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이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

-‘진달래’의 시인 이상규-
김지영 bnu0827@gmail.com | 2018-03-14 13:5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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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종섭] 작곡가에게 시인은 ‘맞섬근’이다. 두 손가락을 연결하는 근육과 같은 사이다. 작곡기술이 탁월하다손 쳐도 미학의 영감을 떠올리는 데에는 삶의 밑바닥과 고양된 정신세계를 함의한 시 만한 도구가 없다. 안네 카레리나의 법칙이란 게 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닮아있지만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독특한 모양새로 불행하다. 좋은 작품은 ‘행복한 가정’과 같다. 시와 노래가 서로 맞아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불행한 가정’처럼 불행한 음악이 된다.    

 

지난 1월 2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소프라노 강혜정이 부른 정애련 작곡의 ‘진달래’는 시인과 작곡가와 성악가가 관주위보를 이룬 아름다운 음악이다. 진달래는 향기가 없다. 정애련의 곡에는 그 향기보다 강한 그리움, 악몽 같은 그리움이 삶을 할퀴고 짓밟아오면 오히려 그 그리움을 향해 목이 쉬도록 부르는 역설의 힘이 있다. 없는 향기를 꿈속에서라도 품으려는 사무친 그리움이다. 

 

어떻게 이토록 강렬한 시를 쓸 수 있을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처럼 상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거대한 ‘사랑앓이’를 겪지 않으면 결코 쓸 수 없는 시다. 알고 보니 이상규 시인의 삶이 그랬다. 억세게 추운 영변의 진달래처럼 고통이 즈려 밟으면 더욱 새빨갛게 타오르는 진달래 같은 길, 그 길을 걸어온 이상규 시인을 만났다. 

 

이상규 시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진달래’와 ‘그믐이라서’ 외에 시집 ‘사랑의 비문’(동해 1990), ‘만나고 헤어지고 웃다가 울다가 그리고 다시 만나고’(동해 1991, 딸 지은 공저), ‘그 누군가를 가슴 저려 기다린다는 건’(동해 1993),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동해 1995), ‘순정의 고백(중국연변인민출판사, 1996), ’찬비에 젖는다’(대한 2006), ‘도반’(토담미디어 2011) 등 수십 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출간한 베스트셀러 시인이다. 특히 딸과 함께 공저한 ‘만나고 헤어지고……’는 당시 1991년 4개월 만에 3만부가 판매된 최고의 작품으로 국내 처음으로 딸과 함께 공저한 점에서도 유래없는 시집으로 호평 받았다. 당시 ‘KBS FM 고현정과 함께’와 MBC 방송국 ‘아침의 창’ 등에 시집이 소개되거나 부녀가 직접 출연하는 등 화제가 되기도 했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고통의 순간, 시 세계에 탐닉한 시인 

 

시인은 대뜸 천정 끝에 걸면 바닥을 칠만한 큰 족자를 선물로 건넸다. 추몽(追夢)! 꿈을 좇아라. 이상규 시인이 걸어온 삶의 푯대는 ‘선심’(善心)과 ‘진심’(眞心)이다. 그 푯대야말로 이상규 시인의 ‘꿈’이다. 선물을 받으며 이상규 시인의 주제를 ‘꿈’으로 잡았다. 그는 무슨 꿈을 향해 그토록 험한 인생을 헤쳐 왔을까 말이다.
서울 양정중학교. 시인이 입학할 즈음에는 전설적인 명문이었다. 당시 매해 경쟁률은 5대 1 이상이었다. 그 학교에 합격했지만, 시인의 인생은 육십령 고개처럼 구불구불해지기 시작했다. 정미소를 운영하는 평택 지방의 대부호였던 집안이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무려 16번에 걸쳐 이사해야 했다. 공부를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힘든 생활이 수년간 이어지면서 고려대 4학년 1학기,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갈림길과 만났다. 

 

“2학기 등록금으로 학업 대신 독일 광부가 되기로 했습니다. 당시 대기번호가 6013이에요. 그런데 그때 동백림사건이 터지면서 독일행이 취소되었습니다. 날짜 받아놓고 돈만 날렸어요. 다시 집세가 더 저렴한 곳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죠.” 

