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50년 I
- 티베트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위에 위치하며 크게 나취지구(那曲地区), 라싸시(拉萨市), 산난지구(山南地区)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라싸는 지치구의 정부소재지로 장족(藏族)사람들 마음의 ‘성역’이며, 나머지 두 지역에는 티베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구——목축민과 농민이 분포되어 있다.
50년간 이들은 각기 다른 발전과정을 겪으며 최종적으로 티베트50년 변천의 윤곽을 만들어냈다. -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11-05 09: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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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 년 당슝(当雄)초원의 주민. 촬영/처강 |
기자/쉬톈(나취지구, 라싸, 산난, 베이징)
나취(那曲)는 칭짱(青藏)고원 중심지에 위치한 목축지대로 이 지역의 유목문화는 구석기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산난(山南)은 농경지대로 티베트문화의 발원지이며, ‘티베트의 곡식창고’라 불린다.
농민과 목축민. 이들은 과거 티베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라싸(拉萨)는 티베트자치구의 정부소재지로 장족(藏族)사람들 마음의 ‘성역’이며 매년 많은 수 많은 불자들이 길게 절을 하며 그곳으로 들어간다. 이들 세 지역이 티베트의 윤곽을 만들어냈다.
자치구는 설립 후 50년동안 칭짱(青藏)도로, 칭짱(青藏)철도가 나취、라싸,산난의 궁가현(贡嘎县)을 이어 궁가공항을 지었다. 각각의 교통시설이 이들 세 지역의 운명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중국 각 지방의 도시화 과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티베트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해 점차 성장했다.
50년동안 티베트는 몇 차례의 개혁과 변화를 겪으며 점차 중국 내륙지역의 도시들과 닮아갔다. 또한, 모든 내륙도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티베트인들은 외부의 사물들을 하나하나 신기하게 받아들이며 새로운 현대적 사고가 생겨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티베트 모든 개체의 운명 역시 확실히 바뀌었다.
최초의 당원
1959년 3월 가룬(噶伦-옛 티베트정부의 주요 관원) 수오캉 왕칭거레이(索康·旺清格勒)가 달라이라마(达赖喇嘛) 14세를 따라 인도로 도주했다. 가룬은 옛 티베트지역정부 가샤(噶厦)의 총판(总办)으로 총 4명이다. 수오캉 가룬은 산난지역에 6개 장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70가구와 433명 농노를 가진 커쑹(克松)장원이 그 중 하나였다.
수오캉 가룬과 같은 귀족은 당시 티베트에 197가정 이었는데, 그 중 대 귀족은 25가정으로 최대 몇 십 개의 장원과 토지 수천ha를 소유할 수 있었다.
가룬이 도주하자 공산당 업무 팀이 산난지역 나이둥현(乃东县) 커쑹장원에 주둔하며 농노총회를 열어 제1기 농민협회 위원을 선출했다. 400여명의 토박이 티베트주민들이 손에 있는 콩으로 운명을 바꾼 것이다.
회의참가자들은 훗날 매체에 1959년 6월 6일 오후의 모습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과거 그들은 개와 참파(糌粑)를 함께 먹으며 진흙범벅의 참파를 삼키면서도 자신이 높은 장원의 주인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은 글을 모르고 투표용지를 쓸 줄 모르며 투표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더욱이 몰랐다.
이 날의 선거는 매우 특별하게 치러졌다. 각 후보 앞에 그릇을 하나씩 두고 400명의 사람들이 일일이 그 옆을 지나가며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의 그릇에 장중하게 완두콩 한 알을 넣어 투표로 삼은 것이다.
니마(尼玛)의 24세 츠런(次仁)이 390여개의 완두를 얻어 농민협회의 주임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 되던 때에 장원의 채찍에 맞아 죽고 그의 여덟 형제는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농민협회의 주임이 되었을 때 그의 집안에 남은 사람이라곤 그와 두 눈이 먼 어머니뿐이었다.
그 해 7월 5일 443명의 농민이 티베트 최초의 농민협회를 세워 토지 1,696무(亩)를 분배 받았다. 전 같으면 장원 주인의 경작지로 주었을 땅에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는 나무팻말을 하나하나 박기 시작했다.
