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판지롼(潘際鑾)

그는 마치 큰 감독처럼,
국가 에너지 장비업 발전의 대극을 연출하였다
발행인겸편집인: 강철용 kgmsa@naver.com | 2022-08-09 14:53:54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발행인겸편집인: 강철용] 

 

판지롼은 평생에 걸쳐 비교적 성취감이 있는 업적을 두 가지 남겼다. 하나는 중국에 용접 전공을 세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난창(南昌)대학을 세웠다는 것이다.

 

 

▲ 판지롼(潘際鑾)이 전기자전거를 타고 뒤에 부인 이세예(李世豫)를 태우고 칭화(清華)대 캠퍼스를 다니고 있다. 사진/응답자 제공

2022년 4월 19일 95세의 판지롼 원사가 별세했다.

 


판지롼 연구팀의 핵심 멤버인 차이즈펑(蔡志鵬) 칭화대 기계공학과 연구원은 판지롼은 마치 국가 에너지 장비업계를 연출한 대감독같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건축가처럼 연구팀에 큰 무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판지롼 원사는 마치 큰 비와도 같아서 누군가가 큰 나무라고 해도 충분한 비를 얻을 수 있었고 작은 풀이라고 해도 충분한 영양분을 얻을 수 있었다.


훌륭한 총장


1992년 가을 국가 차원에서 ‘211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장시(江西)성은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당시 성에는 국가 중점 대학이 하나도 없었고 졸업생들이 졸업 후 대량으로 성 밖의 대학으로 공부하러 갔다. 이로 인해 인재가 절실히 필요한 이 저개발 지역은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장시성에서는 ‘1개 중점대학 건설 지도소조’를 별도로 구성했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장시의 211대학 설립을 지지한다고 발표하였으나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성에서 최소 1억 위안을 투입해야 한다. 둘째, 장시대학과 장시공업대학이 통합되어야 한다. 장시성은 두 가지 조건에 모두 동의했고 합병된 두 학교는 난창대학교로 명명되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가 모두 갖추어진 상황에서 ‘인화(人和)’, 즉 훌륭한 총장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성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1992년 말 장시성교육위원회는 베이징에서 장시 출신 중국과학원 학부위원(나중에 ‘원사’로 개칭) 간담회를 열었다. 바로 이 회의에서 장시가 당시 칭화대 기계공학과 학과장이자 칭화학술위원회 주임이었던 판지롼을 주목하게 되었다.


연말에 장시성 성장 우관정(吳官正)이 모교인 칭화대학을 방문해 칭화대 지도부에 총장 후보를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칭화대에서 추천한 후보 1순위도 판지롼이었다.


당초 장시 측은 판지롼의 학술활동과 건강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름만 걸어두고 구체적인 실무는 적게 하거나 안 해도 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판지롼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유명무실의 이런 방식이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아예 안 가든지, 가게 되면 확실히 적극적으로 실무에 전념하겠다”는 판지롼의 태도를 알고 장시 측은 마침 바라던 바였다며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그해 4월 판지롼은 총장직에 취임했다. 그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장시성교육위원회 부주임 저우샤오썬(周紹森)이 학교 당위원회 서기를 겸임하게 되었다.


장시는 ‘부성급’ 대우로 판지롼을 예우했다. 그의 월급과 주택은 성 재정에서 직접 지출하였다. 그가 사는 이층집 가옥은 교직원 기숙사 구역과 잇닿아 있었고 몇 십 평방미터의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연못을 마주하고 있을 때 개구리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 각별히 조용했다.


당시 장시성의 재정 수입은 50억 위안이 되지 않았고, 성 본급(本級)은 10억 위안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시는 약속을 지켰고 1993년에 먼저 3,000만 위안을 투입했고 이 중 1,500만 위안은 성정부 청사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데 쓰기로 돼 있던 자금이었다. 장시성은 3년간 난창대에 1억 위안을 투자했다.


판지롼은 일부 학과가 비용을 들여 사무실과 회의실을 꾸미고 책걸상을 구입해 실제 교수들의 연구에는 돈을 쓰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장시성은 성 전체의 힘을 빌려 1억3,600만 위안을 들여 난창대학을 건설하였는데, 만약 우리가 이 돈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4,000만 장시성 사람들에게 사죄해야 한다”며 이를 비판했다. 그는 학교에 자금 사용 심사 제도를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학교는 당위원회 지도하의 총장 책임제를 실시했다. 저우샤오썬은 판지롼이 장시성에서 영입한 가장 큰 인재라고 회상하며 성위원회와 성정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다.