 

시인은 그때 깨달았다. 환경을 극복해야 하겠지만 지나친 의욕은 ‘욕심’에 불과하다, 그 말이다. 파산한 집안 7남매 중 다섯 명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꿈’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이었다. 시인은 서울생활을 더는 버티지 못하고 평택으로 귀향해 농사를 지었다. 농사 경험이 전혀 없는 그에게 농사는 날품보다 더욱 힘들었고 결국 농촌 생활도 실패했다.  

 

“대학 졸업을 하지 못하고 시작한 사업들이 족족 실패하자 폐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더군요.”


이상규 시인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 점점 쉼터를 찾았다. 고통의 칼날로 조각조각 갈라진 영혼이라도 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무엇인가’를 찾았다. 누군가는 알코올을 쉼터로 삼거나 또 누군가는 마약에 의존하거나 그보다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겠지만, 이상규는 달랐다. 고통을 빠져나오는 매개체는 시(詩)였다. 

 

“매일 매일의 아픔을 문자화했습니다. 너무 아플 때 수백 편의 시를 읽고 시를 썼어요. 그런데 아프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절망 대신 기다림을 그렸으니까요.” 

 

중국의 자연시집은 물론 김영란, 김소월, 윤동주 등의 시가 담긴 한국시선집 등 손에 쥔 시집은 너덜너덜해지고 닳아 사라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읽고 쓰면서 고통의 나날을 극복한 즈음, 89년 ‘동양문학’ 시부분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걸었다. 

 

89년에 등단하고 90년 ‘사랑의 비문’으로 첫 시집을 출간했다. 시집에 최초로 일러스트 그림을 삽입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품기향(異品奇香)의 시집이었다.  

 

 

그의 시에는 사랑과 그리움의 가락 가득 

 

시인의 시에는 사랑과 그리움의 가락이 담겨있다. 작곡가들은 용케도 그 강한 사랑의 향기를 맡고 숨겨진 가락을 사출하려고 한다. 특히 정애련 작곡가의 예리한 후각과 시각은 피할 수 없다. 

 

“저는 인정합니다. 제 시의 진심을 정확히 집어낸 딱 한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정애련 작곡가를 선택해요. 제 시를 언뜻 읽어보면 온갖 사랑 타령 투성 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 속에 아픔과 인간의 본성이 담겨있어요. 다른 사물에 꼭꼭 숨겨놔도 정애련 작곡가는 그 사랑의 본질을 잘도 찾아내거든요.” 

 

진달래는 추위가 심할수록 그 빛이 더욱 강렬하다고 했다. 사랑 또한 고통 속에서 더욱 뜨거운 법이런가? 세한연

후(歲寒然後)에 송백(松柏)의 푸르름이 더욱 강해지듯 말이다. 

 

그의 사랑은 청년시절의 가난의 고통에 이어 중년 넘어 찾아온 몹쓸 병마와의 고통이 심할수록 더욱 시 생명은 타올랐다. 90년대 소장 폐색증으로 고생하다 소장이 터지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2000년 디스크 수술이 잘못되어 자율신경 계통이 고장나 이번에는 힘줄을 잘못 누르면 소장으로 가는 자율신경 계통이 멈춰버렸다. 더 이상 수술을 거부한 그는 경기도 남양주 금남리에서 수상스키 훈련으로 물리치료를 대신했다. 그는 이런 고통의 즙으로 아름답고 향기어린 시를 써내려갔다.  

 

“시인은 참 어렵게 살아갑니다. 저작료 몇 푼 받아서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작곡가는 더 안쓰럽다는 걸 알았어요. 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작곡가들의 삶도 녹록치 않으니까요.” 

 

그러면서 이상규 시인은 통장을 보여준다. 4원, 13원, 49원……통장 끝에 찍힌 숫자다. 어느 날 1집에 실린 시로 곡을 쓰겠다는 작곡가 한 명이 찾아왔다. 후원금 30만원을 요청하기에 3곡을 부탁하고 100만원을 후원해주었다. 그때 작곡가들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오호 통재로다! 시인은 그래도 누가 시를 써달라고 하면 함민복의 시 ‘긍정적인 밥’처럼 그래도 3만원은 받을 수 있는데 작곡가는 곡을 써놓고도 누구에게 팔지 못하고 꿍겨놓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싶었다. 

