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아닝(陈家宁): 홍방재봉사(红帮裁缝)의 자부심과 초조함

천지아닝(陈家宁)은 고급 맞춤 양복 브랜드 W.W.Chan & Sons의 제2대 전수자이다.
그는 열 다섯 살에 입문해 서른 살에 부친으로부터 매장을 이어받아 올해 예순 다섯 살이 되었다. 반평생 동안 쇠락한 수공예 분야에서 자신의 자부심과 원칙을 지키고 있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6-03-18 09: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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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기자: 저우펑팅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춘절(春节: 중국의 음력 설)을 앞두고 천지아닝은 홍콩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우리 할아버지의 사진이 당신네 가게에 걸려 있었는데 만약 아직도 있으면 저에게 부쳐주시겠습니까?”천지아닝은 Captain Steele의 사진을 기억한다. 그 사진은 카오룽 카메론 로드점에서 1960년 1월 1일 신년 파티 할 때 찍은 사진으로, 그가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1950년 홍방재봉사(红帮裁缝) 천룽화(陈荣华)은 홍콩에서 자기 가문의 맞춤 양복점을 열었다. 1982년 장남 천지아닝이 이어받아 회사명을 W.W.Chan & Sons으로 바꾼 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반세기 동안 홍콩의 맞춤 양복점은 전성기 때 일, 이백여 곳에 달했으나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천지아닝의 양복점이다. 


천지아닝은 오래된 단골 Captain Steele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아들 또한 기장으로 그의 매장에서 양복을 맞춘 적도 있다. 


“대대로 찾아오는 고객들이 있습니다. 우리와 관계가 좋죠. 어떤 고객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아들이) 아버지의 양복을 가져와 문의합니다.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자기가 입을 수 있도록 수선해 달라고요.” 천지아닝은 고객자료가 가득한 자료실에서 광동(广东)어가 섞인 홍콩 발음으로 <중국신문주간>기자에게 말했다. 그의 말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몇 박자 느려진 것을 보니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빠진 것 같았다. 


2002년 천지아닝은 아버지의 사업을 홍콩에서 상하이로 옮겨와 최초로 상하이 마오밍난루(茂名南路) 맞춤 양복점 거리에 입주했다. 1940년대 상하이 난징루(南京路)에 있었던 홍방재봉사들은 상하이에서 나와 고객들을 따라 해외로 가게를 옮겼다. 요즘 들어 맞춤 양복 시장이 다시 형성되었고, 이 거리의 장사도 갈수록 잘되고 있다. 그러나 Captain Steele처럼 2,3대가 한 양복점을 선호해 찾는 것은 천지아닝도 상하이에서 처음 겪은 일이다. 


재봉은 스타일이 아니라 스탠더드가 필요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천지아닝은 올해 예순 다섯 살로 마르고 키가 큰 신사 스타일이다. 신경 쓴 듯한 양복구두를 신고 양복 제작의 기준과 세부사항을 이야기하면서 과장된 시범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고객들과 소통하면서 생긴 습관일 것이다. 

 

천지아닝은 15살에 입문해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재봉일을 한지도 벌써 50년이 되었고 이미 돋보기안경을 쓰고 일할 나이가 되었다. 최근 몇 년 그는 일선에서 은퇴해 홍콩과 상하이의 3개 점포를 경험이 풍부한 마스터들에게 맡기고 가끔 중요한 고객이나 오랜 단골이 찾아오면 그때서야 비로소 매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기자와 인터뷰하는 날 아침, 상하이 마오밍난루에 위치한 가게에서 명성을 듣고 찾아온 고객 쉬(徐)선생은 그를 알아보았다. “손님이 오시면 내가 접대해야지요. 물론 이미 많은 물건들이 어디 놓였는지 잘 모르지마는요.” 


마오밍난루는 상하이의 유명한 고급 맞춤 양복 거리로 중국의 새빌로우(Savile Row, 백 년 역사의 영국 맞춤 양복 거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3년 천지아닝은 이곳에 브랜드전문점을 열고 뒤이어 다른 맞춤 양복점들을 연달아 입주시켜 이 곳의 임대료가 갑자기 5배나 뛰었다. 천지아닝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매장을 길 끝 한적한 곳에 있는 3층짜리 작은 건물로 옮겨 6년을 계속 임대했다. 첫 해는 장사가 조금 안되더니 그 후 몇 년째 오히려 더 좋아지고 있다. 


상하이에서 13년을 살았지만 천지아닝의 푸퉁화(普通话: 현대 표준 중국어)는 여전히 그다지 유창하지 않고 광동어와 영어가 뒤섞여 나왔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글자 하나 하나의 발음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조급해서 되도록 빨리 의사를 완전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서 고집스런 진실함이 느껴졌다. 


