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영화 <아라쟝서>에는 경치뿐만 아니라 인물도 있다
- 숭타이쟈 감독의 신작 <아라쟝서>가 개봉되자 평판이 매우 좋았고, 단편도 별로 없었다. 일반 관객들은 어쩌면 티베트족 이야기는 자신들의 생활과 아득히 멀리 떨어진 것으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감독은 의식적으로 그런 티베트족이란 딱지를 떼버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티베트 영화에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지한숙 기자 newschina21@naver.com | 2019-03-02 16:52:26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지한숙 기자]청두(成都)의 한 찻집에서 친구의 소개로 티베트인 룽중얼쟈(容中尔甲)는 숭타이쟈를 알게 된다. 자리에서 그는 티베트인의 성지 순례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 |
▲ <아라쟝서(阿拉姜色)> 스틸컷. 사진/ 취재원 제공 |
1980년대에 한 노인은 고두백배(叩頭百拜) 하며 라싸(拉萨-시짱자치구 티벳 남부)로 순례하러 가는 길에 가벼운 행장으로 떠나기 위해 그는 몇 십 위안을 들여 작은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행낭을 메워 떠난다.
봄여름이 3번 지나 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그는 라싸로 가는 길에 성장한 당나귀를 끌고 마침내 라싸에 도착한다.
성지순례가 끝나자 당나귀가 문제였다. 그는 다시 3년 동안 당나귀를 끌고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버스는 당나귀가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차를 한 대 세내어 당나귀를 운반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나중에 노인은 당나귀를 라싸의 한 집에 맡겨 기르고, 후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당나귀를 집으로 데려가려 작심했다. 그런데 이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다. 노인은 룽중얼쟈(티벳탄의 유명 가수)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시험을 통해 사립학교 교사에서 공립학교 교사로 전근하려 했으나, 줄곧 시험에 떨어졌다. 그는 농사일도 할 줄 모르고, 결혼도 하지 않다 보니 계속 외롭게 살아왔다. 어릴 적부터 노인에게 마음의 병이 된 사연을 들어 온 룽중얼쟈는 이 이야기를 수십 년 동안 마음에 담와 왔었다.
그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반복하여 말하였고 영화로 만들면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이 건의했다. 이리하여 그는 감독 완마차이단(万玛才旦)을 찾아가 상의했고, 또 시나리오 작가 짜시다와(扎西达娃)를 찾아가 이 이야기를 줄거리로 첫 번째 대본을 썼다.
숭타이쟈는 이 이야기에 아주 흥미를 가졌으며 첫 번째 대본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성지순례라는 주제에는 흥미가 없었다. 한달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그는 다른 대본을 써냈다.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난 어마(俄玛)는 중병을 앓으면서 남편 몰래 라싸로 가는 긴 여정에 올랐다. 병이 위중한 어마는 여행길에서 남편에게 오랜 세월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숨겨온 비밀을 말했다. 그 비밀은 바로 일찍 사별한 그녀의 전 남편의 유골을 가지고 라싸에 가서 성지순례를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아내의 동상이몽 속에서 남편은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의붓아들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다. 길에서 만난 당나귀와 함께 성지순례를 마치고 긴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의붓아들과 마음의 장벽도 사라지고 관계도 좋아지게 된다.
이로써 대본에서는 '성지순례'라는 유형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의 감정과 가정 관계를 핵심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 |
▲ <아라쟝서(阿拉姜色)> 스틸컷. 사진/ 취재원 제공 |
금년에 열린 상하이(上海)국제영화제에서 <아라쟝서>는 쟝원(姜文)이 선임한 심사위원회로부터 최고 시나리오상과 심사위원회상을 받아 이 영화제 최대 승자가 되었다.