1959년 국경절. 츠런은 농노대표가 되어 베이징으로 향해 마오저둥(毛泽东)을 만난다. 커쑹으로 돌아온 다음날 그의 발언과 업무 팀의 대필로 입당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는 커쑹 최초의 입당신청서이다. 그 해 12월 2일 커쑹현은 다섯 명의 당원을 배출하며 티베트최초의 당 지부가 되었다.
그 해는 신(新)중국 건국 10주년으로 국내생산총액(GDP)은 1,439억위안, 1인당국내상산총액(GNP)은 216위안 이었다. 티베트는 GDP 1억7천4백만위안, GNP 142위안 이었다.
티베트가 평화독립을 한 지 9년이 지난 1950년. 18군이 티베트에 주둔했고, 1년후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대표가 <티베트 평화독립방법에 관한 협의(关于和平解放西藏办法的协议)>에 서명하면서 티베트가 평화독립을 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근대적인 의미의 학교가 없었으며 청·장년층의 문맹률이 95%에 달했다. 현대의학도 없어 신에게 구하고 부처에게 비는 것이 대다수 티베트주민들이 병을 치료하는 주된 방법이었고 평균수명은 35.5세에 그쳤다. 제대로 된 길이 없어 화물과 우편물을 사람이 매거나 가축에 지워 운송해야 했다.
1959년 달라이라마 14세가 인도로 도주하면서 티베트의 민주혁명이 시작되었다. 1,009개의 향(乡)급 정부와 283개의 구(区)급 정권, 78개의 현(县)(현 급 지역 포함)과 8개의 个专区(市)。1961년 티베트 전역에 보통선거가 시행되면서 커쑹장원처럼 투표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티베트 최초의 농민협회가 설립되고 6년만인 1965년, 92%의 향(乡)에 인민정권이 세워지고 그 해 9월 티베트자치구가 성립되었음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티베트건설 지원
나취지구 나취현 뤄마(罗玛)진 12촌에 사는 가마상단(嘎玛桑旦)은 14세가 되도록 학교에 다니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가난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초원의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몇 년째 소를 몰고 있다.
부모님은 자식 여덟을 낳아 길렀고 온 식구가 한 천막에 모여 살았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그들은 짱파오(藏袍)를 입고 소와 양을 몰며 매일 짱베이(藏北)고원을 해치고 다녔다.
이때는 1976년. 내륙의 문화혁명이 끝나고 다음 해 많은 젊은이들의 운명을 바꿀 전국 대입시험의 재개를 앞둔 해였다.
바로 그 해, 27세의 공농병학생(工农兵学员) 주샤오밍(朱晓明)이 베이징(北京)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아내와 함께 국경지대지원에 자원 신청했다. 베이징에서 자란 그는 티베트에 평생 정착해 생활할 준지를 마쳤다. 자신이 13년 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중앙 통일전선부(统战部) 민족종교국 국장과 중국 장학(藏学)연구센터 당 조직 서기를 맡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1976년, 티베트는 철도가 개통되지 않아 기차를 타고 간쑤(甘肃) 류위안(柳园)까지 가서 자동차로 갈아타야 했다. 밀폐되고 좋지 않은 공간에서 3일을 흔들거리며 온 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짱베이초원을 지나면 라싸로 들어간다.
티베트로 들어가는 동안 ‘4인방(四人帮)’이 섬멸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주샤오밍은 <중국신문주간(中国新闻周刊)>과의 인터뷰에서 티베트자치구 당 위원회 선전부에 발령된 후 첫 번째 업무가 바로 4인방의 섬멸소식을 알리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1978년 11월 중앙정부는 11기 중앙위원회전체회의를 소집해 ‘두 개의 무엇이든(两个凡是-마오쩌둥의 결정이라면 무엇이든 결사적으로 지키고, 마오쩌둥의 지시라면 무엇이든 시종일관 따른다)’ 의 잘못된 방침을 비판하고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한다(以阶级斗争为纲)’는 구호 사용을 중지하는 한편 당과 국가업무의 중심을 경제건설로 옮겨 개혁개방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지치구 지도자가 회의에 참가하였으나 지역 내 일부 임원의 사상은 여전히 해방되지 않아 ‘진리의 표준문제’의 정신은 1년 후에나 실현되었다.