쉬선생은 홍콩과 베이징에서 모두 양복을 맞춰 본 경험이 있었지만 스타일이나 원단, 어울리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천지아닝과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20여 종의 셔츠 옷깃 디자인과 수 백 가지의 원단 앞에서 결국 선택을 포기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매장에서 쉬선생에게 준 사이즈 측정 표를 보면 양복외투 한 벌과 바지 한 벌에도 각각 10개의 다른 신체 부위 사이즈를 측정해야 했고 셔츠는 5개 수치를 측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마스터 빠오(包)는 모든 수치를 측정하는데 2~3분정도밖에 안 걸렸다. 완벽하게 치수를 재면서 마스터 빠오는 동시에 예리한 눈으로 오른쪽 어깨가 아래로 처지고 목이 굵고 짧으며 배가 나오고 낙타처럼 등이 굽고 양쪽 다리 길이가 동일하지 않다는 등 고객 신체 각 부위의 결점을 모두 파악했다. 마스터 빠오는 쉬선생에게 평소의 자세, 걷는 방식에 대해 꼼꼼히 물으며 표시를 했다. 그렇게 마름질과 바느질의 세부사항을 조정하니 가장 몸에 잘 맞는 상태가 된다. 


몸에 잘 맞는다는 것은 천지아닝에게 있어 수작업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자 맞춤옷(Bespoke)이 기성품을 구입하는 것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몸에 맞는다는 것은 크기와 조임이 모두 편하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움직이든지 좋은 양복이라면 어깨와 옷깃 부분이 언제나 몸에 붙어 있어야 하죠. 바로 몸 위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 


“재봉은 스타일은 필요 없습니다. 스탠더드, 즉 글로벌 스탠더드가 필요하지요.”이는 천지아닝인 50년 동안 지켜온 원칙이다.


이 원칙은 구체적으로 모든 옷은 제작에 있어 ‘줄을 맞추고, 격자를 맞추고 무늬를 맞춰야’ 하며 옷깃, 주머니, 소매 등의 원단은 반드시 최대한 무늬를 맞춰야 한다는 내용까지 포함한다. 기성품에 있어 이는 매우 편리한 기술이지만, ‘편함’을 전제로 하는 맞춤에 있어 이는 하나의 큰 학문이다. 


“W.W.Chan & Sons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 기술을 지키고 원칙에 따랐기 때문입니다.”천지아닝은 제작이 완료된 양복의 라펠(lapel: 양복의 접은 옷깃)을 뒤집었다. 전통방식으로 라펠 팔자뜨기(pad-stitching lapel)를 한다는 것은 수공 봉제 방법으로 원단과 심지를 연결하는 것으로 쉽게 변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입체적이고 빳빳하게 구김 없는 라펠을 유지할 수 있다. 그가 라펠의 뒷면을 뒤집자 위에는 촘촘한 바늘구멍이 보였다. 기성품과 브랜드가 주류를 차지하는 시대에 재봉업계에는 한동안 접착심지 기술이 성행했다. 공장에서 옷을 만들면 모두 접착 심지 하나를 붙이고 기계로 심지를 원단 뒷면에 붙여 대량 생산에 필요한 시간과 공정을 절약한다. 원단이 단단해지면 옷은 빳빳하고 구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단 입어 보면 양복의 편안함과 활동성은 사라진다. 현재 상하이에서 전 공정 수작업으로 비접착심지를 쓰는 양복점은 벌써 손으로 꼽을 정도다. 


고객이 첫 방문을 하면 원단, 심지, 단추를 모두 일일이 결정하고 마름질의 초안으로 ‘1:1’ 비율의 패턴을 만든다. 1주 후 고객은 처음으로 피팅을 한다. 옷본에 따라 마름질한 원단을 임시로 바느질해 형태를 만드는데 이를 입고 피팅을 한다. 마스터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핀으로 수정부위를 체크한다. 


두 번째 피팅 시 고객은 매장 내 피팅실에서 6면 거울을 사용, 사각 지대 없이 전 방위적으로 옷의 하자를 확인한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문제점이나 마음에 드는 점을 모두 볼 수 있도록 합니다.”모든 고객은 2번의 피팅 기회가 있다. 납품을 위한 세 번째 피팅 시 천지아닝은 고객에게 반드시 구두를 신고 오라고 한다. 특히 “편안한 청바지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의 젊은이라도 우리 옷을 입고 구두를 신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죠.”이는 천지아닝이 가장 만족스러울 때로 “내가 얼마나 벌었냐 보다 더욱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가업 계승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비록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천지아닝은 상하이과 닝보 사투리를 알아 듣고 기본적으로 소통하는데 장애가 없다. 이는 그는 옷본, 줄자, 초크, 원단무더기와 닝보 사투리를 쓰는 홍방재봉사가 있는 환경에서 컸기 때문이다. 