 

“누가 작품을 써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직업을 바꾸거나 굶는 거예요. 2007년에는 제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그 작곡가에게 1,000만원을 주고 열심히 작곡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일을 시작으로 제 시를 곡으로 쓰겠다는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이후 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받은 축의금 등을 모두 작곡가그룹에 후원하는가 하면 개인 작곡가, 성악가 등과 두루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 2012년 정애련의 ‘진달래’가 KBS 방송 더콘서트에 나오면서 빅히트를 쳤다. 이상규 시인으로서는 딸과 함께 공저했을 때의 베스트셀러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낀 셈이다. 시인은 ‘시와 곡과 노래가 삼위일체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안나 카레라나의 행복법칙에 다름 아니다. 이상규에게도 이 진달래가 히트 칠 즈음 기사회생의 순간을 만났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 병들어 사경을 헤매던 시기였지만 이 노래가 유명해질 즈음 기적적으로 몸이 일시 회복되었다.  

 

작곡가에 대한 후원, 동병상련을 느끼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작곡이야기를 더 해보자. 정애련의 진달래가 뜨면서 이번에는 유명한 작곡가 L씨가 찾아왔다. 당시 여기저기 작곡을 후원하느라 후원비가 소진된 상태였지만 중국에서 좋은 일을 한다기에 다시 오케스트라 연주비를 쾌척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자신에게까지 찾아왔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겠나 싶어 내주었다. 그의 성품이 그랬다. 도움을 외면하는 일은 차라리 ‘내가 안 쓰고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

 

 

“저의 시로 만든 작품을 연주하는 무대가 있다면 주로 음악회장에서 감상합니다. 그런데 성악가들은 개런티를 받아도 작곡가는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작곡가는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를 마련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해줘야 합니다. 말이 안 됩니다.” 

 

늘 자신의 처지보다는 남의 처지를 생각하는 이상규 시인. 그래서 그의 인생의 중심좌표는 늘 ‘선심’(善心)이다. 선심은 내가 쓰고 남을 것을 베푸는 게 아니라 내가 부족하더라도 남을 먼저 도와주는 ‘진심’이 있어야 한다. 

 

잠깐 대학을 졸업하고 농사에 실패한 후의 삶을 들여다보자. 다시 상경해 막일을 하면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입사한 회사가 삼강. 고대에서 생물학과를 전공했기에 유산균 관련 지식이 풍부했던 그는 유산균 관련 제품 기획과 영업을 총괄했다. 골프장을 대상으로 유통하면서 5년 동안 돌아다닌 거리가 통산 400만 Km.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해 고가정책을 펼쳐 매출을 수십 배 늘린 그는 남양으로 스카우트되어 역시 매출을 신장시켰지만 본사의 대리점 착취를 보다 못해 퇴사했다. 이후 삼립식품, 동서식품 등의 대리점을 운영하다 마침내 본인 회사를 설립하는 과정을 거쳐 왔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매출을 올리면 그는 그 돈을 작곡가의 후원금으로 사용했지만, 그 외에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후원 사업을 펼쳐왔다. 중국 조선족과 한족에 대한 무한한 ‘시인의 사랑’이다.

 

 

중국 조선족을 도와주게 된 사연 

 

1992년 허리가 아파 수상스키로 물리치료를 대신했을 무렵이다. 강 건너 가끔 들린 밥집에는 연변에서 교직을 하던 분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의 시집 두 권을 건넨 계기가 중국 조선족을 향한 사랑의 끈이 되었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남을 돕는 사람에게는 늘 도움을 원하는 사람만 만나게 되는 필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잊었던 그 연인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떠나기 전 선생님의 시집을 연변에서 출간했다는 소식이었다. 시인은 실로 미안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 소중한 인연이었기에 서울 구경 한번 시켜주지 못하고 영원히 이별하는 게 미안하고 애처로웠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그녀 이름은 정신자. 정씨는 자신이 사망하기 한 달 전 중국연변출판사를 통해 이상규 시인의 시집 ‘순정의 고백’(딸과 아빠가 함께 부르는 연가)을 출간했다. 그 시집은 정씨가 병상에서 직접 지은 제목으로 연변신문에 소개되었다. 시인은 곧 연변 행 비행기를 탔다. 불법취업으로 내몰려 험난한 삶을 살다간 그 여인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다. 늘 자식을 걱정하던 게 떠올라 연변대학에 갓 입학한 아들 장학금 4년 치를 전달했다.