수상사(颁奖词)에는 “이 영화는 솔직하고 심각하며, 용감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다루었으며, 또 생명이 마지막 죽을 고비를 맞이할 때의 희망과 구원을 묘사했다. 매번 여행은 자신을 찾기 위한 것으로서 과정 자체가 목적지보다 더욱 중요하다. 만약 인간이 그의 욕망과 자아를 희생한다면 점차 향상되는 여정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대상을 인간의 정신적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려 한다”라고 씌어졌다.
영화에서 관객들은 티베트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고두백배, 신비로운 의식,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강런붜치(冈仁波齐)>와 결코 흡사하거나 동일한 내용의 영화는 아니다.
숭타이쟈는 틀에 박힌 티베트 요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 갖는 것은 오로지 다양한 환경 속에서의 인간의 공통적인 감정이다. 이 전에 감독한 작품 <태양은 언제나 왼쪽에(太阳总在左边)>, <강(河)>부터 오늘의 <아라쟝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했다.
숭타이쟈는 <중국신문주간>에 “사람들은 모두 이런 세속적인 곳에서 살고 있는데 어찌 각자의 가정사 혹은 기름이나 소금, 먹고 마시는 자질구레한 일과 갈라놓을 수 가 있나요. 기왕 갈라놓을 수 없다면 반드시 영화에서 보게 되는 이런 생사이별, 사랑과 원한에 봉착하게 되지요. 과거의 많은 티베트에 관한 영화들은 모두 티베트를 정형화 하는 데만 치중하고, 인물을 아주 적게 부각했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성지순례 자체는 내가 이 영화에서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라쟝서>를 촬영하는 첫 날 밤 숭타이쟈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는 배우의 연기가 이 영화의 핵심이기에 연기에 흠집이 있게 되면 작품이 실패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첫 날 촬영이 끝난 후, 그가 걱정하던 배우의 연기에 문제가 생겼다. 이날 촬영한 장면은 남편과 아내가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이었다.
남편역은 전문배우가 아닌 룽중얼쟈가 출연하고, 아내역은 전문배우인 니마숭숭(尼玛颂宋)이 출연했다. 영화 대사는 룽중얼쟈가 익숙하지 않은 쟈룽 방언(嘉绒方言)의 일종이기에 그는 병음으로 표시하는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외우는 수 밖에 없었는데 종종 대사에 집중하노라면 표정을 소홀히 하거나, 혹은 표정에 열중하노라면 또 리듬을 잘못 잡았다.
쵤영 중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남녀 주역의 주요한 클로즈업이면서 또한 대사가 있고, 표정 교류가 긴 장면인데, 화면속의 룽중얼쟈는 다소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루 종일 촬영을 마치고 돌아 온 제작진은 모두 기진맥진했다. 저녁에 숭타이쟈는 룽중얼쟈에게 낮에 촬영한 영상을 반복하여 보여주며 그의 연기 흔적이 너무 짙고, 아직 인물을 내면화하지 못했다고 가르쳐주었다.
이는 룽중얼쟈로 하여금 1994년에 자기가 녹음실에 들어가 자신의 첫 앨범을 녹음한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녹음을 마친 뒤 밖에 나가 내가 방금전에 부른 노래를 듣고 나의 목소리에 낯선 감이 들었어요. 이는 제가 처음 연기한 거랑 똑같은 느낌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룽중얼쟈는 방에 들어와 감독이 자기에게 이야기해준 남주인공의 생활환경과 감정상태를 되새겨 보며 자신이 아내와의 자질구레한 가정일로 얼굴을 붉히며 말다툼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이튿날 다시 촬영할 때, 룽중얼쟈은 마치 영화속 인물로 환골탈태한 것 같이 이미 숭타이쟈가 대본을 쓸 때, 상상했던 남자 주인공이 되었다.
처음에 숭타이쟈도 룽중얼쟈가 이 배역을 맡을 줄을 생각하지 못했다.