 

1920년대초 민간에서는 외국인을 “홍모인(红毛人)”이라고 하고 홍모인을 위해 옷을 만드는 닝보의 재봉사를 홍방재봉사라고 했다. 홍방재봉사의 기술은 일본에서 기원한 것으로 상하이에서 그 이름을 떨쳤다. 1930,40년대 홍방재봉사는 상하이 번화가인 난징루, 쓰촨루, 시아페이루 등 10여개 거리에 400여개의 양복점을 열었는데 그 중 바로몽(Baromon)과 같은 명품도 적지 않았다. 간판에 영문이름을 쓰는 것이 중국어보다 눈에 잘 뜨였기 때문에 가게 이름 뒤에 ‘Tailor’를 더했고 W.W.Chan & Sons도 마찬가지였다.


천지아닝의 부친 천룽화는 농촌을 떠나 강호를 떠돌던 제1대 홍방재봉사였다. 천룽화는 1922년 저장 닝보 인현에서 태어났다. 14살에 상하이 ‘셩리(生利)’양복점에 가서 견습공이 되었다. 7년 후 스물 한 살의 천룽화는 상하이시 사립 양복기술학교 재단학원에 들어가 홍방의 종사인 구톈윈(顾天云)의 가르침을 받고 3등으로 졸업했다. 


최근 천지아닝은 부친이 졸업 당시 받았던 상장과 상품, 은반지 하나, 그리고 부친이 1973년에 제작한 싱글 쓰리 버튼 양복을 닝보 복장박물관에 증정해 박물관 2층 전시실에 진열되었다. 


어릴 적 매장에서 5분 거리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천지아닝은 가끔 가게로 가서 아버지에게 우유배달을 했다. 가게에 가는 날이면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고 앉아서 아버지가 장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부를 가르치러 온 사촌 형이 “공부할 과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장사꾼이구나”라고 그를 놀렸다. 큰 아들로서 이런 환경에서 자란 그는 장사를 계속하려면 누구든지 맡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 후 편하게 사업을 돌보기 위해 부친은 아예 집과 매장, 공장을 모두 2층짜리 건물로 옮겼다. 10대 초반부터 천지아닝은 가게를 도우며 잡일을 하고 저녁에는 고객들에게 옷을 배달했다. “당시 회사의 대부분 고객은 모두 해외 관광객이었습니다. 왔다가 2,3일이면 돌아 가니까 납품시간이 급했죠. 밤 12시에 완성되면 그날 밤 고객의 호텔로 배달했습니다. 조금씩 습관이 되다 보니 공부가 잘 안되더군요. ”천지아닝은 말했다. 


열 다섯 살이 되던 1967년, 그는 정식으로 스승을 모시고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들’에서 ‘제자’가 된 것이다. 재봉은 수작업이라 말로도 가르치고 몸소 행동으로도 가르쳐야 했다. 정통 홍방재봉사는 엄격한 시스템의 전문화된 훈련을 거쳐야 했다. 홍방은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기술을 전수했다. 제자들은 보통 열셋, 열네 살부터 시작해서 마름질, 수작업, 재봉질, 다림질을 배웠다. 3년이면 독립해서 5년이면 바야흐로 작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진정으로 이름을 날리려면 일반적으로 5,60대의 경험 있는 마스터가 될 때까지 버텨야 했다. 


예전의 마스터는 ‘제자를 키우면 스승은 굶어 죽는다’는 심리가 있어서 기술을 전수할 때 조금씩 남겼다. 스승을 모시고 기술을 배우려면 부지런하고 이해력이 있어야 했으며 구타나 욕먹는 것도 참아내야 했다. 그러나 부자관계라서 천지아닝의 제자로서의 삶은 비록 맞기도 욕 먹기도 했지만 비교적 순조로웠다.
이후의 삶은 직업과 뒤섞여 재봉사의 아들에서 양복점 주인으로 승진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3년을 제하고는 평생 동안 그는 양복점을 떠나지 않았다. 


