 데리러 오느냐는 동기의 물음에 시종은 그가 생불 쟝춰린이기 때문이라고 사실대로 모두 대답해 주었다.
생불 쟝춰린은 어느새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바뀐 것을 느꼈다. “저에 대한 존경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저에게 농담 거는 사람이 없어졌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속세의 즐거움처럼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사원 본관 한 개와 별관 두 개를 관리했다. 백여 명의 스님과 수만 명의 신도가 그를 생불이자 자신의 신앙멘토로 삼았다.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사원으로 찾아와 줄을 서며 그를 만나고 그의 가지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의 앞에 끓어 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그가 처음 공양한 예물이라도 얻으면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는 신도도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 신도들의 표정은 신뢰와 희망, 행복으로 가득하다.
그 후 생불 쟝춰린은 끊임없이 자신의 앞에 꿇어 앉아 있는 스님과 신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속세의 즐거움이 그에게 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으며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생불 쟝춰린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받은 만큼 제가 그 신분에 당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끊임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다.
불도공부
생불 쟝춰린이 사원에서 체계적으로 불도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이다.
티베트의 경우 승려들이 다른 사원에서 현종이나 밀교를 공부하려면 자신의 스승과 상대 사원 관리위원회에 알려야 하며, 상대 사원에 시간과 여력이 있는 경우 동의를 얻어 공부할 수 있다.
사원마다 전승되는 종파가 다르다. 역대 생불 쟝춰린 중 세 명이 소소사의 켄보(주지스님 격)를 지낸 적이 있어 쟝춰린사의 밀교는 소소사의 밀교가 전승되었다.
2007년 10월 생불 쟝춰린은 소소사의 공식 허가를 거쳐 소소사 밀교원에 들어가 경스승인 어왕단쩡(俄旺旦增)에게 단독으로 밀교를 배웠다.
소소사에 있는 동안 그는 거루파가 가장 중시하는 세 가지 밀교본존—대위덕금강(大威德金刚),승락금강(胜乐金刚), 밀집금강(密集金刚)의 의궤를 공부하고 밀교 경전을 외웠다.
2008년 7월, 생불 쟝춰린은 거루파 6대 주 사원 중 하나인 색랍사(色拉寺)의 경론 초급반에 들어가 현종을 공부했다.
라마교의 모든 승려들은 다섯 권의 대론(大论)—<현관장엄론(现观庄严论)>, <입중론(入中论)>, <석량론(释量论)>, <구사론(俱舍论)>, <계론(戒论)>을 공부해야 한다. 사원에서 자란 승려들은 보통 7~8세 때부터 경론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지난 18년 동안 생불 쟝춰린은 대론(大论) 다섯 권을 접해보지 않았다. 스승 궁상린포체(贡桑仁波切)는 수행을 가르치며 거루파의 창시자 총카파(宗喀巴)대사의 <보제도차제광론(菩提道次第广论)>을 공부해 윤회를 통해 근심을 넘어서고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찾는 법을 깨닫도록 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승려들 보다 경론에 늦게 입문했기에 더 많은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루들은 생불제자를 매우 잘 대우해 주었고 수업시간에는 전용방석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생불이라는 신분 때문에 초급반의 다른 30여명의 학생들에게 뒤쳐지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승려는 일요일에나 쉴 수 있었다. 그 외의 6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시간이었다. 그러나 경론에서 다른 사람들의 진도를 따라잡느라 생불 쟝춰린은 일요일에도 쉰 적이 없다.
경론 조예에 있어서 그는 마음 속에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11대 ‘판첸어르더니(班禅额尔德尼)’ 였다. 둘은 모두 1990년생으로 생일이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불 쟝춰린은 11대 판첸어르더니의 불경이론에 대한 조예가 또래보다 훨씬 뛰어나 젊은 생불들의 모범이라 생각한다.
경론을 공부하면서 스님들은 경전토론을 해야 한다. 이는 라마불교의 불법학습방식 중 하나로 토론을 통해 교의가 명확해지고 이해가 깊어진다.
색랍사의 경전토론장에는 자갈이 깔려있고 고목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있다. 매일 오후 정해진 토론시간이 되면 스님 2~3명이 한 조를 이뤄 질문을 하는 쪽은 서고 대답을 하는 쪽은 앉아있는다. 생불 쟝춰린 역시 불경공부와 경전토론으로 3년을 보냈다.