장시대 중문과 교수인 쉬리핑(徐麗萍)은 합병 후 난창대 총장실 비서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판지롼은 유아(儒雅)한 기질의 소유자로 시야가 넓고 교육적으로 견문이 넓으며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며 질질 끄는 성격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늘 공정한 입장을 고수했고 모든 것을 학교 발전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거기에 우관정 등 주요 지도자들의 지지가 더해져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업무 전개가 비교적 순조롭게 풀렸다.


판지롼은 취임 후 3개월 만에 관리기구 배치와 간부 조정을 완료했다. 쉬리핑은 판지롼을 따라 성에 가서 회의에 참석했는데 한 교육위원회 지도자가 판지롼에게 재정권과 인사권을 잡으라고 건의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총장으로 입지를 굳히기 어렵다고 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때 판지롼은 “나는 학과 건설만 하겠다. 이런 건 상무부총장이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학풍을 되돌리기 위해 그는 학점제와 탈락제를 중심으로 한 교육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처음 열린 전교 교직원 대표자회에서 이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대학을 잘 운영하려면 자유로운 활동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며 학문적 여건이 넉넉해야 인재가 배출된다고 말했다. 그가 시난(西南)연합대학에 다닐 때 어떤 사람은 4년, 어떤 사람은 5년, 어떤 사람은 심지어 8년만에 졸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대학에는 이런 분위기가 없었다. 그 원인은 첫째로 엄격하지 않았고, 둘째는 느슨하지 않은데 있었다. 고등교육은 다양화의 패러다임이 있어야 한다. 그는 당시 “우리의 창조성은 어디로 갔는가? 오랫동안 교육에서 ‘일률적인 원칙을 적용’한 탓이 크다. 아직 자유로운 발전의 가능성과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탈락제 시행이 큰 저항에 부딪힐 것으로 보고 우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관정은 엄격하게 관철하는 그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누군가 신고를 하면 성위원회 성정부에서 그 책임을 지겠다고 표명했다.


1993년 9월 난창대 금속가소성가공학과가 장시성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 거점이 됐다. 1996년 난창대는 전국 최초로 국가교육위원회 211예산을 통과하였다. 장시성에 명문대학이 없고 학부위원이 없으며 박사 학위 수여 거점이 있는 대학교가 없다는 기존의 ‘3무’(三无) 상황이 모두 개선되었다.


난창대학은 이번 교육개혁에서 합병하여 운영하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리란칭(李嵐清)은 <교육 탐방록>에서 난창대를 몇 차례 언급하면서, 난창대의 사례가 전국 대학 관리 체제 개혁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저우샤오썬은 이번 대학 통합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도 있었고 성과도 있었지만, 난창대의 통합은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판지롼은 경제 발전이 저조하고 대학 실력이 강하지 않은 장시에서 교육개혁을 실시했으며 난창대가 211공정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2년 말, 판지롼은 임기를 마친 후 난창대 명예총장이 되었으며 다시 자리를 옮겨 칭화대로 돌아갔다.


국보급 전문가


2008년 6, 7월의 어느 날, 칭화대학교 기계공학과 부연구원인 차이즈펑은 자전거를 타고 칭화 용접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앞에 75세의 천빙썬(陳森骑)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따라가 인사를 나눴다. 천빙썬은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그에게 요즘 뭐하고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판 교수의 고속철 프로젝트 마무리 작업도 있고 국립자연과학기금의 연구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판 교수의 고속철도 프로젝트’는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건설한 전국 최초의 도시 간 고속철도인 징진(京津)고속철도이다. 판지롼 교수가 철도부의 초청을 받고 용접 고문의 역할을 맡았다. 중국이 이음새 없는 고속철도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레일은 한 마디당 길이가 100m에 달해 작업장에서 5개의 레일을 함께 용접한 뒤 선로에 깔아 용접해야 했다. 

