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에서 ‘대국외교’까지
- 중국은 비록 대국이지만, 오랜 기간동안 대국외교가 없었다. 중국이 대국외교를 할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장기간 국력이 약소하여 대국외교의 자원과 지지방법이 취약했고, 대국외교에 대한 의식과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현재 중국은 튼튼한 대국외교 실력을 축적하였고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예전에 비해 크게 증가하였다. 앞으로 중국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와 인류의 평화 발전을 위해 목소
- 채여봉 news@inewschina.co.kr | 2015-02-03 17:14:06
[중국신문주간 채여봉 기자] 중국외교 전략은 주요 국제관계와 외교현안에 영향을 받으며 10 년주기로 큰 조정 과정을 거치며 기본 골격이 변화 발전해 왔다.
지난 세기 중국외교는 50 년대의 ‘소련 일변도’, 60 년대의 ‘제국주의와 수정주의 양자 거부 전략’에서 70 년대의 ‘하나의 선 외교’, 80 년대의 ‘무동맹 외교’, 90 년대의 ‘도광양회’ 전략을 거쳐 현재는 ‘대국외교’로 외교 전략의 큰 틀이 변화해 왔다.
중국 국제문제 연구원 원장인 곡성씨에 따르면 신중국 성립 이후 60 년 간의 중국 외교사는 국가주권과 영토완정을 공고히 하며, 끊임없이 국제환경을 창조적으로 개선시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향상시켜 중국민족의 부흥을 위하여 보다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온 역사창조의 과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 일변도’에서 ‘하나의 선 외교’까지
1949 년 건국 전후에는 서방국가의 정치적 고립전략과 경제봉쇄에 맞서기 위하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회복시키려는 외교 전략을 취했다. 국민경제 회복과 사회주의 건설에 유리한 국제 외교환경을 만들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기초를 버리고 새로 다시 만든다’, ‘방을 깨끗이 청소하며 손님을 대접한다’와 ‘소련 일변도’ 라는 3 대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기초를 버리고 새로 다시 만든다’는 원칙은 국민정부가 각 나라와 이미 구축한 과거의 외교관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서 외교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구중국에 주재한 각 나라의 외교사절을 공식적인 외교대표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평범한 교민으로 대하는 전략이다.
‘방을 깨끗이 청소하며 손님을 대접한다’는 유럽과 미국 등 서방국가가 기존에 중국에서 행사하던 영향력과 특권을 청산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당시 중국의 대서방 외교 원칙은 마치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방을 깨끗이 청소하듯이 ‘차라리 기다릴지언정 섣부른 외교관계를 구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련 일변도’의 외교정책은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으로서 사회주의 외교정책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한 것으로서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략이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은 서방과 사회주의 양대 진영이 냉전을 막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의 외교전략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택동이 말하다시피. 당시 중국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갈림길에서 제 3 의 길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중국과 소련의 우호적인 관계가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50 년대 중반 이후, 중·소 관계는 끊임없이 악화되어 중국은 점차 초강대국인 미국 및 소련과 동시에 거리를 두는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후 중국은 ‘두 개의 주먹으로 사람을 때리는’ 등거리 외교전략을 펼치게 된다. 즉, ‘소련과 동시에 미국과도 항쟁한다’는 것이다. 이 외교전략은 70 년대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노련한 중국 외교관인 오건민의 기억에 따르면, “1965 년 전후, 중국의 외교 형세가 좋지 않았다. 3 년간 장제스가 반공을 부르짖으며 대륙을 향해 반격했고. 1962 년에는 인도와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인도와의 전쟁은 중국 측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지지를 얻어서(아마 소련의 묵인도 있었을 것이다) 인도가 먼저 시작하였다. 이 전쟁을 호기로 활용하려던 인도에 맞서 3 년 간의 많은 사람들이 죽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중국인은 잘 버티며 뉴델리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그 당시에 모택동은 군대 철수 이후 노획한 인도 무기, 장비 및 포로 등을 모두 무사 귀환시키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서 돌려보내는 등 일련의 우호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는 당시 중국이 인도와의 싸움을 원치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70 년대 초반, 미·소 및 중·미·소 3 국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다. 이에 따라 중국의 외교는 ‘하나의 선 외교’ 전략으로 새롭게 변하기 시작한다. 즉 미국을 포함한 중국과 대략 같은 위도선에 있는 나라를 단결하여 소련의 확장주의 국제통일전선에 공동 대응한다. 이 시기에 미국도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해결책을 찾게 됨에 따라 중·미 양국의 관계는 점차 호전된다.