측근의 기억에 따르면 내륙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도 티베트는 개혁을 시작하기 어려웠고, 자치구 고위인사들이 중앙에 이러한 우려를 표했다.
1980년 3월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의 제1차 티베트업무좌담회가 개최되었다.
좌담회에서는 티베트가 지역의 실정에 맞게 경제발전계획을 심사·결정해야 하며, 각 중앙부처와 지방, 기관이 티베트건설을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샤오밍은 라싸의 첫 모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다자오스(大昭寺)와 자치구 인민정부를 잇는 흙 길 옆으로 우편전신국, 이발관, 신화서점, 백화점, 식당이 하나씩 있었다. 라싸의 집들은 철판지붕에 흙벽돌담으로 되어있어 햇볕이 내리쬐면 번쩍번쩍 빛났다.
4년간의 발전 후 1984년 제2차 티베트 업무회의가 열렸다. 자치구의 GNP는 310위안을 기록하며 340위안을 기록한 중국 전국에서 20위를 차지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중앙정부는 티베트에 33억8천2백만위안의 재정보조금을 지급했다.
제2차 티베트업무좌담회는 티베트가 국내, 국제경쟁에 참여해야 하며 자치구 임원들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회의 개최 후 주샤오밍을 포함한 자치구의 임원들은 연해지역의 개방된 성을 참관하고 배우라고 밝혔다. 개방 물결이 티베트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수오랑바단(索朗巴旦)이 태어날 때부터 그의 아버지 가마상단은 거의 집에 있지 않았다. 1980년대가마상단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마을 밖 남서-북동쪽으로 난 칭짱도로를 따라 망망한 짱베이고원을 벗어나 나취지구, 라싸시, 심지어는 더 먼 곳으로 나가서 더 이상 가뭄과 눈사태의 걱정 없이 기후조건에 의지해 살지 않아도 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가마상단은 운전을 배워 나취지구에서 배달을 다녔다. 제2차 티베트업무회의에서 그에게 특혜를 주었다. 회의는 장거리 운송판매를 장려하고 농업, 목축업, 부업생산, 운송업에 종사하는 자동차와 트랙터에 도로통행료를 면제해 주었다.
가마상단와 같은 무수한 농민과 목축민들이 이 기회를 잡아 운수업을 통해 난생 처음 큰 돈을 벌었다.
제1차 티베트업무좌담회 후 중국공산당 후야오방(胡耀邦) 중앙서기가 티베트로 시찰 와 티베트업무의 한종(汉族)임원들이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였으며 15%만 남기겠다고 밝혔다。
주샤오밍의 기억으로 이 결정이 발표된 후 자치구에는 티베트 파견간부 내부조사신청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총 세 차례의 내부조사를 통해 당정임원과 전문기술자 2만여명과 노동자 2만5천명, 그리고 그들이 동반하는 가족과 자녀를 포함해 약 8만명이 티베트를 떠났다.
좌담회 후 중앙정부는 종교문제에 대해 ‘좌’편향적인 태도로 정책시행에 있어 종교신앙의 자유를 강조했다.
차지구 종교사무국 통계에 따르면 1985년 6월말 티베트는 229개 사원을 복원, 개방하였으며 270곳의 종교활동지점(소형 경당, 소형 사원 포함)과 절에 사는 스님 5,677명이 있었는데, 1987년 5월말 복원, 개방된 사원과 종교활동지점은 각각 234개와 743곳, 절에 사는 스님은 1만4천3백2십명을 기록해 2년만에 절에 사는 스님 수가 배 이상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달라이라마는 해외에서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했다. 중국 국내외 시국의 영향으로 라싸에서는 1987, 1988, 1989년에 수 차례의 폭동이 일어났다.
주샤오밍은 1988년 3월 5일 폭동을 직접 겪었다.
때는 1년에 한 번 열리는 전소(传召)법회 때였다. 스님들은 법회에서 라마불교의 최고학위인 ‘라람바게셰(拉然巴格西)’를 취득할 수 있다. 자치구의 당정군 책임자가 예년과 마찬가지로 다자오스 법회에 참석했다.
법회가 진행되던 중 갑자기 폭동세력이 나타났다. 샤오밍과 자치구 지도자들은 다자오스 2층에 있었는데, 창 밖에서 돌이 끊임 없이 방으로 날아들어왔고 방 밖에서 누군가가 도끼로 문을 찍고 있었다. 그들은 책상과 의자로 창가와 문가를 막고 소방차의 고가사다리와 밧줄을 이용해 지면으로 내려왔다.