룽중얼쟈도 일부 티베트인 배우를 추천하였지만 모두 감독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다. 감독의 상상 속에서 현재 남편은 인성의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 평범한 이물이었다. 룽중얼쟈와의 접촉이 많아지게 되면서 감독은 의식적으로 그의 기질을 기초로 인물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티베트 지역에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운 사람이 적었기에 평민 배우를 선택할 때, 감독의 직감이 매우 중요했다. 영화 속 의붓아들의 배역도 역시 주인공 중 한 명인데 숭타이쟈는 고향의 초등학교 수천 명 학생 가운데서 찾아 다니며 골랐다. 처음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으나, 후에 그는 한 교실의 구석에서 사이최쟈(赛却加)의 냉엄한 눈빛을 발견하고 “아주 적합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직감이었고 인연이었다”.
후에 사이최쟈는 아들 역을 맡았는데 자연스럽고 알맞은 연기는 룽중얼쟈와 여주인공에게 큰 압력을 주었다.
가장 많이 반복한 장면은 17번이나 재촬영했다. 영화에서 의사역을 맡은 사람은 룽중얼쟈의 사촌형인데 감독은 임시로 안경을 찾아 그에게 걸게 하고, 룽중얼쟈와 상대역을 할 때, 눈길을 안경 위로 보라고 했다. 그런데 너무 익숙한 관계여서 룽중얼쟈는 매번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그를 잠시 쉬게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겨우 촬영을 마무리했다.
목적지를 찾아가는 야외 영화이고, 또 배우들 정서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영화는 철저히 시간 순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스촨성 아바(四川阿坝)에서 칭하이성(青海省), 시짱(西藏)으로 가는 길에 해발이 점점 높아가면서 제작진의 일부 스태프에게 고산병이 생겼다. 영화 내용에 계절 변화가 있는데 제작진은 한 달 동안 해산하였다가 낙엽이 지고, 겨울눈이 내릴 때에 다시 모이기도 하였다.
영화의 원래 마지막 장면은 부자가 라싸에 도착하여 순례를 완성하는 것이지만, 영화관에서 본 마지막 장면은 부자가 라싸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다듬어 주고, 길한 날짜를 기다려 라싸에 들어 갈 준비를 하는 데서 끝난다.
숭타이쟈는 <중국신문주간>에 “성지순례 자체가 나의 이 영화에서 표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단지 성지순례 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의 복잡성을 표현하려는데 있지요. 그런데 마침 라싸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표현하였지요. 때문에 그곳에서 끝을 맺었는데 지금 보면 아주 좋은 결말이라고 느껴져요”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고 절제된 표현이 맞다
영화 촬영이 끝난 날 저녁 룽중얼쟈는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룽중얼쟈의 아들은 영화 속의 아들보다 두 달 어렸다. 촬영할 때 극중의 아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는 극중 아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생활할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 |
▲ <아라쟝서(阿拉姜色)> 감독 숭타이쟈(松太加). 사진/ 취재원 제공 |
그는 자신이 늘 출장을 다니고 어쩌다 집에 들려도 여러 친구와의 모임과 회식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늦게 집에 돌아왔을 때 아들은 이미 잠들었고, 이튿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들은 이미 학교로 가고 없었다.
룽중얼쟈는 숭타이쟈 감독에게 “호텔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종래에 느껴본 적 없는 외로운 느낌이 들었어요. 도대체 아들과 아버지의 동반 성장이 필요한지, 아니면 아버지인 내가 아들과 함께 늙어가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리고 도대체 아들이 불쌍한지, 아니면 나 자신이 불쌍한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가정문제, 부자의 감정에 대해 숭타이쟈는 독특한 경력이 있기에 시나리오는 감동적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해맑았지만 시종 죽음이라는 화제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녀, 그는 이전에 그림을 그릴 때에도 늘 죽음에 대해 얘기했다.
숭타이쟈의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죽음에 대한 장족(藏族)의 이해에 따르면 죽음은 애석한 일이지만 그때 그는 겨우 20여 세에 불과하고, 수행도 부족하다 보니 죽음 앞에서 여전히 약간 두려웠다.
