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정쥔(郑钧) I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했던 그가 지금은 온화하고 참을성 있어졌다. <중국신문주간(中国新闻周刊)>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리틀애플(小苹果)>도 정말 좋고 <슈퍼걸(超女)>도 나쁘지 않다”고 밝혔다.
진상욱 기자 amote521@gmail.com | 2015-12-07 15: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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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왕쓰징(王思婧)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올해 8월 정쥔(郑钧)이 자신의 아내 류윈(出现)이 하는 종합예능프로그램 <여신의 새 단장(女神新装)>에 출연했다. 류윈은 정쥔을 집에서 불러내 의상디자이너 두 명을 소개시켜 주었다. 정쥔은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 “옷 한 벌 고르느라 10분 만 생각 하면 정말이지 뇌세포가 다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쥔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체 집을 나섰고 류윈은 그의 기타를 챙겼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눈을 비비기도 하며 미소로 한참을 아내가 소개해 준 두 명의 의상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가 꺼낸 한마디는 ‘대단하다’ 였다.


형식적으로 맞장구를 친 후 정쥔은 난처한 듯 크게 웃으며 “계속 옷 이야기만 하시니 우리는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네요.”라고 말하고는 말없이 기타를 들고 가버렸다.


“아내가 창의적인 가수 하나를 망쳤다고 말들이 많죠.” 정쥔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사람인데 가족들이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일은 다음이죠. 항상 그랬어요. 노래가 일이 되어서는 안 되요. 느낌에서 우러나야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중국의 대표적인 록 가수인 정줜은 용감하고 진실된 노래를 부르며 직설적이고 거만하게 행동했다. 모든 것이 하찮다는 듯 항상 고개를 치켜든 독특한 자세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납고 고집스러운 그는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남을 위해 참지 마.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기쁨 뒤엔 아픔이 따르지만 결과는 상관 없어.” 그의 첫 번째 노래 <알몸(赤裸裸)>의 가사이다.


그는 “내 사랑 알몸. 주체할 수 없는 열광” 이란 노랫말로 가는 곳마다 소녀 팬들의 함성을 샀다.


그는 라사(拉萨)에 가보지 않고도 걱정근심 없는 삶을 위한 노래를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30분만에 를 완성했다. 은은한 멜로디와 그의 몽롱하면서도 높고 낭랑한 목소리가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준다. 그러나 그때는 정쥔이 가장 ‘세속적인’ 시기였다.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노래로 쓴 거죠.”


그 후 죽마고우인 ‘신데렐라’와 결혼했다 이혼하고 그의 생활과 건강은 엉망이 되었다. 2009년 라마불교를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애니메이션영화를 만들고 ‘인터넷+’사업에 전념하는 등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14살 어린 아내를 맞아 아이를 낳으면서 처음 아빠가 되었을 때보다 준비성과 책임감도 강해졌다.


2000년대 들어 정쥔과 록 가수들의 노래가 줄어들자 사람들도 한때 자신이 그토록 감명하던 그 시절의 가수들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정쥔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록 가수들이 요절하거나 은둔하거나 종적을 감춘반면 정쥔은 점점 ‘정상인’이 되어가고 있다.


2015년 정쥔은 육아프로그램에 출연해 사랑과 인내심이 많은 아빠의 이미지를 남겼고 그 후에는 음악관련 APP 사업을 하겠다고 밝혔다. 가수이면서도 음악으로 뉴스에 나오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언제나 기대에 못 미친 행복”


정쥔의 마지막 반항기는 2005년이었다. 인터넷채팅에서 “홍콩, 타이완음악은 모두 쓰레기”라 말하는가 하면 당시 최대의 관심사였던 ‘슈퍼디바(超级女声)’에 대해서는 “세상이 미친 건지, 내가 미친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등 반기를 들었다.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변한 것”이라 말하는 등 말 많던 음악계 선배의 갑작스런 발언으로 발전의 기미를 보이던 오디션 가요계가 발칵 뒤집혔다.


2007년 9월에 발표한 앨범 <창안창안(长安长安)>의 가장 유명한 곡 <사랑의 도피(私奔)>는 한한(韩寒)의 싱글 곡과 이름이 같다. 같은 해 한때 ‘슈퍼 디바’를 맹렬히 비난했던 정쥔이 같은 종류의 프로그램 '콰이러난성(快乐男声)‘의 심사위원으로 출현하자 한한은 “몸을 팔아 정절문을 세운다”며 풍자했고, 정쥔은 “자기가 운전을 할 줄 아는 루쉰(鲁迅)인줄 안다”라며 한한을 비웃었다.


그 후로 정쥔은 앨범을 내지 않았다.


4년후 두 사람은 자오쯔치(赵子琪)의 결혼식에서 만나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한 잔 술로 앙금을 풀었다. “지금은 친구죠. 한한노래 굉장히 좋아해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정쥔이 말했다. 반항적이던 두 소년이 중년은 아저씨로 변했거나 변하고 있고, 그들을 우상으로 삼던 세대 역시 젊은 시절의 분노와 반항과 이별했다.


최근 허용(何勇)은 우울증에 걸려 세일러복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홍콩 홍따이(红袋)체육관에서 ‘아가씨는 예뻐(姑娘漂亮)’를 부르던 예전의 꽃 미남이 아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아이가 있는 중년의 가장이 되었다.


장추(张楚)는 1997년 발표한 앨범 <비행기공장(造飞机的工厂)>이 실패한 후 8년동안 막노동을 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천문학과 양자역학연구에만 전념하다 음악프로그램에 출현했지만 빈번이 말을 잊었다.