1972 년 2 월 21 일, 닉슨의 중국방문은 중·미 관계의 정상화와 중국 외교전략의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한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중국 외교에서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다
1976 년 ‘사인방’의 붕괴와 1978 년 중국공산당 11 기 3 중 전회의 개막에 따라 중국은 개혁 개방의 새국면화 함께 외교정책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건민의 회고에 따르면.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전에 몇 가지 의미있는 외교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우선은 주변국 방문 이후 1978 년 9 월 일본 방문에 이어 미국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덩샤오핑 동지가 일본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을뿐더러 일본인에게 우리를 좀 도와달라고 명확히 말하였다. 개혁개방 초기에 엔차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의 많은 방법들은 일본 경험을 본보기로 삼은 것이었다. 샤오핑의 이 모든 외교활동은 향후 중국 경제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전쟁과 혁명’에서 ‘평화와 발전’으로 시대의 주제가 이행되면서 중국외교는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발 빠른 행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고 오건민은 회고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1982 년 중국공산당 12 기 회의는 ‘하나의 선 외교’에서 “무동맹 평화외교전략”이라는 엄청난 외교전략의 변화를 실현하였다. 중국은 이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협력을 통한 양국의 공동 이익 추구라는 신협력관계 구축을 통해 ‘적이 없는 나라’라는 전혀 새로운 외교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중공 11 기 회의는 적과 우방을 구분하던 과거의 외교이념을 폐기했다. 50 년대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민족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로 나누던 것을 60 년대와 70 년대에는 중국의 국제지위 정도에 따라 제1 세계(초강대국), 제 2 세계(초강대국 외에 선진국)와 제 3 세계(발전도상국)로 조정하였다.
칭화대 국제관계 연구원 원장인 염학씨의 분석에 따르면 “이 두 분류의 국가 개념은 비록 기존의 것과 다르지만 우방과 친구를 구분하는 새로운 정치외교이념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중공 12 대 이후, 중국 외교가 적과 친구의 이념을 담수화하기 시작하였다. 외교는 경제건설의 임무에 복무하여 발전도상국의 순서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회고했다.
12 대 보고 중에 외교대상국 순서는 일본, 미국, 소련과 제 3 세계이다. 1987 년의 중공 13 대 보고는 기존의 외교대상국의 순서를 취소시켜 “세계 각 나라와 좋은 협력 관계를 발전하는 것”으로 새롭게 문제제기하였다. 염학은 “적과 우방의 방식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경제협력 외교이념”이라고 말했다.
주권분쟁이 있는 영토에 대하여 중국은 이 시기에 “분쟁을 내려놓고, 공동 개발”의 정책주장을 제기하였다. 1984 년 10 월 22 일, 덩샤오핑이 중공 중앙 고문 위원회 제 3 회 전체회의에서 댜오위다오와 남사 군도 등 주권은 중국에 속한다. 동시에 “주권 문제를 내려놓고, 공동 개발하는 것은 몇 년 간 축적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하였다. 세계에는 이러한 국제 쟁단이 많으며 우리 중국인은 평화를 주장하며 평화의 방식으로 쟁단을 해결하는 것을 원한다”고 하였다.
도광양회 출두하지 않는다
1989 년의 정치적 격변기 이후, 미국 등 서방은 중국과의 전면적인 관계개선을 시도하였다. 80년대 말부터 90 년대 초까지, 동부 유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소련까지도 해체되었다. 냉전 분포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어 세계전략의 힘의 균형이 변했다.
국제관계의 급격한 변화압력 속에서 덩샤오핑은 실용외교라는 개념의 도광양회를 새로운 외교 방침으로 제기하였다.
“경제부흥을 통해 중국은 이미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섰다. 이는 서구사회에 큰 압박이 될 것이며, 중국이 지난 500년간 서양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 체계를 전복시키지는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1990 년 12 월, 덩샤오핑이 또한 여러 중공 중앙 책임자에게 “제 3 세계 일부 나라는 중국이 주도하면 좋겠다”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내정간섭하면 안 되며 이것은 근본적인 정책이다. 중국은 영원히 제 3 세계의 한쪽에 있다. 중국은 영원히 제패하지 않으며 주도하지 않는다. 단, 국제문제의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과는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제가 보기에는 적극적으로 국제정치경제의 새로운 질서 정립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 공존 5 대 원칙에 따라 일하며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라고 하였다.1992 년 4 월 28 일, 덩샤오핑은 주변 임원과 함께 중국 발전문제를 토론할 시, “우리는 재능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게 몇 년동안 더 해 보아야 비교적으로 좀 큰 정치의 힘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국제에서 무게있는 발언을 할 때 달라질 것이다”고 말하였다.
