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고 생각한다

서용규 ‘미각(味覺)’ 대표가 만들어가는 ‘성공 신화’
김지영 bnu0827@gmail.com | 2018-06-21 17: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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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꼬치 직영점 6개, 가맹점 48개…3년내 200호 개점 목표  

 

▲ © 서용규 사장

 

[글/ 동북아신문 취재팀] 서용규(44세) ‘미각(味覺)’ 대표를 지난 6월 1일 만나 그의 성공스토리를 취재했다. 기자가 5월 말 취재 요청을 위해 전화를 한 날은 서 대표가 중국에서 막 도착한 날이라 그 다음 주에 보기로 하고 일정을 잡기 위해 6월 1일 전화를 하자 또 다음날 중국으로 출국을 한다고 했다. 다행히 본지 사무실 가까이에 저녁 일정이 있다 해서 짬을 내서 본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양꼬치’ 바람에 거세게 불고 있는 시점에 서용규 대표는 ‘미각’ 직영점 6개와 체인점 48개, 명실상부하게 그만의 ‘양꼬치 맛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포 구래점과 동대문역점 등 두 개의 가맹점이 현재 설립 중에 있다. 

 

미각(味覺)이란 오감 중 하나로서, 음식, 무기물 등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혀의 표면에 위치한 미뢰라는 감각 기관을 통해 맛을 느낀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기본 맛으로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매운맛의 5가지가 있는데, 서용규 대표는 자기만의 양꼬치 미각을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동포가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양꼬치는 초창기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안산, 수원 등 중국동포 집단 거주지에서만 성행하다. 지금은 어엿한 ‘전국구 음식’으로 부상했다.
서용규 대표는 ‘미각’의 인기 비결로 “한국인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현지화한 메뉴를 개발한 것”과 “본사에서 냉장육을 수입해 염지 안 된 생고기를 사용하는 것”을 꼽았다.  

 

“직영점에서만 연 매출 50억 원을 올리고 있습니다. 직영·가맹점 모두 매장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연 매출이 평균 7억 원 이상으로 국내 양꼬치점 중에서 평당 매출이 제일 높습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쑤이화(綏化)시 출신인 그는 고교 졸업 후 천진에 있는 삼성에 입사하여 중국동포 직원으로는 6번째 정직원으로 96년까지 3년 반 동안 일했다.  

 

“삼성에 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원래 욱하는 성격인데 삼성 3년반 다니면서 꿈도 가지게 됐고, 사람 대하는 방식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서 대표는 삼성에 다닌 것을 사회 대학 나온 것과 같다고 말한다. “대학을 다니지 못했지만 삼성 3년 반 다닌 것이 대학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매년 한 달씩 한국의 삼성 본사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연수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삼성에서 하는 일은 기지국 설립. CDMA 방식이 중국에 처음 들어갈 때인데 중국에 세계적인 기업 네 개 회사가 휴대폰 기지국을 설립했다. 삼성이 운남성과 천진을 맡았고, 모토로라가 상해, 노키아에서 북경, 충칭을 다른 회사가 맡았다. 서 대표는 3년 반 동안 운남성 108개 현 중 99개를 다니며 기지국을 설립했다. 산에 올라가 안테나에 삼성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었다.  

 

서 대표는 글로벌 기업 삼성을 그만 둔 이유를 “돈이 안 벌려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삼성 다닐 때 월급 760달러, 출장비 200달러를 받았습니다. 월급도 적지 않았지만 돈이 안 벌렸습니다.” 

 

서 대표는 당시 조선족의 월급이 평균 150달러인 상황에서 무려 760달러의 월급을 받는데 왜 그만두느냐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자신의 사업으로 더 큰돈을 벌고 싶어 망설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고 고교 시절 식당 주방에서 한식요리를 배웠던 경험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얼빈 체육대 앞에 식당을 차렸는데 입소문을 타면서 점심때는 손님이 줄서기도 했다.  

 

그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경영하려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손님들의 ‘맛있다’는 칭찬에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한국식당에 주류를 납품하는 폭력조직이 무리한 요구를 해와 시비와 함께 싸움이 벌어지면서 더는 현지에서 식당업을 지속하기 힘들게 됐다. 신변에 위협마저 느낀 서 씨는 사업을 제대로 정리도 못 한 채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0만 위안을 투자했던 식당은 나중에 8만 위안을 받고 정리했다.  

 

1999년 말 서울에 도착했을 때 몸에 지닌 것은 달랑 여권뿐이었다. 익숙한 일에서부터 시작해보자며 중식당에 취직해 요리를 배웠다. 요리 자격증을 취득해 2001년 고덕동에 배달전문 중화요리 전문점을 차렸고, 3년 뒤에는 대치동에 홀을 갖춘 전문 요리점을 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던 2006년에 또다시 사업을 접어야 했다. 불법체류자였는데 합법체류로 신분을 바꿀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방문 취업비자(H2) 제도를 시행하면서 ‘불법체류자 양성화를 위한 자진귀국’ 제도를 내놓았다. 

 

“한국에서 사업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욕심에 비자 만기에도 남아 있었죠. 그러다 보니 가게 명의도 차명으로 해야 했고 늘 단속에 가슴 졸여야 했습니다. 자진 귀국하면 나중에 H2 비자로 재입국할 수 있다는 말에 주저 없이 보따리를 쌌습니다.” 

 

2008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사업계획을 세워 2009년 노량진에 매운 짜장·짬뽕을 주요리로 하는 중화요리점을 냈다. 4번째 창업이라서 자신이 있었고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해보자는 의욕도 넘쳤다. 

