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탕카의 가격을 매긴 사람 II

라사(拉萨)의 탕카화가 볜바(边巴)는 올해 53세로 티베트(西藏)자치구와 거의 같은 나이다. 그는 자신이 티베트 최초로 탕카의 가격을 매긴 사람이며, 이 때문에 탕카계에서 가장 부유한 화가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의 성공은 라사 전반의 상업화 발전의 결과이자 최근 이 도시와 사람들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진상욱 기자 amote521@gmail.com | 2015-11-06 11:29:37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기자/류단칭(, 라사)

 

80년대, “탕카계의 최고 부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스승님을 속이며 그림을 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님이 알고는 “돈을 너무 사랑해 솜씨를 썩히고 있구나!”라며 크게 화를 냈다. 다른 선후배들은 기술이 부족하거나 두려움에 손을 떨어 스승님과 함께 탕카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는데, 내가 그림을 팔자 스승님은 크게 실망했다.
 

젊고 반항적이던 나는 스승님의 질책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대로 그림을 팔았다. 빠른 시간에 나는 탕카계의 최고 부자가 되었다.
 

나는 상업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검은 바탕에 황토색으로 스케치를 하고 이틀 밤이면 그림 하나를 완성해 400위안짜리 외화교환권에 팔 수 있었다. 외화교환권은 위안화보다 비싼 1위안에 위안화 7위안으로 자전거, TV, 라디오, 냉장고 등등 뭐든 살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내 그림 스타일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탕카는 신앙으로서 팔 수도 없고 물질로 바꿀 수 없다고 여겨져 탕카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라 생각되었다. 장족의 규칙에 따라 화가들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탕카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고 반드시 승낙해야 했다. 가격은 개인의 경제력에 따라 경제사정이 좋은 사람에게는 많이 받고 사정이 좋지 못한 사람에게는 월급만큼도 받지 못했다. 화가도 기분은 좋지 않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처음으로 이 규칙을 깨고 티베트 전체에서 거의 처음으로 탕카에 가격을 매긴 사람이 되었다. 탕카에 가격표를 붙였다. 경제사정이 좋으면 비싼 것을 들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탕카를 들이기 위해 가축 두 마리를 팔 필요 없이 능력이 되는 대로 사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욕을 먹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순탄했고 수입이 스승님보다 몇 십 배 많았다. 오토바이를 몰고, 호출기를 걸고,손에 금반지를 몇 개나 낄 수 있고, 라디오, 냉장고 등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갖고 있고, 주머니에 항상 몇 백 위안씩 넣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밥을 사면서 부자행세를 하고 다니는 20대의 장족청년을 생각해 보라.
 

밥 먹는 것에만 매일 40~50위안을 썼다. 선후배들은 내가 그러고 다니는 것을 모르다 알고는 반대를 하면서도 자기들도 그림을 팔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슬쩍 물어보곤 했다. 스승님은 내가 돈에 욕심을 내며 예술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질책하셨다.
 

1987년 나는 아이를 낳고 아빠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었다.
 

티베트인들은 겨울에 일을 쉰다. 그러나 나는 그림을 그려주는 일을 했다.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고 그림 하나를 완성하면 돈이 벌렸다. 생각해보라. 2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화가나 예술가들이 죽거나 대가 끊겼지만 여전히 잘 나가던 우리의 모습을….
 

나는 사람들 집에 그림을 그려주며 먹을 것도 잘 챙겨먹었다. 일년 내내 감히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대접받았다. 문을 들어서면 버터차가 있고 점심으로는 소고기만두와 소고기전, 요리 2~3개에 탕, 간식으로 화채와 과자, 떡까지 먹었다.
 

바로 그 시절에 나는 라사에 첫 번째 탕카 가게를 열었다. 그 후 나는 3천위안이 넘는 오토바이를 몰며 아내에게 100g이 넘는 금팔찌를 사 주었다.
 

1980년대의 라사는 곳곳이 건물과 함석집, 콘크리트로 엉망이었다. 사람들도 많아져 정부에서 집을 나눠주는데 옛날식 주택으로 모자라 2층, 3층을 더해도 모자라기 시작해 4층 건물을 지었다. 곳곳에서 다 이렇게 했다.
 

티베트의 식당과 호텔은 모두 그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우리는 평소에는 장족 전통의상을 입지 않고 명절에만 입기 시작했다. 나는 전통의상을 입을 때면 반드시 표범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다.
 

그 당시 라사 젊은이들은 발전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막노동이나 재봉사를 하고, 장사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친구는 내가 반은 예술가, 반은 장사꾼이라 한다. 나도 동의한다. 나는 정석대로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기회를 찾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다.
 