 

베이징에서 톈진(天津)까지 총 120㎞에 이르는 용접 이음매는 수천 개에 달하는데 전혀 틈이 없다. 2년 동안 판지롼은 프로젝트팀을 인솔하여 레일 용접 품질에 대해 엄격한 검사를 진행했다.


몇 마디 잡담을 한 후 천빙썬은 차이즈펑에게 판 교수를 따라 다시 큰 프로젝트를 맡아 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차이즈펑은 별 생각 없이 당연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천빙썬은 또 이 프로젝트는 비준이 안 될 수도 있고 또 ‘자체 양식’을 가져가야 할 상황이라고 해도 함께 하고 싶은지 재차 물어보았다. 그는 판 교수를 따라다닐 수 있다면 뭘 해도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차이즈펑은 연락을 받고 판지롼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판지롼은 그에게 현재 국가로부터 큰 임무가 떨어져 원전 저압 회전자를 만들어야 한다며 상하이 증기터빈 공장과 함께 관문을 뚫어야 하는데 장시간 현장에 깊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며 그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1960년대 초에 칭화대는 상하이 증기터빈 공장 등 몇몇 기관과 합작해 국내 최초의 대형 용접 로터를 완성해 6,000kW 가스터빈에 적용했다. 이번에 상하이 증기터빈 공장은 칭화대와 다시 한 번 합작하려 하였다. 공장 책임자는 원자력 발전의 저압 회전자는 국가가 곧 전개할 대규모 원전 건설 중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걸림돌인 만큼 칭화대의 ‘국보급 전문가’들이 계속 기술지도를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것이 2007년 중국이 ‘원자력 발전 특별계획(2005~2020년)’을 공식 발표한 배경이다.


백만천만급 원전 건설의 핵심 부품은 특대형 저압로터다. 회전자는 터빈의 핵심 부품으로 용접과 전체 단조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프랑스 알스톰만, 후자는 일본 JSW와 한국 두산중공업만이 생산능력이 있었다. 중국이 이미 건설했거나 건설 중인 100만㎾급 원전 저압로터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자체 저압로터 개발이 중국 원전 발전의 관건이 되고 있었다.


국가 계획에 따르면 연구 개발 업무는 ‘두 다리로 걷기’를 실시하여 전체 단조 회전자뿐만 아니라 용접 회전자도 연구 개발하여, 회전자를 정단조하는 위주로, 회전자를 용접하는 것을 보조로 하는 것이었다.
차이즈펑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판지롼은 시종 로터를 용접하는 것이 로터를 단조하는 것보다 어떤 장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연구진들은 거듭되는 토론을 거쳤지만 이 문제에 철저히 답할 수 없었다.


판지롼은 이 두 회전자의 차이점을 기술부터 국가 계획까지 철저하게 규명하는 학술 세미나를 열기로 했다.


상하이 증기터빈 공장은 칭화열에너지과 동문인 야오얼창(姚爾昶)을 파견해 상황을 설명했다. 이미 이 공장은 용접과 정단조 로터의 비교에 관한 국내외 연구보고를 마쳤고 야오얼창이 보고서 요약판을 가져왔다. 이것은 판지롼에게 용접 로터의 특징을 거의 파악하게 해준 귀중한 내부 자료였다.


2008년 10월 베이징 궈훙(國宏)호텔에서 상하이 전기의 대형 용접로터 개발 교류회가 열렸다. 당시 일본 제강소의 단조 노선이 세계를 이끌었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중국 광둥(廣東)원자력그룹 리더는 용접 잔류 응력 등을 문제 삼으며 중국산 용접 로터를 적용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판지롼은 대형 회전자를 만드는 주요 기술 경로는 용접이지 정단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시에 이 관점은 앞선 관점이었다.


회의 후 판지롼은 대형 원전 저압용접로터 연구개발 수석과학자로 초빙돼 상하이전기, 칭화, 하얼빈(哈爾濱)용접연구소와 상하이교통대학과 함께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국가는 ‘일중(一重, 중국 제1중장비그룹)’과 ‘이중(二重, 중국 제2중장비그룹)’의 대형 단조로터 개발을 동시에 지원하고 있었다.