더우웨이(窦唯)는 군중에 묻혔고, 매체는 초라해진 그의 모습을 끊임 없이 방송하고 있다. 지하철을 탄 그를 보고 사람들이 ‘살이 쪘다’, ‘지저분하다’고 말하자 그는 “사람 좋고 나쁜 것은 자신과 신 만이 안다(清浊自甚,神灵明鉴)”는 한마디로 대답한 후 소식이 없다.


현실은 이상주의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시키고 온갖 해석과 절규로 그들을 지치게 한다.


정쥔의 친구 왕펑(汪峰) 만이 가수활동을 계속하며 매체와 끊임없이 부딪히고 있다. 올해 6월 그의 작업실에서 <왕펑이 없었다면 (중국)대륙음악계는 반 토막이 난다(如果没有汪峰,大陆乐坛尽失半壁江山)>는 글을 발표하자 혹자는 그와 정쥔의 노래제목 9개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왕펑의 반쪽이 정쥔이라 조롱했다. 그를 이해하는 이는 정쥔 뿐이었고, 매체의 끊임 없는 질문공세에 그는 “다들 어렵죠.”라며 대응했다.


20년전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정쥔은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당시 매체에서 정쥔의 이미지는 ’까칠남’으로 대답하기 싫은 문제나 협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기 일쑤였다. “적을 많이 두고 서로 감정적으로 공격했죠. 직원들, 매체 누구와도 잘 지내지 못했어요.”


그때 그는 삶에 대한 고민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꼬여있던 부분은 제 자신에 대한 분노였어요. 만족이란 걸 몰랐으니까요.”


정쥔은 7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큰 형이 아버지의 역할을 했는데, 형 정펑(郑鹏)이 매우 엄한 해 18살까지 맞으며 자랐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될 정도로 맞아 8살에 자살까지 생각했다. “형이 저를 때린 것은 사회에 대한 원망 때문이어요. 삶이 저에게 불공평하듯이 저 역시 삶에 대해 불공평해야 한다고 생각 했으니끼요.”


1992년 정쥔은 미국유학을 가기 위해 대학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주일을 허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형에게 <알몸>과 를 연주하며 들려주었다. 형의 지원으로 정쥔은 유학을 포기하고 800위안을 들고 블랙 레오파드(Black Leopard)의 매니저 ‘넷째 형’ 궈촨린(郭传林)를 찾아 혼자 베이징으로 건너가 가수가 되었다.


그 시기에 그는 길에서 잠을 자고 친구 집에 얹혀살며 하루 종일 라면과 전병과자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밥을 얻어먹거나 돈을 빌리기 위해 두 시간 넘게 매니저를 찾아가기도 했다.


2년 후 홍성음악사(红星音乐社)가 정쥔의 첫 번째 앨범 <알몸>을 발매했다. 같은 해에 ‘락 레코드(Rock Records) 3인방’이 더우웨이의 <검은 꿈(黑梦)>, 허용의 <쓰레기장(垃圾场)>, 장추의 <고독한 사람은 염치가 없다(孤独的人是可耻的)>를 발표하고 홍콩 홍칸(红勘)에서 콘서트까지 열었다. 이 네 장의 앨범으로 1994년 중국 록 음악계의 황금기가 찾아왔으며, 네 가수의 앨범 네 장 역시 권위 있는 명작으로서 다시 나오기 힘든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다.


정쥔은 27세에 유명세를 탔다. 당시 록 가수를 추앙하는 것은 지금의 ‘인터넷+’사업 투자자를 찾는 것처럼 신속하고 열광적이었다.


그의 여성 팬이 무대 뒤로 뛰어들어와 치마를 걷어 젖히고는 허벅지에 사인을 해달라 했다. 그렇게 10년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계속했다. “어린 나이에 꿈을 이루고 이름이 좀 알려지니까 여자들과 노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고 자유로운 거에요. 재미도 있었지만 자유를 느꼈어요. 어릴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무 것도 못하다가 유명해지면 뭐든 할 수 있는 것 같고 간섭할 사람도 없지만 결국은 욕망과 괴로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정쥔은 스타가 된 후에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사는 게 이런 건가?’, ‘이렇게 밖에 못 사나?’ 항상 기대에 못 미치는 행복 때문에 그는 분노로 가득했다. “그때는 이것저것 살 것을 기대하고 올 해는 얼마나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나만의 물질적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10년 후에도 그런 모습인 거에요.”


그러나 그 시기 정쥔의 음악은 시원스럽고 자유로웠다. “흥이 주체가 안되고 절망도 말 할 수 없으니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 한 거에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했다. “가장 큰 비극은 어릴 때부터 즐거움과 자유로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거에요. 학교교육은 지식만 가르칠 뿐 지혜를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가 쓴 노래가사처럼 ‘전부터 나에게 억압 만을 가르치더니 이제와 나 자신을 풀어주라니, 알겠다고 해야 할지 싫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은 헛소리로만 들려’


매일 친구와 술집에서 술 마시고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놀던 시절도 있다. 그러나 정쥔에게 이런 자유는 ‘자폭’상태였다. “매일 술 마시고 대충대충, 록 가수는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어요.” 결혼해 아이를 낳고도 그의 생활은 바뀌지 않았다. “정말 꼬인 사람이었어요. 부모님 세대가 자식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고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만 즐겁게 살면 되지, 절대 자식을 위해 평생을 바지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직접 술집도 열어 당시 아내 순펑(孙锋)이 맡아 보았으나 그의 생활은 더욱 문란해졌다. 항상 새벽부터 친구와 술 마시고 여자들을 끼고 놀았다. 순펑은 이 모든 일을 눈 앞에서 본 후 이혼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대학동기였다. “이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혼하자는 얘기를 들으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 후 그는 맨몸으로 집을 나와 수중에 생활비 한 푼 없다는 것을 알고 생에 처음으로 예금을 인출하려 했으나 비밀번호를 잘못 눌러 카드까지 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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