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흔적 없는 삶> , 원시적이고 초라한 환경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성장과 탈바꿈, ‘모체’에서 벗어나면서 생겨나는 심리적인 균열에서 점점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김지영 bnu0827@gmail.com | 2018-10-05 14: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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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글/ 양스양(杨时旸)] ‘흔적 없는 삶’은 형언하기 어려운 영화로, 그다지 이야기 전개가 분명한 편이 아니며 분위기와 상징 위주로 구성된 하나의 짧은 우화 같은 이야기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한 쌍의 부녀가 줄곧 삼림공원에서 생활하면서 야외 취사를 하고 텐트를 치고 살며 원시적이고 초라한 환경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즐거운 생활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살길을 찾아 헤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 숲은 국가 부지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생활하는 것은 관련 법률에 위배되는 것인데 그들은 사소한 잘못으로 발견되어 사회복지국 경찰이 부녀를 끌고 가면서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흔적 없는 삶’에서 함축하여 다루는 의제는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제대노병의 정착과 심리 건강문제가 있을 수 있다. 또 미성년자의 가정교육, 학교교육과 동료교육 등 문제 및 아웃사이더 집단의 구조와 개인의 자아 추방에 대한 권리 등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의 변화를 탐구하는 데 더 큰 의의를 두었다. 

 

변화는 부녀가 다시 안치된 후 이들이 새롭게 전기, 가스, 상수도, 직업, 보수 등 ‘현대문명’의 세속적인 순환시스템과 거래방식에 진입하면서부터 생겨났다. 딸은 빠르게 적응하고 심지어는 이런 생활을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아버지는 시종 이를 싫어하면서 원시 삼림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윈터스 본’의 감독인 데브라 그래닉은 자신의 새 영화에서 물방울이 종이에 물들어가는 듯한 느슨한 해석 방식으로 부녀간의 가치관과 세계관 차원의 결별을 보여 주는데 외부에서는 여전히 어떤 감정공동체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적으론 부서진 목소리가 선명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성장과 탈바꿈, ‘모체’에서 벗어나면서 생겨나는 심리적인 균열, 그리고 점점 성숙해가는 과정을 다룬 영화이다. 이 작품은 작은 구조의 이야기로 웅대하고 보편적인 의미의 함축을 보여주며 개인적인 성장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정을 보여준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처음에 숲 속에서 옆 사람이 땅에 떨어뜨린 목걸이를 보고 본능적으로 좋아했던 사춘기 소녀 딸의 아름다움과 문명에 대한 본능적인 동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녀를 잡아당긴다. 이 장면은 전체 이야기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장면이다. 소리 없이 펼쳐진 세부 내용이 이 영화를 성공시켰는데, 이 장면들은 아무런 소리 없이 펼쳐지지만 정확히 어떤 정신적인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삼림을 가장 사랑하지만 다시 정착한 후 작은 소나무를 베고 포장을 한 뒤 도시로 운반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일을 해야만 했다. 야생 삼림은 도시 중산층들의 집으로 옮겨져 장식용 수단으로 허망하게 전락한다. 이는 아버지에게는 거의 징벌에 가깝고 또 자신의 그 동안의 삶과 신앙에 대한 부정이다. 이 이야기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이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러한 힘을 내는 것은 사실 ‘부정’이다. 남자는 도시 생활과 현대 문명을 부정하지만 현대 문명과 법률 시스템은 그의 선택을 부정한다. 서로 밀고 당기며 맞서는 가운데 이름 모를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세속세계와의 관계 이외에도 딸과도 일체에서 분열되어 서로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정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이다. ‘흔적 없는 삶’은 모든 사람이 다 외딴섬과도 같으며 이들을 대륙으로 묶으려 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그 실패 이후에는 회색과 퇴락이 없다. 다만 어떤 이는 계속 재기하고 어떤 이는 안일하게 고독을 누릴 뿐이다.

  

구조상으로는 끊임없는 순환을 다룬 이야기이다. 탈출부터 시작해서 진입, 재 탈출, 재 진입의 순환이며 이 가운데 수동적인 것도 있고 적극적인 것도 있다. 또 자아 해체, 체제와 문화적 관성 구조를 악착같이 파헤치고 융합하려고 하는 부분은 없다. 어떤 이야기는 이런 상호 단절을 두고 혹시라도 대치의 길로 나아가도록 썼을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과 용서를 이어가는 일말의 애수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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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그 새로운 거처에서 새 친구를 알게 되고, 양봉을 하는 노인은 딸에게 벌집을 경험하게 하며 노인은 손바닥에 떨어진 꿀들을 보면서 “벌들이 너를 믿는 모습을 보니 기쁘다”고 말한다. 노인은 손바닥 가득 떨어진 꿀벌을 보며 말했다.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는 친근감을 표시하고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사교하며 친밀감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딸은 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석양 아래에서의 모임에서 사람들은 기타를 치며 민요를 흥얼거리거나 허그 한 번에 맥주 한 병씩 마신다. 사람들은 욕심 없이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서로 돕고 바람과 비를 가리는 벽과 지붕이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아무런 미련 없이 혼자 황야로 돌아온다.

  

이야기는 앞뒤가 절묘한 호응을 이룬다. 처음에는 부녀끼리 ‘훈련’을 하며 이들을 찾는 경찰을 피하고 손발을 맞췄다. 딸은 끝까지 아버지의 뒤를 따를 줄 알았지만 결국 헤어질 때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붙잡을 수 없지만 그들은 그래도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갔다. 이것이 최고의 마무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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