 

 

그런데 그곳에도 시(詩)가 있었다. 이상규 시인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찾아낸 탈출구처럼 가난한 중국 연변 조선족에게도 시가 있었다. 문인들과 만난 그는 문학계간지 ‘아리랑’ 2년 제작비 1500달러를 그 자리에서 후원하기로 했다. 그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문학 활동을 지원하고 시인이 고국에서 번 돈의 대부분을 이들을 위해 투자했다.  

 

아리랑 잡지발전기금 후원 4회(1996), 한마당 잡지 출판기금 후원 4회, 한얼패 수필문학상 기금 후원 3회(1999), 한마당 잡지 출간기념회 및 세미나 후원,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 전집 장기후원(2000), 인물 조선족사 제1권 출판기념회 후원,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 전집(전 10권) 및 사학계 좌담회 후원, 연변작각협회 문학상 기금 후원, 2001년 정판룡 문학편 출간기념행사 후원(2001), 심연수 국제세미나 후원, 심연수문학비 건립추진,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기금 후원, 2012~2017 재한동포문인협회 기관지 동포문학 출판경비 후원(2012~2017), 반딧불 노래비 건립후원, 김학철 작가 서울세종홀에서 출판기념식 및 작고 1주년 행사 후원 등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이상규 시인의 후원은 문학예술인들의 후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신자씨의 아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이래 중국의 학구열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동포호혜의 사랑을 뗄 수 없었다. 장백현 이도강촌 기숙제학교 기숙 비를 7년 동안 지원하고, 연길시 장학생을 4년간 후원한 이후 소정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 거의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 소정(이상규 시인의 호)장학금을 수여해왔다. 소정 장학금 이외에도 불우한 학생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시인은 본인이 덜먹고 덜 입고 모은 돈을 끌어 모아 새로운 장학금을 만들어 지급했다. 연길시 대학생 등록금과 생활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 대상은 조선족만이 아니었다. 한족과 조선족 모두에게 골고루 수여해왔다. 

 

“이 외에도 반딧불 문학상 백일장이나 우정의 노래 글짓기 등도 후원했는데 연변의 문학이 점점 꽃피워지는 것 같아 기쁠 뿐이에요.” 

 

이상규 시인의 노래를 듣는 이유, ‘사랑을 잊지 말자’ 

 

연변인민출판사와 합작해, 중국조선족문학사료 전집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국민연금을 모두 후원한 시인. 시인이기에 누구보다 앞장 서 조선족 문학인 발굴에 앞장서 윤동주 시인과 쌍벽을 이루는 심연수 시인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이상규 시인이다. 무엇보다 한국드림의 허망한 꿈을 이용해 한탕하려는 한국인들의 잘못을 사과하듯 그는 사기꾼들이 퍼질러놓은 사건을 수습하기도 했다. 

 

김혁의 에세이집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책에는 한국인들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나열돼 있다. 지금까지 입은 조선족 피해액은 5억 위안, 한국인 사기꾼들은 모두 1,100명. 1997년 하얼빈 흑룡강 신문사에서 흑룡강 실화수필 문학상을 주최하면 기금을 후원해주겠다며 잔치 상을 펼치게 한 뒤 당사자가 종적을 감춘 사기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해결해주기 위해 이상규 시인이 그 사기꾼을 대신해 3년간 5만 4천 위안을 지원해주었다. 

 

“누가 나쁘다고 따지기 전에 한국 사람의 허세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내 나라를 위해 한국인이 풀어야 할 문제죠.” 

 

한국 음악계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나눔의 대부’라 일컫는 이상규 시인. 지난해 중국을 마지막으로 다녀왔다. 건강상태가 그의 발목을 더욱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이 좁은 지면으로 인터뷰하기에는 너무 큰 어른이다. 쓰고 나니 마지막 대화가 생각났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를 죽인다 해도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지구는 사람만이 사는 게 아니거든요. 다 같이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상규 시인의 노래, 시인의 시 전부가 다 사랑이요, 그리움이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이 사랑을 잊지 말자는 인간의 영원한 약속일지 모른다. 지난 1월 21일 세종문화회관 한중우호음악회에서 우리가 ‘진달래’를 선곡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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