폭동으로 무장경찰전사 한 명이 사망하고 무장경찰전사와 공안경찰 299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거리의 많은 상점과 음식점 등이 부서졌다.
라싸에서의 몇 차례 폭동 후 1989년 9년. 자치구는 사원관리를 강화하고 분열세력을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결정과 함께 사원마다 ‘애국수법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관리위원회를 조직했다.
바깥 세상으로, 고향으로
13세되던 해, 수오랑바단은 그의 아버지 가마상단과 마찬가지로 칭짱도로를 따라 짱베이초원을 떠나 내륙으로 유학을 갔다.
1997년 그는 랴오닝(辽宁)성 랴오양(辽阳)시 제1중학교에 입학해 티베트반에서 공부했다. 학제는 4년이었는데, 첫 해는 예과반으로 중국어(표준어)를 복습했다.
초원에서 차를 타고 나취구역까지 간 후 차를 갈아타고 다시 라싸까지 가야했다. 교육부는 티베트반 아이들에게 내륙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일괄적으로 구매해주었다.
내륙의 티베트반은 1985년 16개성에 동시에 개설되었다. 그 해 1,300명의 티베트학생들이 내륙으로 유학을 왔다.
1998년 수오랑바단은 초등1 과정이었는데, 그 해 전국 28개의 성에 개설된 티베트 초·중급 반(학교)과 중등전문학교 반이 140개가 넘었다.
13년동안 1만7천5백5십9명의 티베트아이들이 외지로 나갔고 내륙에서 티베트로 들어온 사람도 적지 않다.
1998년 베이징은 티베트 맞춤지원도시인 라싸에 티베트지원임원 2차파견을 앞두고 있었다. 위페
이(于飞)와 안리(安理)는 자신이 몇 가지 기본적인 자격조건을 갖춘 것을 알고 신청했다.
3년전 개최된 제3차 티베트업무좌담회에서는 내륙 15개 성의 티베트 맞춤지원 시 7개, 각 관련 국가부처 위원회의 티베트자치구 맞춤지원 직속부처와 기관을 확정했다. 지원임원은 최대 3명으로 정기적으로 교대되며 파견기관의 행정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제1차 지원임원은 총 622명으로 평균연령 35.99세였으며 중국공산당원과 전문대이상 문화소양을 갖춘 인원의 비율이 각각 87.79%와 89.88%를 차지했다. 3년동안 15개 성의 원조자금은 12억위안에 달했다.
베이징은 1차로 24명을 라싸로 파견했다. 3년후 교대 시 시 소속기관부처에 >본과이상 학력 >공산당원 >45세이하 >신체 건강 >부(副)처장 급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는 임원을 선발해 티베트파견에 지원하도록 요구했다.
안리가 통지를 받은 것은 어느 토요일 이었다.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은다중스(大钟寺) 고종(古钟)박물관의 부 관장으로 베이징시 문물국의 부 처장 급 임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장인어른은 예전 티베트파견부대 18군 군인이었는데 사위가 티베트지원을 신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쌍수를 들고 찬성했다.
위페이는 베이징시 재정시스템의 부 처장 급 임원으로 시스템 내에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모두 지원한 가운데 각종 선별과정을 통과해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인물이다.
베이징시 문물국과 베이징시 재정시스템 모두 1995년에는 임원을 파견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본 시스템의 첫 번째 티베트지원임원이다.
안리는 가정의 문제로 티베트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위페이는 티베트에 대한 이해 없이 땅이 넓고 인구가 적으며 산소가 부족한 곳으로만 생각했다. 위페이의 남자조카는 이모부가 떠나던 날 막내이모가 많이 울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살면서 본 막내이모의 우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와 남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모부가 국경지역에 전쟁을 나가 생사를 보장하기 어려운 줄 알았다.
안리와 위페이 모두 이 날을 기억한다. 1998년 7월 3일, 베이징에서 파견된 티베트지원임원 34명이 청두(成都)에서 비행기를 환승해 라싸로 향하는데 도시에 비가 많이 내려 가까운 창장(长江)에 수십 년 만의 큰 홍수가 났다.