2009년 1월 칭화(淸華) 프로젝트팀은 초기 건설을 완성한 뒤 계속 연구범위를 확대했다. 대열에는 당시 중국 최초의 공기압축기 용접 회전자 연구 개발에 참여했던 전 세대 과학자도 있었고, 청장년 과학연구의 핵심과 더 젊은 세대의 박사, 석사, 학부생도 포함돼 있었다.


용접 잔류 응력은 과제팀과 바이어의 각별한 관심사였다. 차이즈펑은 조수 한 명을 데리고 상하이 증기터빈 공장을 찾아 용접 로터의 잔류 응력 분포를 측정하고 핵심 공정 기술이 응력 감소에 미치는 효과를 평가했다.


차이즈펑이 측정 결과를 연구팀에 보고하자 판지롼은 기뻐하며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상하이 증기터빈 공장의 지도자에게 보고했다. 상대방도 기뻐하며 판 교수의 차세대 팀이 여전히 칭화의 기풍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칭찬했다. 부 총공예사인 선훙웨이(沈紅衛)는 웃으면서 그동안 판 교수가 쉽게 발언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회의 때마다 판 교수 옆에 ‘노법사’들이 몇 명씩 앉아 있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도 모두 이 분야의 권위자이기 때문이 아니냐며 다른 직장에 그런 팀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판지롼은 연구진을 여러 그룹으로 나눠 매주 회의를 열었다. 팀별로 매주 한 차례씩 학술 오찬을 하고 단체 농구나 수영 활동을 하며 2~3주에 한 번씩 팀 전체 보고를 했다. 판지롼은 그의 측근인 천빙썬(陳丙森), 런지아레(任家烈), 루안리(鹿安理) 등 ‘노법사(老法師)’들을 거느리고 연구팀을 급성장시켰다.


차이즈펑은 판 교수가 평소 연구팀 내에서 온화하고 점잖으며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회의를 할 때는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무게감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차분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를 항상 놓치지 않고 있었다. 중광(中廣) 핵전력 수석 과학자 자오젠창은 처음 판 교수와 접촉했을 때부터 그의 풍채에 감탄했다고 전했다.


차이즈펑은 판지롼이 가는 곳마다 민주적인 학문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동안 스스로도 매일매일 자신의 성장을 느낄 수 있었다며 그 시간들은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세월’ 같았다고 했다.


2010년 판지롼의 한 차례 도발은 그를 한 단계 더 성장시켰다.


그때 연구진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가 있었고 발전 상황은 양호하였으나 정작 논문을 발표할 수는 없었다. 이는 영업비밀을 지켜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기도 했고 논문 발표를 하려면 관련된 시간을 들여 노력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학교의 평가 지표와 약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대학교 문화와 공장 문화가 다른 데서 오는 약간의 오해도 있었다. 차이즈펑은 상당히 괴로워하며 판지롼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를 들은 판지롼은 “이런 작은 일들은 내려놓아야 한다. 이제 누구도 만나지 못했던 연구 플랫폼을 얻었으니 10년 뒤 내열강 용접 야금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져야 하는데, 그런 사소한 일을 마음에 둘 게 뭐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짧은 몇 마디 조언이 그에게는 구름이 걷히고 태양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2011년 10월 판지롼은 국가원전기술공사가 주최한 원전용접로터 기술검정회에 초청받았다. 이 회의에서는 처음으로 전 업종에서 용접을 원전 저압로터 제조의 주요 기술 노선으로 조정하면서 판지롼의 2008년 예언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이용자들은 관망하고 있었다. 용접로터가 백만 kW급 증기터빈에 적용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하이 증기터빈 공장은 사용자가 100만 원전의 저압용접 회전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2010년 초초임계(超超臨界) 100만 화전 저압용접 회전자를 전문적으로 개발했다. 대형 원자력발전기 터빈은 반속기이고 화전기는 전속기인데 비해 부하가 더 크다. 또한 시동과 멈춤이 잦아 용접 로터의 종합적인 성능이 더욱 요구되었다. 그 전에 밀리언셀러가 채택한 건저압 단조로터 때문에 이 로터는 연구 개발에 성공한 후 줄곧 사용하기를 원하는 사용자가 없었다.


상하이자동차는 2012년 베이징에서 대형 용접로터 기술 검증회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훙웨이가 차이즈펑을 찾아와 판지롼을 감정위원회 주임으로 초청하고 칭화대가 기술 보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상의했다.


