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쿼제(八廓街)의 영혼을 찾아서 III
- 바쿼제(八廓街)는 라싸(拉萨)의 영혼이다. 이 곳은 수십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의 다른모든 도시들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도시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경제와 주민생활이 빠르게 성장한 반면 이전의 평화로움은 사라졌다.
- 진상욱 기자 amote521@gmail.com | 2015-11-13 1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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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
기자/류단칭(라싸(拉萨))
전환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투덩커주는 그가 볼 때 지금의 바쿼제에는 오래된 가게가 거의 없어졌다고 밝혔다.
국가가 오래된 집들을 회수하고 건물임대료가 20m2 크기 가게의 월세가 2만위안부터로 비싸지면서 가게의 소유 바뀌어 더 이상 가족이 가계를 물려받는 방식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바쿼제 구 시가지의 보통가구의 주택임대료 역시 함께 올라 20m2주택 한 체의 월세가 2만위안을 넘어섰다. 상업지구의 발전과 토지가격의 상승으로 이 일대에 모이는 사람들도 완전히 달라졌다.
투덩커주는 바쿼제는 자치구가 설립된 이후부터 구조전환이 이어지고 있으며 티베트사회 전체의 구조전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공부를 해서 공무원시험을 보고 일을 하며, 많은 젊은이들이 오래된 노점을 이어받기를 원하지 않고 각자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집안의 수공기술이 끊겼다. 가게주인은 다음 한 집에만 转租 할 수 있는데, 1970~80년대에 유명하던 티베트식당은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고 전 주인 역시 다른 사업으로 전환했다.
샤마오가부(夏帽嘎布)는 바쿼제에서 100년의 역사를 가지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일한 가게이다. 이런 고주택들은 바쿼제에 얼마 남지 않다. 벽의 두께가 1m에 완전한 티베트스타일로 실내에 기둥이 있고 크지 않은 가게에는 네팔의 공예품인 황금불상이 가득 놓여있다.
티베트어로 ‘샤마오가부’는 ‘흰색 모자’라는 뜻이다. 75년전 가게주인 러터나·구마·투라다하(热特那·古玛·吐拉达哈)의 할아버지가 흰색 모자를 쓴 네팔 청년이던 시절 혼자 말을 타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네팔에서 티베트로 건너왔다. 그의 방대한 산업은 인도와 네팔에 집중되어 있었고 바쿼제 가게는 작은 분점에 불과했다.
50세가 넘었으니 이제는 러터나·구마·투라다하가 가계를 운영해야 할 차례이다. 돈독한 성품의 자그마한 그는 상인의 영리함과 노련함을 가졌다. 네팔사람들은 바쿼제에서 ‘잘나가던’ 적이 있었다. “여기 동가, 그리고 저쪽 남가까지 전부 네팔사람 가게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부 없어졌다.” 러터나가 두 손을 때고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1930~40년대는 라싸 네팔상인들의 전성기였다. 당시 바쿼제 동가 대부분이 네팔가게였고 당시 외지에 알려진 베이징 상호도 네팔상호의 수를 따라올 수 없었다. 야둥(亚东), 장무(樟木), 아리(阿里)항구가 개방되면서 네팔인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점을 이용해 인도 칼림풍(Kalimpong)에서부터 상품을 가져와 팔았고 바쿼제에서 인도산 쥬얼리 액세서리, 값 싼 꽃무늬 천, 통조림을 팔기도 하고 스위스 손목시계, 독일 카메라, 프랑스 향수, 이탈리아 모직물 등도 팔았다. 한마디로 당시의 네팔 상인들은 라싸에서 승승장구하며 잘 나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1949년과 1959년을 전환점으로 점차 끝을 향해 간다. 1949년과 1959년 네팔의 액세서리 상인들을 철수시킨 것이다. 샤마오거부 같은 옛 가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30년 전 러터나는 20대 총각으로 라싸에 와 아왕(阿旺)의 고모와 결혼해 티베트에 정착했다. 오랜 세월 그는 네팔과 티베트를 드나들었고 가게는 아내의 조카 아왕이 함께 봤다.