라싸에 도착한 후 위페이는 라싸시 재정국 차장을, 안리는 라싸시 문물국 국장과 문화국 차장 직을 맡았다. 함께 파견된 다른 부 처장 급 이상 임원들 역시 거의 직무기능부처의 부 책임자를 맡았다. 베이징시 정치협상회의의 양옌셩(杨燕生)은 라싸시 정치협상회의 비서차장, 베이징시 외사판공실의 탕웨이(唐伟)는 라싸시 외사관광국 차장, 베이징시 기획위원회의 장쥔판(张均凡)은 라싸시 기획국 차장, 베이징시 교육위원회의 장쓰탕(张思堂)은 라싸시 교육위원회 부주임, 베이징시 농장국의 천룽썬(陈荣森)은 라싸시 농목국 차장, 하이뎬(海淀)구의 장둥산(张同山)은 라싸시 청관(城关)구 부 구장(区长)직을 맡았다.
이들이 본 라싸는 1976년 주샤오밍이 본 라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자오스에서 자치구 인민정부 앞까지의 진주루(金珠路)는 여전히 울퉁불퉁 가로등 하나 없었다. 1년후 라싸시의 또 다른 건설맞춤지원 성인 장쑤(江苏)가 정비자금을 지원하면서 길 이름을 ‘장쑤루(江苏路)’로 바꿨다.
이들이 떠나기 전에 베이징은 건국50주년 축하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다. 이는 훗날 베이징 역내 가장 중요한 교통허브 중 하나가 되었으며, 투자액 2억위안의 시즈먼(西直门) 입체교차로가 착공되었다.
이들은 각자 부처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기숙사는 오래된 단층집이나 주택건물이었는데 밤에 바람이라도 불면 사방이 먼지였다. 잠자기 전 이불을 펴려면 제 구역인 양 이불을 차지하고 있는 쥐들부터 먼저 쫓아내야 했다.
수오랑바단 역시 적응이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목초지에서 자란 그는 랴오양의 아스팔트도로와 높은 빌딩들이 매우 낯설었다. 그는 학비를 낼 필요 없이 매달 자신의 생활비 200~300위안만 있으면 됐다.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위페이는 라싸에 도착한 후 지원임원의 대부분이 어떤 부처의 부 책임자를 맡으면서 임금이 올랐다고 회고했다. 라싸가 임금의 차액을 충당해 매달 600~700위안을 생활비로 지급했다.
부처 근처의 충칭(重庆), 쓰촨(四川) 식당을 한번씩 가 본 후에는 처자식을 떠난 중년남성들이 모여 요리를 배웠다. 그들은 지금 처한 진행하기 힘든 업무에 대해 토론하면서 다 비슷한 처지임을 발견했다.
티베트는 새로운 사물에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약간의 경계심이 있다. 포부를 품고 일하는 새로운 내륙 공무원들은 임기 3년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시도가 성공하기를 바라지 실패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이 시행착오라면 그들은 시행착오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더라도 베이징의 2차 티베트지원임원들은 라싸에 훌륭한 평가를 남겼다. 비닐하우스를 보급하고 처음으로 순찰차와 청소차를 도입했으며 다자오스의 세계문화유산등재 신청을 추진하는 한편 시, 구, 현마다 9년제 의무교육을 보급하였다.
2001년 베이징시는 3차 티베트지원임원 43명 파견해 그들과 교대시켰다.
그 해 수오랑바단 역시 라싸고등학교에 합격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4년동안 그는 같은 학교 여섯 개 티베트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길도 멀고 학교의 요구도 있어
티베트에 가 보지 못했다.
그는 라싸와 나취지구에 길이 닦이고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건물이 새워졌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뤄마진과 12춘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배달을 하고 남동생과 여동생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은 여전히 작은 창문에 방 두 개인 낮은 단층건물로 아이 다섯이 한 방을 쓰고 나머지 방은 어른이 쓰고 있었다.
방목을 하는 큰딸을 제외하고 가마상단은 네 아이를 공부시켰다. 그는 더 이상 짱베이초원에서 소와 양을 몰며 바깥세계를 동경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여러 세상을 보았지만 표준어를 할 줄 몰라 많은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학교는 반드시 다녀야 한다고 누차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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