그때 나는 내 아이가 자라면 중국 본토나 외국으로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든시야를 넓혀 나처럼 탕카를 그리며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몇 해 장사가 잘 됐다. 그림 주문이 너무 많아 매일 아침 8시부터 새벽 1~2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허리가 안 좋아진 것도 그 시기였다. 하루 종일 앉아만 있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 아프면 진통제를 맞아가며 꼬박 1년을 그렇게 버텼다. 혼자 그림 그리는 일은 매우 외롭고 파리 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작업이다. 내 아이들이 이런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을 벌어 아이들을 중국 본토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시키고 싶다.
 

그때는 티베트인들과 한족의 사이가 좋았다. 그들은 조그마한 가게를 열어 임금으로만 생활하다 보니 생활이 어려워 한 근에 40위안 하는 소고기를 먹지 못해 우리가 몇 근을 사서 입에 넣어주었다. 설이 되면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술을 대접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족들은 우리 집에서 편하게 먹고 잤다.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티베트인 누군가가 도와주었다. 그 시절 티베트는 이랬다. 장족신앙 중에는 모는 생물이 자신의 부모님이었다는 신념이 있다. 날아가는 한 마리 파리도 윤회 중에 한때 자신의 배우자였을 수 있으니 잘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 동안 스승님은 나를 가장 매섭게 질책하셨다. 스승님은 “너는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놈이다!”라고 하시며 장족 중에 탕카 화가와 의사가 가장 덕을 쌓는 일인데 나의 행동 때문에 그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고 꾸중하셨다.
 

 

▲ 탕카 작품
스승님 자신도 평생 고생을 한 가장 전통적인 탕카화가로서 그렇게 많은 제자들을 받아 당신이 집에서 먹이고 재워주셨다.
 

 

우리는 그때 한창 크고 많이 먹을 나이였는데 너무 많이 먹기가 죄송해서 밥 한 그릇을 평평하게 깎아 떠가면 스승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그 위에 밥 한 주걱을 더 얹어주셨다.
 

4년 후 스승님이 70이 안 된 연세로 별세하면서 더 이상 나를 꾸짖는 사람도 없어졌다.
 

현재,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상업화되고 사람들 역시 급해졌다.”
 

1990년, 나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 갔다.
 

티베트인들이 본토에 가면 대부분 거리도 가깝고 번화해 지하시장이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청두(成都)로 간다. 그 해 처음으로 마라탕(麻辣烫)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가격도 한 그릇에 몇 마오(毛)로 티베트보다 얼마나 쌌는지 모른다. 당시는 티베트의 물가가 본토보다 훨씬 비싸고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임금은 매우 높았다.
 

1991년과 1992년에는 티베트 전체의 경제사정과 생활조건이 좋아져 나와 선후배 몇 명은 오토바이를 몰고 BP를 썼다.
 

나는 1990년대초부터 라사 최초의 화랑을 열었다. 포탈라궁 아래 지하 화랑을 담았다. 그 후에는 티베트식 스타일의 무도장 ‘랑마정(朗玛厅)’도 열었다. 티베트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반항적인 사람이다. 돈도 적지 않게 벌었지만 그때는 돈에 대한 욕망이 전처럼 크지 않을 때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부가 집을 분배해 주던 시절이었고 나도 크지는 않지만 집을 한 채 분배 받아 네 식구가 들어가 살았다. 집안일도 많지 않아 나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아내와 아들은 밖에서 왔다갔다 했다. 매우 안정된 느낌이었다. 1992년, 나는 5만위안을 들여 작은 별장을 한 채 샀다. 막 서른이 되던 해였다. 그 시절 그 나이에 집을 산다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 이었다. 집은 토목구조의 티베트식 전통가옥으로 실내면적 300평 중 200평의 정원에는 화초와 나무를 심었다. 당시 라사의 땅값은 1m2에 2~3위안으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쌌다.
 

그러나 들어와 살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예전에는 정원 하나에 20여 가구가 모여 살며 먹고 사는 형편을 서로 알았는데 지금은 별장에 들어와 문을 걸어잠그고 산다. 조용한 라사의 방에서 그림을 그리면 매일 파리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너무나 조용하고 외로운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일이 원래 개인작업이다. 염치없이 티베트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매일 라디오를 틀어두었다.
 

그때 나는 베이징(北京)으로 가 현대의 설치예술을 보기 시장했다. 솔직히 별 재미는 없었지만 일부 작가들의 생각이 탕카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는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문화대혁명을 그렸다. 한 사람이 발 밑에 책을 밟고 있는데, 그 밑에 작은 사람 하나가 그의 발을 옮기며 구걸하는 모양이다. ‘한 번만 봐 달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다. 미세먼지나 환경파괴 같은 소재의 작품도 그렸다.
 

