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탕카의 가격을 매긴 사람 I
- 라사(拉萨)의 탕카화가 볜바(边巴)는 올해 53세로 티베트(西藏)자치구와 거의 같은 나이다. 그는 자신이 티베트 최초로 탕카의 가격을 매긴 사람이며, 이 때문에 탕카계에서 가장 부유한 화가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의 성공은 라사 전반의 상업화 발전의 결과이자 최근 이 도시와 사람들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 진상욱 기자 amote521@gmail.com | 2015-11-06 11:12:20
기자/류단칭(刘丹青, 라사)
53세가 되면서 볜바는 한결 평화롭고 겸손해졌다. 젊은 시절의 그는 반항적이고 손재주가 좋으며 머리가 잘 돌아가 티베트 최초로 탕카에 가격을 매겨 외국인에게 판매한 사람이다.
외화교환권(汇券)을 세고 호출기를 걸고 3천 위안이 넘는 오토바이를 모는-어수선하면서도 곳곳이 이상이었던 1980년대에 그는 석공의 아들에서 일약 티베트인 최초의 큰 부자가 되었다.
볜바의 스승은 2급 궁정화가로 조예가 깊으나 전통적인 사람으로 제자가 탕카를 팔아 돈을 버는것을 보고 “솜씨를 낭비하고 돈 만을 생각하는구나.” “네가 내 명예까지 망쳐버렸어.”라며 크게 화를 냈다.
이러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볜바는 예전처럼 탕가 팔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당시 볜바는 20대의 젊은이로 인생을 막 시작하고 있었고, 티베트의 변동의 시기에 앞만 보고 달리며 가장 좋은 모든 것을 얻고 싶었다.
1962년에 태어나 문화대혁명 시기를 겪으며 성장하며 많은 비판과 투쟁을 겪은 스승 밑에서 기예를 배워 꼬박 10년 동안 포탈라궁 벽면을 복원했다. 볜바는 급성장하는 티베트의 변혁기를 겪고 53년 동안 변혁의 시대에 휩쓸리며 좌충우돌한 끝에,돈, 지위, 명예 등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렇게 즐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 백 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시대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고, 또 가져갔다는 것을 발견했다.
60~70년대, “티베트는 아름다웠고 티베트 사람들은 생각이 많지 않고 욕심도 없었다.”
내가 4살 때 어머니가 6존불상을 궤짝에 숨겨둔 후부터 조마조마한 10년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가세가 피어 먼 곳 목축지에서 라사로 시집을 왔다. 문화대혁명 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불상을 부숴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이후 불상은 판쳰라마(班禅)에게 팔렸다.
어릴 때라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당시 일반인들은 포탈라궁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10여년 후에야 처음 들어갔는데, 들어가기 전에 문 밖에 꿇어앉아 절을 몇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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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18일 탕카화가 볜바(边巴,우측)이 학생 다와투덩(达瓦土登)을 지도하고 있다. 촬영/리린 |
나는 라사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릴 때 아버지는 돌을 캐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웠다. 누나 네 명, 형 두 명,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식량배급표를 참파(糌粑)로 바꾸어 먹었는데, 매달 28일이면 식량이 끊겨 우리 남매들은 항상 배불리 먹지 못했다.
당시 라사는 물이 많고 습지가 넓었다. 가운데로 작은 강이 흐르고 양 옆으로 자라는 낮은 풀밭에는 샘구멍이 있었는데, 강물은 찼지만 샘물은 따뜻하고 달아 겨울마다 물 위로 안개가 덮였다.
물의 깊이는 야크(yak)가 안다—앞 다리를 뻗어 두드려보고는 지나갔다. 습지에는 향초를 심었는데, 毛毛的 한 척 길이의 티베트어로 ‘야크다리(牦牛腿)’는 반찬으로 해 먹으면 아주 맛있다. 하늘에는 매가 날고 있어 그릇에 고기를 담아 두고 뚜껑을 덮거나 가려두지 않으면 매가 내려와 물어가곤 했다.
지금은 이 일대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습지도, 샘 구멍도, 향초, 매도 없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배우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티베트어, 중국어(보통어), 수학을 배웠다. 집안예절이 많아 장족의 음력 설이 되면 한 달 동안 집 청소를 하며 지저분한 물건을 씻어버리고 벽을 하얗게 칠했다. 해가 지기 전에 숯, 뚝배기 부스러기, 경서 등등을 조그맣게 싸서 수제비에 넣는다(중국 내륙에서 물만두를 먹을 때 동전을 싸 행운을 비는 것과 같은 풍습). 저녁식사를 하고 해도 지면 사거리에서 풀더미에 불을 붙여 귀신을 쫓고 쌀보리와 참파를 궤짝 위에 둔다. 불당도 같은 방식으로 한다.