2007년 아왕은 르카쩌(日喀则)를 떠나 라싸에서 고모부를 대신해 불상가게를 맡아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는 31세의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중국어(표준어)가 서툰 장족 청년으로 손님이 없으면 고개를 숙여 위쳇을 하고 주변에 친한 상도 전혀 없었다. 어려서부터 르카쩌에서 나고 자란 그는 라싸에서 일 하는 것부터가 ‘새로운 세계를 본 것’이었지만 8년을 일 했는데도 몸이 여전히 따라주지 않았다.
8년 동안 바쿼제의 오래된 노점들이 급격히 변하면서 샤마오거부의 찬란하던 시절은 가고 오래된 가계가 쇄락하고 어렵다는 느낌뿐이다.
‘130년 된 가계로 문물국의 보호까지 받은 영예’는 과거에 그치고 지금은 가게를 찾는 사람도 매우 적다. “장사가 점점 안되요. 버텨본다 해도 큰 의미가 없어요.” 그는 손을 비비며 “구경하며 물건을 사는 사람도 적지만 임대료가 매년 올라 20m2 조금 넘는 가게의 월세가 한 달에 2~3만위안이나 해요. 관광객은 늘었지만 소비는 매우 적고 불상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장족사람들도 서서히 바쿼제를 떠났어요.” 라고 말했다.
74세의 귀족노인 즈꿍츙창(直贡琼仓) 역시 마찬가지로 사라져가는 가문의 영광에 망연자실해 있다. 몇 년 전 그는 바쿼제에 살며 매일 불교협회까지 걸어 다니며 일을 했다. 바쿼제에 사는 다른 평민들의 가게와 달리 그는 대단한 가문과 어려운 경험이 있다. 그의 가문은 토번(吐蕃)왕조 송쩬감뽀(松赞干布)의 후손이었는데, 당시 랍가리(拉加里)가문의 권력범위는 매우 커 네 개 현을 관할하며 대물림하고 있었다. 큰 종교행사가 있으면 랍가리가문은 달라이라마 5세와 마주앉아 예의를 갖출 것도 없이 편한 사이일 정도로 존귀한 가문이었다.
즈꿍츙창은 가족 중 제일 어린 아이로 5살에 생불이 되었다. 그는 랍가리(拉加里)궁에서 호화로운귀족생활을 누렸다. 몸종을 몇 명이나 두고 존귀한 신분인 귀족출신으로 아랫사람들과 이야기도 할 수 없고 걸어갈 때도 거리를 두어야 했다. 평민아이들이 아래서 공을 차고 놀 때 그는 창 밖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역시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비범해 윗사람, 동료, 아랫사람 모두에게 각기 다른 예의로 대했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던 그는 가끔 하인들을 놀리기도 하고 바깥의 평민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귀족의 신분을 벗어나 랍가리왕궁을 영원히 떠났다. 그 시절 그는 그 후 10년동안 자신의 운명이 영원히 평민세계에 놓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러터나·구마·투라다하는 쿼제의 변화가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매우 빠르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전경하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고, 전경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관광객들은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티베트인으로서 불쾌하지만 뭐라 이야기 하기도 어려워 전경 수행자와 관광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벽만 보일 뿐이다.