재봉은 외로운 일


천지아닝의 경력은 맞춤 양복업계의 상황에 따라 기복이 있었다. 1982년 그가 회사를 이어받았을 때 홍콩의 맞춤 양복업계는 벌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쉰세 살의 량야오후이(梁耀辉)는 지금 W.W.Chan & Sons 상하이 포트먼점의 사장이다 그는 열네 살에 홍콩호텔 양복점의 견습공이 되면서 업계에 입문했다. “40년전 맞춤 양복업계가 가장 번성했던 시절, 홍콩에는 수백 개의 매장이 침사추이, 센트럴, 코즈웨이 베이의 힐튼 호텔, 페닌슐라 호텔 등 5성급 호텔 지하에 모여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호텔에 십여 개 심지어 이십여 개의 양복점이 있었죠.”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당시 천지아닝의 매장에는 1명의 마스터가 12~13명 제자를 데리고 밤낮없이 일했다. “맨 처음에는 모두 영국인 고객이었어요. 영국이 양복 입는데 까다롭거든요. 그 후에 미국 경제가 좋아지니까 미국 고객이 늘었죠. 미국에서 한 벌 맞출 가격으로 홍콩에서 5벌, 심지어 더 많이 맞출 수 있거든요. 그래서 회의나 여행하러 올 때 한 번에 여러 벌을 맞춰 갔습니다. 미국 기성복 시장이 발전한 후에는 고객이 일본인, 한국인, 대만인으로 변했고, 한 동안은 호주 고객도 왔습니다. 요즘은 본토 고객이 옵니다.” 당시 홍콩에는 양복점이 너무 많고 유명한 곳도 많았는데 훗날 계속 명맥을 유지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 후 사람들이 기계의 효율과 기성복브랜드가 상징하는 신분에 연연하게 되면서 양복점은 의류공장에 의해 도태되었고 맞춤은 기성복으로 대체되었으며 양복점에서 새 옷을 만드는 것은 가난과 촌스러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재봉을 하는 것은 아주 외로운 일이다. “옷 한 벌을 만들려면 아주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죠. 이것은 최첨단 기술은 아니라 그저 옷 한 벌일 뿐입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이렇게 큰 정력을 쓰는 것이 가치 있습니까?” 천지아닝은 요즘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본토로 돌아온 후 현지 재봉사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천지아닝은 본토 직원이 똑똑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똑똑함이 지나쳤다.”가장 전형적인 예는 매번 고객이 가봉을 하면 옷본을 수정해 저장하는데 본토 직원은 수정하는데 있어 아주 형편없다. “그들은 어차피 다음 번에 고객이 다시 올 거니까 옷본을 고치는 일이 별반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필요 없는지는 완전히 다른 일이지요. 당신이 이 한 시간을 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쓰면 더 빨리 많은 수고를 덜 수 있겠지만 진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


또 명성을 듣고 천지아닝을 찾아온 외지의 재봉사가 있었다. 그는 수만 위엔을 써서 옷 한 벌을 만들며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우길 바랬다. 천지아닝은 소장하던 일본과 유럽의 재단 관련 서적을 그에게 주었지만 “그는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직원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재봉이 신성한 직업은 아니다. 그저 바늘과 실, 가위, 자로 옷 한 벌을 재단해 내는 일일 뿐이다. 전체적인 품질과 세세한 장인정신은 설령 옷을 입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고객이라도 십중팔구는 결코 완전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맞춤 양복이 쇠락하고 수입도 이전보다 못할 때도 있었지만 진정으로 바늘 한 땀 한 땀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재봉사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기쁨과 고고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부족


최근 몇 년 사이 ‘수공 맞춤’의 개념이 중국 본토에서 다시 급부상하자 예리한 장사꾼인 천지아닝은 과감하게 사업의 중심을 상하이로 옮겼다. 하지만 상하이탄은 이미 60년 전 아버지가 나올 때의 모습이 아니었고 기술을 전승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역부족이었다. 진정으로 재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스터들은 갈수록 희소해졌고 젊은이 중 조용히 이를 배우고자 하는 이가 드물었다. 


홍콩 매장의 담당 사장 주화미아오(朱华苗)는 1986년부터 천지아닝을 따르고 있다. 천지아닝을 여러 차례 그를 언급하며 만족스러워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자와 파트너를 상하이에서 찾기란 너무 어려워졌다. 일찍이 1980년대 천지아닝은 선전(深圳)에 공장을 세우고 멀리 미국까지 가서 주문을 받아와 공장의 생산량을 유지하고 직원들을 훈련시켰다. 최고일 때는 200여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진정으로 남아 계속 상하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 겨우 20명이다.


이전의 마스터들과는 달리 천지아닝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 모두를 전수하고 싶어한다. 한때 그는 모든 기술을 조금도 남김없이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나 그들은 얼마 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경쟁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로 인해 천지아닝은 많이 상심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가업을 계승하라고 설득할 수 없었다. 