그는 카메라를 메고 한 달 동안 사라졌는데 그동안 이곳 저곳 천장대(天葬台-티벳의 장례풍습)에 찾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때때로 그는 천장대 옆에서 밤을 새웠는데, 마치 생명의 기탁을 찾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 그저 가보고 싶었어요.”
어느 하루, 그는 많은 천장대가 있는 써다(色达)에 갔었는데 해가 저물어 갔다. 천장대를 따라 걷다가 맞은 편에서 한 할머니가 구석에 있는 돌 위에 앉아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려 할 때, 할머니가 웃으면서 티베트 언어로 말했다.
“사진을 그만 찍거라, 이 할미는 이젠 미워졌단다. 젊어서는 그래도 예쁘장했었는데, 지금은 늙어서 이 모양이 되었다. 이제 곧 저기 저 곳으로 가게 된다. 보거라.”
할머니는 위에 있는 천장대를 가리키며 또 한마디 했다.
“나는 이제 곧 떠나게 된단다. 젊은이!”
숭타이쟈는 눈물이 쏟아졌다. 훗날 그는 이곳의 정경을 자기의 첫 번째 영화 작품 <태양은 언제나 왼쪽에>에 활용했다. 그 영화는 한 젊은이가 뜻밖의 차 사고로 자기 어머니를 치어 죽인 후 라싸로 가서 순례를 하였지만 여전히 자책감을 버리지 못하다가 어느 하루 천장대에서 한 할머니를 만난 후에야 지난날을 내려놓게 되는 과정을 서술했다.
아버지는 일찍이 그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제작진 스태프에게도 들려 주었다. 부처가 생전에 경전을 강의하고 있을 때, 한 여인은 아이가 죽는 바람에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부처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반드시 방도를 강구하여 자기의 아들을 살려 달라고 요구했는데 부처는 별 문제 없다고 대답했다.
부처는 여인을 보고 한가지 풀을 찾아오라고 했는데 이 풀은 반드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안에서 자라난 풀이어야 된다고 말했다. 이 여인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찾기 시작했는데, 찾아 다니는 과정에서 이런 풀이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생명은 모두 평등하다고 믿고 있다. 어릴 적에 숭타이쟈는 개구리 한 마리를 모자에 담고 집에 돌아 왔다가 어머니한테 매 맞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제가 동물을 학대하고, 죽여버리는 줄로 알았지요. 나중에 어머니는 나와 함께 가서 그 개구리를 방생했지요.”
또 한번은 몇몇 아이들과 누가 개미집을 더 멀리 차기 겨루기를 했는데 역시 어머니한테 혼쭐이 났다. “만약 우리 집이 뒤집히면 너는 어떤 느낌이 드니? 식물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컨대 풀도 제멋대로 뽑지 못했어요. 어머니께서 보시면 저의 머리채를 잡고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거든요”.
영화 <태양은 언제나 왼쪽에>를 찍을 때, 그는 자기가 설정한 확고한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한 장면에 한 개 화면이었는데, 화면 형식감이 매우 강했다. 이는 아마 그가 이전에 종사했던 미술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아라쟝서>에서는, 촬영감독의 개성을 더 많은 발휘하도록 자유롭게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관념이 성숙해 지면서 그는 형식적인 문장은 유치한 일이라고 말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새로운 것이라고 여기지 않지요. 마치 내부적 감정이 부족하여 외부화를 통해 표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자연스럽고, 절제적인 표현이 맞다 봅니다.”
생명을 대하든 죽음을 마주하든 모두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그는 티베트족의 ‘중관(中观)’ 개념을 인용했다. 기울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고 바로 중간에, 정서에 통제되지도 않고, 하나의 원심 사유를 유지하되 원심에 완전히 삼켜지지도 않고, 도랑에 끌려가지도 말아야 한다.