냉전이 끝날 무렵, 덩샤오핑은 중국이 국제 관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 방침을 20 글자로 집약하였다. ‘冷静观察、稳住阵脚、沉着应付、韬光养晦、有所作为’. (유심히 관찰하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대응할 것이며, 나대지 않고 겸손하게 좋은 결과를 쟁취하는 것이다)
1992 년 중공 14 대 후, 중국 개혁 개방이 새로운 단계에 돌입하면서 사회주의시장 경제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국가 경영의 주제가 되었다. 나아가 대외 개방을 확대하여 속도를 내 중국 경제와 국제시장의 체제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국 외교의 중심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2005 년에 후진타오가 UN 창립 60 주년 기념 수뇌회담에서 처음으로 ‘조화로운 세계’의 새이념을 제기하였고 중공 17기 대표회의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정치에서는 서로 존중하며 경제에서는 서로 협력하며 문화에서는 서로 참고하며 안전에서는 서로 신뢰하며 환경보호에서는 서로 돕는다.
비록 조화로운 세계는 장기적인 목표이지만, 충분히 중국외교가 한 차원 높은 이 이념 하에서 과학발전과 평화발전을 이룩하자고는 중국 외교정책의 3 대 기본 원칙을 제시하게 된다.
이 시기에 중국외교의 정책 메커니즘도 한단계 성숙하게 된다. 중국인민대학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인 김찬영이 말하였다. “덩샤오핑 시대에 우리의 외교정책은 지도자가 방법을 정하면 기술관료는 의견을 제공하는 식이었으나, 중국 외교 환경과 외교문제가 복잡해짐에 따라 우리의 정책 메커니즘도 변화한다. 한가지 특별하며 중요한 점은 지도자의 결정적 역할 외에 전문 외교부문과 비외교부문의 역할도 분명히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90 년대 후반, 외교정책에 참여하는 것은 이제 외교부, 상무부, 국방부 등 전통 부문의 전용권한이 아니다. 국무원 직속에 27 개의 부와 위원회는 모두 국제사 등 섭외사무의 직능부문이 설립되었다.
그 외에 외교정책에서는 지방정부의 영향력도 점차 증가하였다. 중앙정부가 더 많은 권력을 지방에 위양시키는 것은 지방정부가 그 지역의 수출 보조금을 제정할 수 있게 되면서 중국은 대외교 정책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대국외교 첫출발
30 년동안 연평균 증가 10%의 경제 성장을 통해 중국은 이미 세계 제 2 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면서 세계경제의 주요 동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동시에 중국은 광범위하게 국제사무에 참여 점차 국제무대의 떠오르게 된다. 세계 평화의 정착을 수호하며 국제협력을 촉진시키는 측면에서도 더욱 더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경제부흥을 통해 중국은 이미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섰다. 이는 서구사회에 큰 압박이 될 것이며, 중국이 지난 500 년간 서양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 체계를 전복시키지는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서양 대중매체에 중국 관련 위협론, 붕괴론, 책임론 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이 큰 돌맹이가 “자신을 부딪히지 않을까, 자기의 길을 막히게 하지 않을까, 자신의 근거지를 점유하지 않을까”를 걱정하였다.
중국외교가 현재 직면한 기회와 도전에 대하여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 부원장 왕역주는 “한편,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신흥시장과 경제 동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각 나라와 국제사회는 그의 힘과 추세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중국과의 협력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중국도 많은 외부 위협을 강과하지 말고 새롭게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부흥한 대국으로서 중국이 어떻게 국제질서의 변혁에서 유익한 위치를 차지하고 어떠한 외교전략을 실시할지는 대국지위와 관련 있을 뿐더러 중국 자체의 변화발전과도 관련 있다.
한 논평에서 “중국은 비록 대국이지만, 장기간 대국외교가 없었으며 중국외교는 대부분이 자신의 일과 관련된 방어적 색채가 뚜렷하였다”고 하였다. 대국외교의 상징은 남의 이야기, 세계의 일을 상담하는 것이며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중국 장기적으로 국력이 약소하여 대국외교의 자원과 지지방식이 부족했을뿐 아니라 이 영역의 의식과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중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현재 중국은 튼튼한 대국외교의 경제적 역량을 축적, 국제사무에 대한 영향력도 예전에 비해 증가하였다.
2012 년말 새지도부 취임 이후, 중국은 더욱 적극적으로 국제문제와 인류의 평화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의 대국외교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 전에, 중국 외교에서 대국은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인도, 브라질 이러한 외교대상국”이라고 염학은 늘 말하였다. “현재 ‘대국’은 즉 중국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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