사업의 이유로 아왕의 위쳇에는 한족(汉族) 손님들의 이름이 많고 그들끼리도 회식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신다. 이들과의 회식에서 초원에서 자라 해산물을 본 적이 없는 아왕은 처음 게를 보고 무서워서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대화
같은 오래된 가게지만 마지아미(玛吉阿米)의 사장 저커(泽科)의 상황은 한결 여유가 있다. 그는 체구가 크고 중국어(표준어)도 잘 하며 넓은 펠트모자를 쓰고 입에는 굵은 시가를 물었다—그의 겉모습은 완벽히 ‘국제화’ 되어 있다. 매일 저녁 바쿼제 모퉁이의 넓지 않은 2층에서 저커는 ‘베이징에서 온 친구’들을 만난다. 회식에서 그들은 하다(哈达-실크 스커프)를 매고 얼큰하게 취한다. 같은 가족기업인 마지아미의 경영 역시 훨씬 현대화 되어 있다. 내륙주민 및 외국인의 취향이 결합된 관습을 조정해 베이징에 체인점까지 열었다. 저커 옆에서 함께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역시 모두 내륙지역의 사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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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하나인 쑹밍(宋明)은 티베트 전통복장에 긴 머리를 산발하고 뒤를 돌아보면 얼굴의 각이 분명하며 티베트어에 능통하다. 이렇게 본토박이 티베트인 같은 생활에서 산둥(山东) 출생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바쿼제에 가게가 하나 있는데, 장족 예술에 대한 내륙 관광객들의 미적 기대에 맞게 세련된 가게에 물건 하나하나가 고상하고 깔끔하다.
쑹밍은 ‘예술 하는 사람’이라 자칭하며 “예술 하는 사람이 장사를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말하지만 이는 그의 사업이 번창하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 1990년대에 라싸로 온 그는 먼저 티베트에 진출한 한족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민감하고 주동적으로 라싸가 발전하는 기회를 통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쑹밍은 바쿼제에서의 변화 중에 가장 부분을 얻은 것이다.
바쿼제의 작지 않은 2층가계에서 한 벌에 2~3만위안 하는 쑹밍의 탕카는 ‘싼 제품’에 속한다. 그는 내륙지역에 탕카를 구경하러 바쿼제를 찾는 손님보다 훨씬 넓은 판로를 확보하고 있다. 어떤 손님들이 찾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기자에게 자신이 파는 탕카의 가격이 낮지 않은 만큼 ‘고급시장’에 팔리고 있다고 전했다.
쑹밍은 탕카를 그릴 줄 모른다. 라싸 근교의 산자락 아래 도로도 깔리지 않아 먼지로 숨이 막히는 흙 길 끝에서 그는 축구장 3분의2 크기의 탕카 한 장을 팔아 이층집을 짓고 사원 주변으로 수공업 학교를 지어 50명의 학생을 받았다. 그들은 학비와 생활비를 낼 필요 없이 탕카를 그리고 조각과 도자기 작품을 바쿼제에 걸어두고 전시 판매한다.
쑹밍은 “우리는 사회기업의 노선을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버는 돈은 그들이 누리는 생활과 비교가 어렵다. 전에 미술 전공자들을 모집한 적이 있는데, 각자 특기가 달라 쑹밍 ‘생산라인의 나사’로 정착하지 못하고 경력만 조금 쌓이면 다른 판로를 찾아 나가는 바람에 손해가 컸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술전공한 학생들은 뽑지 않고 있죠.” 쑹밍이 말했다. 학생들은 쑹밍이 멀리 목축지에서 뽑아온 아이들로 어리고 낯을 가린다. 이들은 방목 외에 별다른 진로도 없고 라싸 같은 대도시로 올 기회조차 없다. 쑹밍은 현지정부를 찾아가 ‘가장 가난한’ 이 아이들을 뽑아줄 것을 요구했다. “아이들 중에 30명은 홀 부모가정의 아이들이고 5~6명은 고아이고 장애아도 5~6명 있어요. 현(县) 인민정부에 따라 모집했는데, 지금까지 대학에 진학 한 두 명을 제외하고 나간 친구가 한 명도 없죠.”
아이들은 쑹밍을 따라 진로가 생겨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성심 성의껏 작품활동에 임한다.