차이즈펑이 돌아와 보고를 했고 연구팀은 회의를 열어 토론했다. 판지롼이 감정위원회 주임을 맡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칭화대가 기술보고를 하는 것은 선수도 하고 심판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 판지롼은 용접 회전자 발전에 유리하고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이즈펑은 칭화대가 제3자 신분으로 참여해 학술적으로 용접 회전자의 신뢰성을 검증할 수 있다면 감정적 논리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건의는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또 용접로터의 ‘약한 부분을 약하지 않게 하자’는 내용이 핵심이 돼야 한다는 조언도 과감히 했다.


그가 이 생각을 선훙웨이에게 알린 후, 선훙웨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칭화대의 생각대로 하자고 결정했다. 그는 나중에 이용자들이 워낙 걱정을 많이 하는데 약한 부분을 소개하면 더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전했다.


2012년 5월 기술평가회가 열렸다. 차이즈펑은 제3자를 대표해 기술 보고를 했고 처음으로 상하이자동차 공장이 개발한 용접 회전자의 가장 약한 부분의 플라스틱 인성 데이터와 테스트 곡선을 제공했다.
보고를 듣고 루옌쑨(陸燕蓀) 전 기계공업부 부부장이 첫 발언을 했다. 그는 “이렇게 오랫동안 용접 로터의 안전성과 절박함에 대해 고민해 왔는데 오늘 드디어 안심하게 되었다. 우리의 용접로터를 사용할 수 있다. 칭화대가 펼친 작업은 용접로터가 왜 안전한지 정확히 말해주었다”고 말했다.


이 회의는 대형 용접 회전자가 응용 단계를 돌파하는 전환점이 됐다. 회의 후 일주일 만에 상하이자동차 공장에 현지 실사를 다녀온 이용자들은 2주 후 업무협약을 체결했으며 1년 후 두 번째 제품이 완성되었다. 2014년 2월 용접 회전 사용원자로가 성공적으로 가동돼 당시 화력발전 설비의 발전 효율이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90허우(90后, 1990~1999년 출생)


2011년, 판지롼은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연구팀 학생들이 교대로 줄을 서서 푸와이(阜外)심혈관병원 전문가 검진을 예약했다.


검사 결과 판지롼의 심장 좌주지가 90%가 막혔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인들은 70%가 막히면 눈에 띄게 불편한 증상이 나타났지만 그는 연구에 몰두해 온 터라 제대로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는 이미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고 가슴을 절개하는 브릿지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때 판지롼은 이미 84세의 고령으로 푸와이병원에서 브릿지 수술을 한 최고령 환자에 속했다. 그는 담담한 태도로 임했고 자신의 건강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는 역시 회복이 빨랐다. 수술 후 51일만에 그는 전기자전거를 타고 칭화 용접관으로 출근했다.


2012년에 들어와 그는 몸이 회복되었고 로터 프로젝트가 순항하면서 젊은 연구진들도 더불어 성장했다. 차이즈펑은 그 뒤로는 마음을 졸이는 고비는 없었다고 했다.


2012년 칭화대팀은 상하이자동차공장과 함께 700℃ 초임계 화력발전 설비 연구를 진행했다. ‘13.5’ 기간 국가 에너지 정책 조정에 따라 700℃ 플랜트 전체의 가성비가 높지 않아 이 프로젝트는 보류됐지만 ‘14.5’기간(2021~2025년)에는 주변 에너지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700℃ 플랜트를 650℃ 상업기종으로 조정했다. 차이즈펑은 이는 그들 팀의 성과에 있어서 일종의 ‘감각적 발전’단계라며 그들의 연구 성과가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고 말했다.


용접관은 1955년에 만든 3층 낡은 건물에 만들었으며 판지롼, 천빙썬 등은 이 곳에 칭화 용접 전공을 세웠다. 1층 북쪽 복도 끝에 판지롼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의 집무실 옆 소회의실에서는 거의 매주 한 차례씩 정례회의가 열렸는데 판지롼, 런지아레, 천빙썬, 루안리의 몇몇 연구진들이 꾸준히 참석했다. 회의 테이블과 의자 하나만으로도 공간이 가득 채워졌다. 나이가 든 연구원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학생들은 매번 먼저 안쪽으로 자리를 잡고 바깥자리를 양보했다.