아들 천펑판(陈风凡)은 빠링호우(80后: 80년대 이후 출생한 중국의 외동 자녀들을 지칭하는 말로 소황제라 불리 우며 모든 가족의 관심아래 부러울 것 없이 자라 세대)로 올해 34세이다. 아버지가 빳빳하게 다린 양복을 입는 것과 달리 모델 같은 체격의 천펑판은 양복 넥타이에 청바지를 매치해 있는 패셔니스트다. 아버지 천지아닝의 ‘사명감’ 과 ‘시종일관’의 자세와 달리 그는 기존 관례를 고수하는 것에 저항하며 ‘표준’의 속박을 거부한다. 


10년전 모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그가 혼란기에 빠져 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상해로 소환해 가업을 이어받게 했다. 하지만 3년동안 배우면서 천펑판은 처음으로 재봉의 시각에서 이 일을 인식하게 되었고 갈수록 재봉일이 자신의 개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어린 제자가 입문한 것과 같이 고객에게 전표 발행하면서 영어로 보기 좋게 쓰는 것과 현금 지폐 세기, 원단 정리, 손님 부르기 등의 일을 했죠. 고객들에게 전문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재빠르고 민첩하게 해야 해요. ” 이런 것들이 아들 천펑판의 눈에는 “본질이 아닌 무의미한 일”이었으나 부친에게는 이 직업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


천펑판은 ‘더욱 깊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배우지 않아도 제가 영업을 하면 두 배는 팔 수 있어요. 자기 힘으로 직접 하는 것은 이 시대에 맞지 않아요.” 


천펑판은 “한가지 기술을 철저하게 배우면 그 기술은 당신의 일부분이 되어 당신을 바꿉니다. 재봉 마스터는 치수에 따라 일을 하죠. 모든 것은 데이터에 따라 하기 때문에 조금의 오차도 없는 것이 바로 완벽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감각을 논하는 것은 부친에게 있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지만 천지아닝은 아버지이자 사장이었다. 막 매장에 나왔을 때 부자 두 사람만 같이 있으면 천펑판은 숨이 막혔다. 


천펑판은 부친을 존경했지만 그의 보수적이고 고집스런 모습에는 상당한 불만을 가졌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자제력이 대단하시죠. 마늘양념과 마늘 먹는 걸 좋아하시는데 고객 접대할 때 불편하니까 가까이도 안 하세요. 매일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가 업무시간인데 출근은 꼭 15분전에 해야 해요. 만약 정시에 회사에 도착하면 지각한 셈입니다. 그분은 조금도 논의의 여지가 없으세요. 받아들이거나 못 받아들이거나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아들의 눈에는 옷을 잘 만들고 고객에게 서비스 잘하는 것이 부친 업무의 전부였다. 하지만 천펑판은 더 많은 상업적 파트너를 확보해 브랜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 부친에게 세컨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 천지아닝은 젊은 세대의 생각을 지지하고 싶었지만 그 전제는 원래 브랜드의 품질에 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자는 2,3년은 논의했지만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현재 천지아닝의 3개 매장 담당 마스터들은 모두 4,50대로 솜씨나 품질에 대한 요구수준이 천지아닝과 맞는 분들이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은퇴해도 이 브랜드는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업가가 그의 브랜드를 너무 좋아해서 투자해 점포 확대를 돕고 싶어했다. 하지만 천지아닝은 모두 거절했다. 더 이상 좋은 마스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재봉사는 자유가 없다. “어떤 재봉사가 홍콩에 매장을 열었습니다.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데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길은 집에서 회사에 오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봉사고 개인적인 시간은 없습니다. 특히 당신은 한 일에 완전히 몰두해야 합니다. ”


천지아닝은 부친은 재봉을 가장 좋아하셨고 두번째로 사교춤 추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 5년은 매일 오후에 2~3시간씩 춤을 추러 가셨는데 그때야말로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젊었을 때 우표수집, 로큰롤, 사진촬영을 좋아해서 지금도 라이카 M6 두 대를 가지고 있으며 또 클래식 음악 마니아지만 1년에 한번도 듣지 못하는 상황이다. 막 상하이로 옮긴 초기 5년동안 적합한 마스터를 찾지 못해 그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가게를 지키며 일년 내내 하루도 쉬지 못했다.


이제 그가 은퇴해야 할 때가 되었다. “15살에 입문해서 오래도 했죠. 충분합니다. 물러날 때가 되었어요.” 천지아닝은 쇼윈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것은 아들이 더 이상 부친의 솜씨를 이어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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