아이들은 쑹밍이 안심할 수 있는 학생자원이다. 이들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는 허투루 쓰는 돈이 아니다. 2010년 세워진 쑹밍의 학교는 지금까지 한 명의 낙오자도 없다. 학생들은 2년간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 거의 다 화가로 독립할 수 있으며, 작품이 팔려 이윤이 생기면 스승과 함께 적은 몫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은 나이도 어리고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 결국 목축지에서 양을 치는 것에 비하면 엄청 좋은 것이다.
쑹밍은 선비출신의 상인처럼 보이기를 더 원한다. 티베트생활 17년차인 그는 가게의 모든 일에 여유롭게 대처한다. 1998년 내륙지역의 대학을 졸업할 때 쑹밍 역시 예술을 전공한 문예청년으로서 취업난을 겪었다. 북경에서의 떠돌이생활, 직업화가, 대학강의 등으로 생활하던 암울한 시기가 흘러가고 “티베트 맞춤지원의 기회가 생겨 티베트로 갔다.”
그는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라싸 고등사범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티베트인들과는 달리 쑹밍은 머리가 좋고 생각이 많아 3년후부터 창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선전(深圳)으로 내려간 지 8~9개월 만에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뽕나무 담배와 버터차의 지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쑹밍은 탕카, 도예, 조각에서 길을 찾았다. 예전 티베트에서 탕카의 전수는 과거 내륙지역의 극단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스승이 제자를 대리고 다니며 가르치고 제자는 8~9년을 배운 후 작품을 그려 보답하고 몇 년 후에 스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방식은 수련기간이 너무 길고 스승이 제자를 곁에 남도록 강요할 수도 없어 사제관계가 철저히 개인화되고 변동이 많으며 수익률도 적었다. 그래서 쑹밍은 이러한 수공업방식을 공업화 방식으로 변환했다—50명의 제자들을 두어 빨리 배워 익혀 대량으로 작품을 만들어내 이윤의 일부를 갖고 재투자하도록 하는 순환방식이다—전통 탕카 스승들에 비해 쑹밍 방식의 수익율이 훨씬 높았다.
화가는 장사에 대해 많이 알 필요가 없다. 쑹밍은 학생들에게 직업적 이상과 예술적 도덕을 가르친다. 그는 “탕카는 예술이고 수행방식이에요.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앉아있는 것이 참선과 같죠. 훌륭한 예술가는 출가한 사람처럼 차분해요” 라고 말했다.
화가는 날마다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전성기를 바치는 노동자일뿐이다. 탕카작업은 눈이 피곤해 50세까지 그리면 눈을 다 버린다.
탕카의 혁신에 관해 산둥출신 사장 쑹밍은 자신의 소감이 있다. 그는 짙은 색 터키석과 붉은 산호를 가리키며 “전통적인 탕카는 색깔이 너무 야하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탕카 기법에서 이런 화려한 색들은 광물질에서 얻는데, 이런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을 사용하고 이용하는 것은 매우 귀한 탕카 기법으로 티베트지역밖에 없다. 그러나 쑹밍의 생각은 다르다. “너무 세속적인 색이라 고급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쑹밍은 잿빛과 남색 등 중국 내륙지역의 산수화에 통용되는 중간 색이 고급스러운 색이라 본다. 그는 이제 막 만든 회색염료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급스러운 회색—차가운 회색이에요. 전통적인 탕카 선생님은 미적으로 능력이 없고 이런 색을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무엇이 고급스러운지 알죠.”
색깔에 관한 쑹밍의 생각이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꾼 색조가 내륙지역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탕카는 배우기 어렵지 않아요.” 쑹밍이 캔버스를 가리키며 그 위에 네모를 빼곡히 그렸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그리는 지는 네모를 찾아 따라 그리기만 하면 베끼고 가공하는 과정은 십자수와 같다. “한 달만 주면 기자님도 탕카를 그릴 수 있어요.” <중국신문주간(中国新闻周刊)》과의 인터뷰에서 쑹밍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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