“가는 곳마다 도랑이 있는데, 어렴풋하게 느낀 것도 같고 또 느끼지 못한 것과 같은 감각이지요. 바로 반쯤 취하고 반쯤 깨어있는 그런 상태인데 동시에 또 감성적인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제가 <아라쟝서>를 창작할 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인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라쟝서>를 보고 일부 관객들은 무엇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이처럼 속마음을 치유하는 문화 분위기에서 생활하는데 우리가 당신의 영화에서 본 것은 모든 사람의 어려움인가 물었다.
이 물음에 숭타이쟈는 “어느 민족이든 물론 그들은 먼저 진실한 감정을 소유한 인간이고, 다음에 문화의 영향이다. 인간은 민족문화를 정형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찍은 티베트 영화에서 낯선 고향을 보았는데, 이 영화들은 사원, 절, 성지순례, 설산, 푸른 하늘, 호수, 초원, 소와 양을 지나치게 신비화, 상징화 했다. 심지어 영화에서 분명 생활 복장을 입어야 하는데 오히려 춤을 출 때 입는 옷을 입었다.
그는 “마치 무대 복장으로 티베트족의 생활을 찍은 느낌이 드는데, 고기를 썰 때에는 큰 칼로 큼직큼직 썰고, 술을 마실 때에는 큰 사발로 마시는데, 바로 티베트의 호방함과 호탕함을 표현하기 위함이겠지만. 그들은 이 땅의 인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는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감정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그 어느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숭타이쟈는 라싸의 많은 현대 예술인들과 교류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돌며 해외 순회공연을 했지만 대부분은 그들을 위해 따로 안배한 플랫폼이었다.
숭타이쟈는 <중국신문주간>에 “이것은 마치 권투 선수가 국제시합에 참가했는데 주최측에서 따로 권투 무대를 만들어 준 것과 같지요. 현시대의 예술인으로서 이른바 티베트가 국제 토너먼트에 참가했는데 그곳에 따로 하나 설치한다면 나는 이런 활동에 영원히 참가하고 싶지 않지요. 이 플랫폼에서 아예 권투선수 취급을 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은 권투선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지요”라고 말했다.
숭타이쟈는 칭하이(青海)성 퉁더현(同德县)에서 태어났다. 촬영사 시절부터 영화감독 완마차이단(万玛才旦)과 합작하였는데, <고요한 마니스(静静的嘛呢石)>, <쯔메이겅덩을 찾아(寻找智美更登)>로 시작하여 이 두 사람의 영화는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이는 티베트족 젊은이들의 영화 산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재작년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는 현에서 이미 백 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영화 텔레비전 전업에 응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작년부터 그는 티베트족 소재를 위한 ‘츙죠우상(穷角奖)’ 극본 창작대회를 설립하고, 완마차이단, 더번쟈(德本加), 룽런칭(龙仁青) 등 티베트족 유명인사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다. 금년에 열린 극본 대회에서 백여 개에 달하는 티베트족 소재의 극본들이 등록했다. 여기에서 선출된 극본들은 이미 촬영 준비 단계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학습하는데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그는 학생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학습하게 하였고, 또 일본으로부터 애니메이션 인재를 퉁더현의 창작 기지로 초청했다.
숭타이쟈는 늘 친구들과 <아라쟝서>는 왜 굳이 현지 방언으로 연기했는가에 대해 토론하는데 그것은 비록 겨우 수십만 인구가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바로 현지인들의 표현 풍속을 존중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숭타이쟈는 <중국신문주간>에 “제1대 티베트족 영화인으로서 저와 완마차이단은 젊은이들을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자기 민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연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삶의 풍경도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
[중국신문주간 기자/ 리싱(李行)]
[저작권자ⓒ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헤드라인HEAD LINE
포토뉴스PHOTO NEWS
많이본 기사
- 경제
- 사회
-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