내 아들은 18살이다. 나는 아들을 티베트에서 떠나 보내 본토대학에 보냈다. 당시 티베트에서 본토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11~12살에 본토로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장족 아이들은 졸업 후 99%가 고향으로 돌아왔고 극소수만이 본토에 남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 나보다 생각이 있어 내가 그들에 자를 맞춰간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티베트불교를 믿으려면 뼛속 깊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이가 들었고 두 아이 모두 티베트로 돌아왔다. 딸은 르카쩌(日喀则)의 공무원이고 아들은 의학공부를 하고 있다. 딸은 집에 돌아와 잠도 못자게 하며 나에게 밤낮없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나는 본토에 자주 간다. 2007년에는 창춘(长春)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2009년에는 광저우(广州), 베이징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2013년에만 전시회, 회의, 문화교류를 위해 7~8차례 본토에 갔다. 나의 작품은 본토, 외국에서 전시되었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탕카를 팔고 현대적인 작품을 그리는 것이 모두 틀린 것이며, 장족문화를 모욕하고 탕카를 상품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본토의 많은 일들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티베트에서는 길을 묻는 것이 아주 흔한 일로 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옆에 있던 4~5명이 대답을 해준다. 한번은 나와 아내가 베이징에서 길을 잃어 사람을 막고는 “동지, 여기로 가려면 어떻게 갑니까?”고 물었는데 그냥 무시당했다. “선생님, 아가씨, 여기로 가려면 어떻게 가나요?”라고 다섯 사람에게 연이어 물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나와 거리를 두며 손을 내저었다. 또 한번은 육교를 올라가다가 한 아주머니가 짐이 많길래 도와주러 갔더니 자신의 물건을 훔치려 한다며 뒤돌아서 욕을 했다.
 

얼마 전에는 본토에서 택시를 타고 길을 가다가 한 여자아이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하는데 주위에 있던 40~50명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뛰어내리게 했다는 방송을 들었다—법을 어긴 행동 아닌가?
어쩔 때는 그림 한 장을 찍어 27~28만 위안을 받기도 하는데, 이 돈 역시 본토사람이 내는 것이다. 사람마음을 점점 모르겠다.
 

라사의 번화도 점점 커지고 있다. 호텔이 많아지고, 곳곳에 도로가 깔리고, 산수곳곳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습지의 샘물은 보이지 않는다. 북쪽에 있는 습지 하나만 그나마 관광지로 구분되어 남아있다.
 

길이 붐비고 건물이 많아지고 먹고 입을 것은 생겼지만 다른 것은 이미 극소수만 남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문화는 알지 못한 채 힙합같은 것만 즐기고 사람들은 급해졌다.
 

티베트인들은 살생을 할 수 없다. 우리 가계에는 쥐를 몇 마리 키우는데, 한 마리가 다리가 다쳐 제자들이 쌀밥을 준다. 손님들은 쥐들을 보고 깜짝 놀라고 티베트인들의 규칙을 알지도 못한다. 많은 한족사람들은 가계에 들어와 그냥 탕카 위에 앉거나 5~6명이 들어와서는 사진기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티베트인은 그러지 않는다. 어떤 손님은 승려가 싸인 한 탕카를 찾는다. 그러나 승려의 본업이 수행과 제도로 대부분의 승려들은 그림을 그릴 줄 모르며, 그림을 그리더라도 공양을 위한 것이지 절대 팔지는 않는다. 전문가들은 탕카가 유명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유독 여행객들만 이를 모르고 승려가 싸인 한 탕카만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쓰촨(四川), 칭하이(青海)의 티베트지역에서는 머리 좋은 승려들이 가사를 두르고 탕카를 그린 후 싸인해 주며 비싼 값에 팔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상업화되고 있다. 옛날 탕카를 그리는 것은 신성한 일이라 흰 베를 짜고 바탕을 만들어 세 번 머리를 조아린 후에야 작업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 상점가의 가게 70%는 외지사람들이 연 것이다. 많은 본토인들이 이곳에 와서 힘들게 일한다. 임금이 높고 기회가 많으며 곳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에 아쉬움이 참 많다. 젊은 시절 벽화를 그린 벽이 갈라져 벽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그냥 허무는 바람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벽화를 그냥 깨버렸다. 수천 년이 걸려도 되돌리지 못할 작품들이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스승님이다. 스승님을 뵐 면목이 없고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저작권자ⓒ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카카오톡 보내기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daum
진상욱 기자 다른기사보기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헤드라인HEAD LINE

포토뉴스PHOTO NEWS

많이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