티베트 음력 설 첫날에는 새벽 4~5시면 일어나 집집마다 세배를 하고 술을 권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은혜와 원한을 모두 푼다. 7~8시가 되면 부모님께 술과 음식을 올린다. 이때가 되면 라사가 아름다워진다. 옛날 집은 1m의 담이 있는데 돈이 있는 집에서는 조각가를 불러 집에 조각을 하기도 한다. 이때의 티베트 사람들은 생각이 많지 않고 욕심도 없었다.
우리 집은 형편이 좋지 않아 매우 어렵게 보냈다. 매달 식구 수대로 식량 배급표가 나오는데, 아이들은 할당량은 적은데 성인보다 더 많이 먹으니 배가 너무나 고프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나 양의 지방을 솥에 넣고 끓이다 향초를 넣어 끼니를 때웠다.
티베트인들은 눈 표범을 좋아하는데 그때 주변의 눈 표범들이 이미 다 죽어버렸다.
어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 후 사람들이 곳곳에서 아무 이유 없이 매우 높은 모자를 쓰고 자신이 뭐라고(소의 머리에 뱀의 몸을 가진 요괴)이라고 말하던 기억만 난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 후 명절이 사라져 불상은 상자 안에 숨기고 집 안의 풀과 꽃들도 기를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비판과 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예가이고 어머니는 집안을 돌보았는데, 어머니는 불상을 숨긴 후 계속 걱정을 했다. 그 때의 6존불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최소 2~3천만위안은 나갔을 것이다. 많은 집들이 불상을 묻기 시작했고 라마교 부주교에게 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려워서 물건을 헌납한 사람들도 500~600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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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
그 시절 라사에는 한족이 많지 않았다. 이들은 가끔 만나는 임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군인이었다. 군대에서는 영화를 틀었는데 티베트인은 들어가지 못하게 해 호기심 있는 주민들은 곳곳에 마구자비로 구멍을 뚫었다.
당시 전국의 문화가 파괴되고 있었는데 나는 놀 줄만 알았지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어디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나는 14살 되던 해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협동사의 말단관리인 아버지 친구 하나가 내 그림을 보더니 “우리 집에 가서 저장함 몇 개 좀 그려다오.”라 하셨다.
흥분되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14살 아이에게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친구분의 집은 매우 점잖은 집안이었다. 한달 일하고 십 몇 위안을 벌었다. 스승이 없을 때였다.
70`80년대 “포탈라궁에서 10년간 벽화를 그렸다.”
17살이던 어느 날 어머니가 사람을 찾아 날을 받더니 나를 스승님에게 데리고 갔다.
그 때부터 정식으로 탕카를 배우기 시장했다.
5~600의 엄마들이 청과주(青稞酒)며 화채며 손수 만든 간식이며 하다(哈达-비단스커프)를 싸들고 스승을 찾아갔다. 내가 스승님과 선배에게 하다를 바치고 스승에게 두 손으로 차를 올리자 스승은 내 종이 중간에 곧은 세로선 하나를 그려주었다.
그때는 스승에게 학비를 낼 필요도 없고 선생도 학생을 고를 수 없던 시절이다. 티베트인들의 습관이었다. 탕카는 견습생제로 과정을 마치면 배움에 대한 보답으로 스승 밑에서 2~3년을 무보수로 일한다. 그러나 나의 스승은 이런 요구도 없이 다 배웠으면 독립해서 나가도 된다고 하셨다.
1979년 정부가 전문적으로 고대 건물을 복원할 ‘고건축물팀(古建队)’을 구성했다. 스승님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타도되어 2급 궁정화가에서 석공으로 몰락했다. 지난 20년 동안 탕카는 거의 대가 끊기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티베트 전역에 몇 백 명밖에 남지 않았다. ‘고건축물팀’은 학생 7~8명과 교사 십여 명으로 더욱 적었다.
팀에는 타도된 공예가—비계공도 두 명 있었다. 그때는 발판 없이 원목과 철사로 골조를 지었는데 높은 것은 몇 십 미터까지 올려 잘못하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작업이었다.
과거 티베트에서는 탕카는 불상과 마찬가지로 신성시되어 살 수도 요구할 수도 없고 침실이나 부엌에 걸어두지도 못하고 집안 가장 높은 곳에 두어야 하는 ‘신앙’이었다.