경전토론에서 스님들은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일반 스님들도 경전토론에서 생불을 만나면 상대의 신분을 염려하지 않았다. 생불의 경론 수준이 높지 않아 불리한 입장에 처하면 주변의 ‘관전’하는 스님들까지 힘껏 야유를 한다.
2011년, 생불 쟝춰린은 <현관장엄론(现观庄严论)>을 떼고 경전토론을 통과해 색랍사의 경론 중급반에 진학한다. 학습과정에서 그는 티베트자치구 통일전선부로부터 그 해 10월 티베트 불교대학이 재개할 것이며 그가 재개 후의 1차 학생으로 생불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불교대학
티베트불교대학은 1982년 개교 후 달라이라마 세력 분열활동 침투의 영향과 관리부족으로 1996년 휴교되었다.
티베트의 새로운 ‘고차원의 라마교 종합대학’을 세워 불교학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2011년 10월20일 티베트불교대학이 다시 개교했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티베트에는 각종 종교 활동장소는 1,787곳과 주지승 4,600여명, 활불 358명이 있다. 불교대학이 세워진 후 처음 모집인원은 150명으로 그 중에는 생불도 22명 있었다. 생불 쟝춰린이 그렇게 많은 ‘같은 종류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며 생활한 것은 처음이었다.
생불 중 가장 어린 생불은 18세 미만, 가장 나이가 많은 생불은 40세 가량이었다.
생불들은 ‘밀교’, ‘반야(般若)’、’인명(因明)’, ‘수행’의 네 개 반으로 나뉘었는데, 반야와 인명은 현종으로, 인명은 기초, 반야은 중급반에 해당했다. 생불 쟝춰린은 반야반이었다.
150명은 라마교의 5개 종파 사람들로 불교학과는 각 종파의 공인된 경전교리를 가르쳤다.
생불 쟝춰린은 신선함을 느끼며 다른 종파의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종파 승려의 의견이 각각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며 다른 종파를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다양한 수행방식과 이론에 대한 지시를 교류했다.
불교대학의 생활은 사원에서의 일과와 기본적으로 같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공부하고 일요일에는 쉰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아침예불을 올린 후 9시 반에 수업을 시작한다. 수업은 분반수업 2개와 150명이 듣는 전체강의 한 개로 수업시간은 한 강의 당 50분이다. 수업 후 점심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후 오후 3시 반부터 수업이 이어진다. 4시 반부터 6시 반까지는 전체 학생들의 불경토론 시간이다.
토론은 각 반에서 전공을 토론주제로 각각 진행한다. 예를 들어 반야반 학생들은 단체로 공부했던 <반야경((般若经)>을 주제로 토론한다. 네 개의 반은 반장과 부반장이 없이 보통은 학생들이 따르기 쉽도록 나이가 많은 스님이 맡아 관리하며 위생, 숙제, 결석계 신청 등을 책임진다.
불교대학의 교과과정은 불교학과를 중심으로 티베트어, 중국어(표준어), 컴퓨터 등의 문화과목과 법제3명은 티베트 전역 사원의 고승들이다.
티베트어과목은 고대티베트어와 현대티베트어를 가르치고 중국어(표준어), 영어, 컴퓨터과목은 초급수준을 다루며 법제과는 일반대학의 필수과목인 사상 정치과정과 같이 마르크스 철학, 마오저뚱 사상, 덩사오핑 이론 등 3개 대표이론을 배운다.
모든 교실은 정성들여 꾸몄다. 문화과목 수업은 현대 대학학제의 교실에서 이뤄지고 불교학 교실에는 석가모니불 3사도의 벽화가 있으며 교수는 좌상 위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가부좌로 방석에 앉아 수업을 듣는다.
생불 쟝춰린은 학생들 중 유일한 학사학위 취득자로 문화학과의 수업내용은 기초적인 수준이다.
29세의 세양일강사(羊日岗寺) 6대생불 파뤄(帕洛)는 티베트불교대학의 첫 번째로 초빙된 13명의 강사 중 하나로 기초중국어(표준어)를 가르친다.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개강 당시 생불 쟝춰린에 대한 인상이 매우 강했다고 밝혔다.