2016년 칭화기계과는 용접관에서 신축한 리자오지(李兆基) 빌딩에 입주했다. 이사 후에도 연구팀은 중요한 활동을 원로 연구진들에게 즉시 알렸다. 판지롼은 매번 시간에 맞춰 참석했고 회의를 열지 않아도 실험실에 가는 것을 좋아했으며 집에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작은 일 하나라도 진지하게 토론하고 분석했다. 오전에 학생들에게 명한 일을 점심시간에 전화로 진도를 물었으며 학생들은 그날 일은 그날로 끝내는 습관이 생겼다.
집 벽에 붙은 달력에는 스케줄이 빽빽이 기록돼 있었다. 그는 하루도 여유롭게 휴식을 하는 시간이 없었으며 크고 작은 회의도 셀 수 없이 많았고 한 달에 네 번 출장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컴퓨터와 휴대전화 작동이 자유로웠고 운영체제가 항상 최신판으로 되어 있었다. 또 QQ, 위챗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파워포인트로 연하장을 만들 수 있었다. 가끔 문제가 생기면 대학원생들을 불러 시연해보게 하고 한번 보면 금방 배웠다.


그는 항상 네슬레 커피의 갈색 병에 진한 차를 타 마시는 것을 좋아했고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비서와 함께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 햄버거와 콜라를 주문했다. 또 여름엔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으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는 자신의 전기자전거를 타고 학교 최북단 허칭위안(荷清苑) 자택에서 캠퍼스를 지나 제일 남쪽 리자오지 빌딩까지 다녔다. 이후 그의 전용차는 3륜, 4륜 전기차로 바뀌었다. 2017년 중앙TV ‘낭독자’ 녹화에서 부인 리스위를 전기자전거에 태우고 캠퍼스를 지나는 그의 사진이 방영되면서 판지롼은 ‘인터넷 스타’로 거듭났다.


그는 시난연합대학 베이징 동문회 회장을 맡았으며 여러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강연을 하며 연합대학의 학문 이념과 강인한 정신을 홍보했다. 1944년 시난연합대학 기계학과에 입학한 그는 동문 중 대학 캠퍼스에 남은 가장 ‘젊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다른 동문들은 대부분 퇴직한 상태라 자원도 체력도 없는 상황이었다. 칭화 ‘로터팀’은 아무런 대가 없이 이런 활동들의 회무와 사이트 유지 등 편외 업무를 도맡아 했다.


2012년 11월 3일 시난연합대학 창립 75주년을 맞아 판지롼은 회의에서 ‘시난연합대 설립 경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라는 발표를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기껏해야 약간의 소재를 요구했을 뿐 발표 관련 파워포인트를 항상 스스로 준비했다. 이 PPT는 ‘용접 첨단 기술’의 틀로 만든 것으로, 상단에 ‘엄격한 교학 요구, 편안한 교학 환경’, ‘높은 민주적 태도, 진지하고 열정적인 애국 정신’, ‘농후한 학술적 분위기, 자유로운 학문 환경’ 등의 시사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균 나이 90세의 노신사들은 매우 개성이 있었다. 대다수는 회의장까지 픽업을 거절했으며 택시를 타고 오거나 버스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연구팀은 20년 동안 베이징의 날씨를 조사했다. 그 결과, 비가 올 확률이 매우 높다고 판단해 학교에서 200명의 지원봉사자들을 모집하여 주변의 버스 정류장, 지하철 입구에 가서 이들을 마중하였다. 

결국 이날 예상대로 작은 비에서 시작해 중간 정도의 비가 내렸다. 차이즈펑은 회의장에서 일사불란하게 바쁘게 움직이는 팀원들을 보았고, 봉사자들이 양전닝(楊振寧) 등 흠모해 왔던 노학자들과 ‘90허우’가 교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왠지 모르게 시공간이 엇갈리는 황홀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기자/숭춘단(宋春丹)

 


 

[저작권자ⓒ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카카오톡 보내기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발행인겸편집인: 강철용 다른기사보기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헤드라인HEAD LINE

포토뉴스PHOTO NEWS

많이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