탕카화가는 체계적으로 8~9년을 배워야 활동할 수 있었다. 불상은 석가모니, 금강 등 다양한 모양의 여러 종류가 있지만, 탕카화가는 철저히 재량에 따라 작업을 진행한다. 순서대로 얼굴 그리는 법을 배우고 옷을 입힌다, 이런 식으로 괜찮은 탕카 하나를 그리는 데 1~2년이 걸린다.
탕카공예는 세밀하다. 가장 세밀한 부분은 붓이다. 다섯 개의 털만을 사용하는데 아무 털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살쾡이 등에서 뽑은 단단하면서도 응집된 털을 사용한다. 촘촘한 곳은 털 사이 간격이 1mm도 되지 않아 육안으로는 볼 수 없어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림을 오래 그리다 보면 손에 리듬감이 생기는데, 손이 떨려 틀리면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그릴 때는 숨을 참아야 한다.
붓도 중요하다. 벽화를 그리고 몇 달이 지나도 빠지지 않는 염소 뺨 털이 제일 좋다.
탕카를 배우기 전 종이와 붓을 만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나무 판에 숯을 칠하고 유지방을 골고루 바른 후 향의 재로 덮어 대나무꼬챙이로 그려나간다. 흰 색을 긁어내면 검은 바탕이 드러난다. 이렇게 몇 년 동안 밑바탕을 만든다.
밑바탕이 완성되면 색을 입힌다. 빨강색은 홍산호, 초록색은 터키석, 금색은 금가루를 이용한다—과거 실재의 진짜 재료들을 쓴 티베트 탕카는 매우 비싸서 돈 있는 사람만 들일 수 있지 돈 없는 사람은 탕카를 들이려면 이곳 저곳 빚을 내야 했다.
스승님과 함께 처음 포탈라궁에 들어갔을 때 매우 감동적이었다. 17살이던 나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고도 들어가서 또 조아렸다—라마교 승려들이 사는 곳으로 일반인들은 들어가지 못해 아버지도 평생 들어가 보지 못했다.
당시 포탈라궁의 벽화는 망가졌지만 불상은 남아있었다. 금과 은 재료들은 약탈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궁 안은 몇 년을 수리하지 않아 물이 심하게 샜다. 드나드는 사람이라곤 인부들과 외국인들을 다 합쳐봐야 40~50명이 되지 않았다. 벽이 매우 높고 가장 큰 불상은 가운데 손가락만 2m에 골조 높이가 몇 십 미터라 올라가서 제대로 그려졌는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비율을 감각만으로 파악해야 한다. 벽화는 습도와 기후가 매우 중요하다. 잘못 그리면 빨리 벗겨지고 목탄이 무르기 때문에 다루기도 어렵다. 스승님은 조예가 높아 대나무를 네 조각으로 썰어 목탄을 끼워 사용하니 부러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그리는데 10년이 걸린다.
대소사(大昭寺), 포탈라궁, 드레펑사원(哲蚌寺) 벽화의 80% 이상은 나와 선후배들이 그린 것이다. 젊은 나이에 한 달에 200위안 이상을 벌었으니 장족(藏族) 청년 중에서는 임금이 높은 편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포탈라궁은 아래를 뚫어 방공호를 지었다. 1978년 이후 포탈라궁에서 외국인들이 전시관을 열었다. 가보니 장족의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내 그림을 가져와 팔아도 되느냐 물었다. 당시는 티베트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외국인이 나에게 해보라고 했다. 6시 반에 퇴근 해 8시부터 새벽 2~3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이틀 밤을 내리 작업해 호법신을 완성했다. 외국인들은 사납게 생긴 물건을 좋아한다.
다음날 퇴근을 하고 가니 외국인이 내 그림이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좋은 가격에 팔렸다며 손에 집히는 대로 200위안을 집어주었다. 그림 한 장이 한 달 월급을 호가한 것이다.
가난하고 고생스런 생활을 하던 나는 그 200위안을 받아 공양을 하고 남은 돈은 전부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는 놀라면서도 의심을 하며 “이렇게 많든 돈을 어디서 났니?” 라고 되물었다. “어제 저녁에 그림을 그려서 외국인에게 판 돈이에요.”라고 말씀 드렸더니 매우 기뻐하며 ‘외국인도 불교를 믿나?’라며 궁금해했다.
집안 형편이 금새 좋아졌다. 며칠 후에는 어머니께 600위안을 드렸다. 나중에는 마약을 하듯 중독이 되어 날이 새도록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머리 속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매우 흥분되었다.
그 몇 년 동안 눈이 상하도록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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