2011년 10월 19일 생불 파뤄는 기숙사에서 다음날 있을 개원예식을 준비 중이었는데, 생불 쟝춰린이 시종과 함께 그를 찾아와 자신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고, 다음날에는 개원예식에 참석한 각 급 지도자들에게 중국어(표준어)로 대학 대전의 건축스타일과 벽화의 내용을 설명했다. “쟝춰린린포체가 저에게 중국어(표준어) 잘 한다며 본인 대신 심사를 해달라 하더라고요.”
생불 파뤄는 전에 생불 쟝춰린 이야기를 듣고는 이 젊은이에게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생불 쟝춰린이 대전에 들어와 리허설 하는 것을 들었다. “깜짝 놀랐어요. 1990년대 생이라 매우 젊은데 중국어(표준어)도 잘하고 그 나이에 그렇게 심도 있는 강해를 할 수 있다는 게 대단했죠. 강해 들으면서 새로운 지식도 많이 얻었고요.”
생불 쟝춰린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중국어(표준어)를 배웠다. 어머니는 티베트대학을 졸업해 중국어(표준어)에 능통했다.
그날 저녁 생불 파뤄는 그에게 많은 제안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 린포체가 불교대학에 강사로 남아줄까?’라는 생각이 뇌리에 떠올랐다.
생불 쟝춰린은 성적이 좋았다. 불교대학의 기말고사는 빈칸 채우기, 객관식, 주관식으로 구성된 필기시험과 토론, 경론 암송시험까지 있었다. 그는 이들 시험에서 기본적으로 평균 80~90점을 맞았다.
그가 소속된 주당사의 투단지우덩(土旦久登) 부주임도 티베트 불교대학의 첫 번째 학생이다. 그는<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린포체는 매우 똑똑해서 이해도 빠르고 보이스레코더처럼 기억력도 좋았어요.”라고 회상했다
2013년 150명의 학생들이 졸업해 거시(格西)학위(석사급 이상의 학위)를 받았는데, 이들 중 31은 박사에 해당하는 학위를 받고 생불 쟝춰린을 포함한 119명은 석사에 해당하는 학위를 받았다.
통일전선부는 생불 쟝춰린의 성적, 신분, 개인수행 등을 평가해 그를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게 하기로 결정했다. 동기 학생들 중 두 명이 강사로 학교에 남고 다른 학생들은 각자의 사원으로 돌아가 수행을 계속하며 배운 내용들을 현지 사원의 승려들에게 가르쳤다.
현재 생불 쟝춰린의 주요 업무는 불경과 중국어(표준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매주 4일 동안 6개강의를 맡는다.
그는 단기양성반 학생들에게 자신의 첫 생불 용수보살의 <친우서(亲友书)> 강해를 통해 그루에게 어떻게 대하고 불법승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와 수선법(修善法), 계악법(戒恶法) 등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경론을 공부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 자신이 강의를 할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토론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연구·토론 교류의 수업방식을 좋아한다.
단기양성반 학생들은 각 사원이 새로 받은 스님들로 선발을 거쳐 1~3개월간 양성과정을 듣는데 매년 몇 개의 기로 나누어 1,000명 정도를 모집하다 보니 보통 전체강의로 이뤄진다.
생불 쟝춰린은 단기양성 반과 2년제반 중국어(표준어)도 수업도 들어간다. 주당사에는 티베트 불교대학 단기양성 반에서 그의 수업을 들었던 스님도 있다.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생불님이 중국어(표준어)를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매우 자랑스러웠어요”라고 밝혔다.
생불 쟝춰린은 이러한 신분의 변화에 매우 잘 적응했다. 같은 중국어(표준어)강사 생불 퍼뤄와 어떻게 스님들의 교재를 개선하고 멀티미디어를 도입할 지 의견을 나눈다. 또한, 앞으로 대 거시 학위를 따기 위해 색랍사의 그루와 5부 대론도 공부한다.
라마교 스님들에게 티베트불교대학은 공식적인 최고 학부이다. 현재 3차 학생까지 모집하였으며 많은 사원에서 추천하는 스님들 중 매년 행운의 150명 정도가 입학해 2~4년의 공부를 시작한다.
이들에게 강의하는 20여명의 강사 중 생불 쟝춰린이 가장 젊은 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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