 

마침 매운맛이 인기를 끌기 시작할 때여서 1년 만에 월 매출 4천만 원을 넘어섰다. 가게를 더 키우려면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새로운 메뉴 개발에 몰두했다. 그때 만난 것이 양꼬치였다. 

 

“2010년 고향친구 모임을 위해 동대문에 있는 양꼬치 점에 갔는데 깜짝 놀랐죠. 월 매출이 1억 원이라는데 손님 중에 조선족이 거의 없더군요. 양고기는 한국에서는 익숙한 음식이 아니어서 중국동포만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거다 싶었죠.” 

 

서 대표는 양꼬치와 중화요리를 접목한 가게를 내보기 위해 신중히 준비했다. 승부처는 차별화라고 생각했다. 우선 육질이 부드러운 생후 6개월 전후로 도축한 호주산 양고기를 들여왔고,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없애는 밑간에서부터 구운 후 찍어 먹는 소스 등을 전부 새로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지금의 ‘미각’이다. 첫 점포는 중국동포 거리가 아닌 고려대 앞 먹자골목에 차렸다. 

 

“한국인을 주 고객으로 잡고 중국 음식 특유의 향을 없애면서 고소함과 단맛을 내세웠죠. 한국의 젊은 층이 몰리는 곳에서 정면 대결해야 크게 키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매장은 고객의 99%가 한국인입니다. 덕분에 고대 앞의 1∼2호점은 연 매출 합계 25억 원을 올리는 먹자골목의 명물이 됐습니다.” 

 

이후 종로와 판교, 안양 범계역 주변에도 직영점을 냈다. 사업 초기의 15개 가맹점 사장은 모두 서 대표의 친인척과 지인이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가맹비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메뉴도 무료로 전수했다.  

 

“가게를 차릴 때마다 지인들이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도 선뜻 돈을 빌려준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다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나만 챙기며 살자는 생각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경험에서 배웠거든요. 성공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에 자신이 붙은 그는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려고 ‘미각 푸드’로 상호 등록을 하고 사무실과 교육장을 마련했다. 자신이 50% 비용을 냈고 가맹점을 하는 친구들 6명이 동참했다.  

 

서용규 대표의 1차 목표는 국내에서 미각 가맹점을 2020년까지 200개를 모집하는 것이다.  

 

현재는 가맹점이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만 주로 있으나 미각의 전국화를 위해 올해 안으로 대구·경남·경북, 전남·전북, 충청·강원을 관할하는 지사를 각각 하나씩 설립하여 물류 시스템을 갖추고 가맹점을 모집할 계획이다.  

 

“2020년까지 200호점을 확보해 미각을 키워보려 합니다. 미각에는 CEO를 두어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2020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프랜차이즈를 해보고 싶습니다.”  

 

서 회장은 한국에서 미각을 시작한 이유도 “바로 중국으로 가려다 프랜차이즈가 발달한 한국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관해 배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운이 좋게 미각을 하고 있었고, 양꼬치 붐이 일고, 제가 중국에서 프랜차이즈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삼박자가 맞았습니다. 미각 54호점을 내고 관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배울 것이 많아 배우고 있습니다. 2020년까지는 많이 성숙되고 관리시스템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 대표는 지난 2016년 4월 한중창업경영협회의 2대 회장에 선출됐다. 한국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중국동포들이 모여 2014년에 설립한 협회는 동포 청년들이 창업하는 데 필요한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했다. 그는 취임 첫 사업으로 창업 예비스쿨을 열어 ‘성공 나눔’에 나섰다. 

 

하지만 지금은 활동을 거의 중단한 상태다.  

 

“창립할 때 부회장을 맡았고 회장을 맡아서 활동을 했습니다만 협회가 제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협회에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제 성격이 무슨 일이든 한번 했다 하면 올인하는 성격입니다. 그러다 보니 협회 일에 마음을 다 빼앗겨 내 일을 못하게 되는 겁니다. 8개월 내지 1년을 협회 일을 하면서 회사일을 다 접어놓고 했습니다. 빨리 3기 회장을 선출해 넘겨줘 협회를 발전시켜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서 대표는 재한중국동포가 과거와 달리 한국에 정주하려는 경향이 크다고 생각하며 2세들이 차별받지 않고 살게 하려면 1세대가 돈을 버는 것 못지않게 한국 사회에도 기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고 잘 기여하는 동포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뉴스보다 좋은 뉴스를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은행직원, 시청 공무원이 이미 나왔으니 동포 중에서 국회의원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 취재후, 서용규 사장()과 취재담당 동북아신문 강성봉 편

   

그는 한국사회가 동포들을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동포들도 한국사회를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제가 분리수거 하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누구보다 분리수거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포들도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사회에 대해 차별하지 말고 한국 생활에 빨리 적응하려고 노력 하고, 자기 발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동포사회가 노력하는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국사회도 인정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서용규 대표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밤낮 없이 하루에 16시간에서 20시간씩 일했습니다. 항상 집에 가면 새벽 두세 시였습니다. 다름 사람보다 나아지기 위해 남이 걸을 땐 뛰고 남이 뛸 땐 날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게 많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없는 친구를 위해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외상으로 넘겨주기도 하고 창업자금이 부족한 친구를 위해 여럿이 함께 분담해 도와주기도 하면서 미각의 ‘성공 나눔’의 철학을 실천해 나가고 있는 서용규 대표의 성공신화가 ‘미각’ 200호점을 넘어 중국대륙까지 뻗어나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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